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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19: 우문태‧우문옹의 업적을 탕진한 북주(北周)의 우문빈 <T>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01월27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3년01월21일 15시02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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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서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132> 우문직의 반란(AD574)​

 

우문태에게는 열 명이 넘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위왕 우문직은 여섯째로 현재 황제 우문옹과 어머니가 같았다. 같은 배에서 난 동생이었으므로 우문옹은 우문직을 끔찍하게 아꼈지만 실수를 할 때마다 꾸지람을 마다하지 않았다. 우문옹은 우문직의 집을 동궁으로 쓰면서 우문직에게는 거할 곳을 마음대로 정하라고 했는데 여러 관서를 둘러보다가 마음에 들지 않자 버린 절을 집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제왕 우문헌이 직에게 말했다. 

 

    “ 동생은 자녀가 많은데 그 절은 너무 좁지 않겠소?”

    

우문직이 대답했다.

 

   “ 내 한 몸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데 무슨 자손까지 걱정합니까?”

 

우문직이 우문옹과 함께 사냥을 하다가 난폭한 행동을 하자 만인이 보는 가운데 채찍질을 하였다. 형과 같이 우문호를 제거하고도 원하는 직을 얻지 못해 원한이 쌓여있었던 우문직이었다. AD574년 7월 황제가 운양으로 가면서 장안을 잠깐 비운 틈을 타고 우문직이 반란을 일으켰다. 장손람은 우문옹이 있는 곳으로 도망갔는데 울지운은 문을 닫아걸고 막았다. 울지운은 손가락까지 다쳤지만 끝까지 문을 방어했다. 우문직은 문에 불을 질렀는데 불이 꺼지면 쳐들어 올 것이 걱정되어 나무와 책상들을 가져와 불이 꺼지지 않도록 했다. 한참 뒤에도 불이 꺼지지 않자 우문직 일당들은 물러갔다. 울지운은 물러나는 우문직 군사들의 뒤를 습격하여 대패시켰다. 황제가 돌아와 우문직을 체포하고 폐서인 시킨 뒤 별궁에 가두었다가 얼마 있지 않아 죽였다. 울지운은 그 공로로 최고 병권을 가진 대장군이 되었다.    

<133> 북주의 북제 공격과 위효관의 3책(AD575-AD576)

 

북주 고조 우문옹은 혼란을 거듭하는 북제를 침략하기 위해 여러 진에 지시를 내려 군사를 충원하고 군사장비를 준비하도록 했다. 북제 또한 북주의 침략에 대비하여 방어태세를 강화했다. 북주 주국 우익이 간언을 올렸다.

 

  “ 국경을 맞대고 싸워봐야 이기고 지고 할 뿐 양측이 모두 피폐해집니다.

    계속 우호를 유지하다가 저쪽의 경계가 느슨해 질 때 

    생각지 못한 곳으로 나아가면 일거에 뺏을 수 있습니다.“

 

우문옹이 옳다고 생각했다. 위효관이 세 가지 책략을 내세웠다.

 

첫째, 때와 기회를 활용하지 않으면 이기기 어렵다.(不因際會難以成功)   

둘째, 마땅히 군사를 나누어 기다리고 있으면

     일, 이년 있으면 반드시 스스로 이반이 일어날 것이다. 

       (宜與陳人分其兵勢 一二年中必自離叛) 

셋째, 마땅히 이웃을 존중하며 서로간의 맹약을 환기시켜야 합니다. 

     백성을 편안 화합하게 하고 통상으로 서로 유익하게 해야합니다. 

      그런 가운데 예리함을 축적하고 무력을 쌓는 동안에 

      저쪽에서 싸움의 움직임이 보이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장책에 이르는 길이며 멀리 말을 부려 저절로 겸병하는 방책입니다.

      (宜還崇隣好申其盟約 安民和衆通商惠工

      蓄銳養威觀釁而動 斯及長策 遠馭座自兼幷)

 

우문옹은 그래도 전투를 일으키고 싶어서 이루겸을 따로 불러 믈었다.

 

  ” 짐은 군대를 동원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이루겸이 말했다.

 

  ” 북제는 광대에게 현혹되어 있고 술과 놀음에 빠져있습니다.

    곧은 말을 하는 오직 한 사람 곡률명월은 이미 참소로 죽었습니다.

    위아래는 마음이 벌어져 도로에서는 서로 눈 짓만 합니다.

    뺏기 참으로 쉽습니다.“

 

군대를 당장 도원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우문옹은 웃기만 했다. AD575년 3월 우문옹은 이루겸을 사신으로 북제에 보내 정탐하도록 했다.

 

가을 7월 우문옹은 드디어 대군을 일으켜 북제를 공략했다.

군사는 여섯 개 군으로 나누어 전삼군과 후삼군에 각각 삼군을 배치시켰다.

 

    ◾ 전삼군 총관 : 진왕  우문순, 사마소난, 달해진

    ◾ 후삼군 총관 : 월왕 우문성, 후막진숭, 조왕 우문초

 

우문헌은 2만 군사로 여양(하남 준현) 방면으로 나아갔고 양견은 3만 수군을 가지고 위수를 타고 내려가 황하를 따라 낙양으로 갔으며 후막진예는 2만 군사를 가지고 태행도(하남 박애)를 지켰고 이목은 3만 군사로 맹진을 지켰다. 우익은 3만 군사를 가지고 남쪽 방면으로 나아가 여주(하남 양성)와 진군(하남 회양)을 공격했다.

 

우문옹이 군대를 거느리고 하양(맹진,낙양 서쪽)으로 가려하자 우문필이 그쪽 방어가 단단하므로 분곡으로 나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조경은 오히려 진양(태원)을 곧바로 습격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포굉도 진양급습을 주장했다. 우문옹은 조심스러워서 6만 군사를 거느리고 맹진으로 나갔다.(AD575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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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주 대군이 북제의 영토에 들어서자 우문옹이 당부했다. 나무를 베는 것과 곡식을 밟는 것과 주민을 범하는 경우 머리를 베겠다고 했다.  북주군은 곳곳에서 북제의 성을 함락시키고 낙양을 압박해 들어갔으나 독고영업이 지키는 금용성(낙양 서북쪽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9월에 북제의 고아나굉이 군사를 거느리고 낙양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왔다. 이 때 우문옹이 병이 나서 모든 군사를 되돌렸다. 북제 장수들은 퇴각하는 북주군사를 뒤쫓아가자고 했으나 행대 걸복귀하는 허락하지 않았다. 우문헌, 우익, 이목도 곳곳에서 승리했으나 성을 지키지 않고 퇴각했다.(AD575년 8월)

 

일 년이 지난 AD576년 9월 우문옹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 지난해 내가 열병이 들어 도적을 평정하지 못했다.

    들어가 보니 북제 군사들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게다가 조정은 썩고 문드러져서 소인배들이 정치를 농단하면서

    저녁에 할 일을 아침에도 계획하지 않고 있었다.   

    백성은 살림이 어려워 난리들이다.   

    하늘이 준 기회를 받지 않으면 이 또한 후회로 남을까 걱정이다.

    진주(산서성 임분)은 고환이 일어난 곳이다.

    내가 그곳을 공격하면 저들은 반드시 구원하로 올 것이다.

    매복하고 있다가 급시에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그런 다음 파죽지세로 동쪽으로 들어가 

    도적들의 소굴(업을 말함)을 소탕한다면 

    글자와 수레바퀴를 통일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제장들은 군사발동에 부정적이었다. 우문옹이 소리쳤다.

 

  ”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나의 군대를 막는 놈들은 모조리 군법으로 처리할 것이다.“

 

10월 4일 우문성, 우문량, 양견을 우삼군으로 삼고 우문검, 두태, 구숭을 좌삼군으로 하며 우문헌과 우문순을 선봉으로 출격했다. 우문옹은 진주에 도착하자 진을 치고 주면 여러 곳에 군사를 보내 북제영토를 침범하도록 했다. 이 때 진주를 지키는 북제의 진주행대 좌승 장연준이 매우 성실하고 총명하여 전쟁준비를 매우 꼼꼼히 하고 있었는데 그런 장연준을 질시하던 조정 대신들은 무능한 사람으로 교체해 버렸다. 

 

10월 19일 북제에서는 태원시 남쪽에 대군을 모았다. 25일 북제의 주군 고위는 대군을 이끌고 진주로 향했다. 그 와중에 진주를 방어하던 진주자사 최경숭이 북주에 항복하여 진주가 적의 손에 떨어졌다.  

 

진주로 향하던 고위는 곳곳에서 쉬면서 풍비와 함께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진주가 함락될 위험에 있다는 전갈이 오전에만 세 번이나 도착했지만 우승상 고아나굉은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 대가께서 지금 중요한 사냥을 하시고 계신데

    어찌 변방의 작은 일상적인 일을 가지고 긴급히 상주하겠느냐?“

 

고아나굉은 보고하지 않고 묵살했다. 저녁에 이르러 진주가 함락되었다는 전갈이 오자 그제서야 고아나굉은 황제에게 그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는 급히 군영으로 돌아오고 싶었으나 풍비가 재미에 빠져 한 바퀴 더 사냥하자고 조르는 바람에 돌아가는 것을 멈추었다. 10월 28일 북제의 고위는 군사를 나누어 내려왔고 북주에서는 진주를 지키는 양사언을 빼고는 모두 뒤로 물러섰다. 매복 작전인 셈이었다.

 

북제의  주군 고위가 진주(임분)에 도착했다. 북주 장군들은 이참에 고위를 공격하자고 했지만 침착한 우문옹은 군사를 물리고 예봉을 피했다. 북제군은 진주를 포위하고 밤낮으로 공격했다. 양사언이 소리쳤다.

 

  ” 죽고 사는 것은 오늘 정해진다. 내가 너희들의 선봉에 설 것이다.

    (死在今日 吾以爾先)“

 

북주의 군사들이 분전하여 일당백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우문옹은 6만 군사를 우문헌에게 주어 급히 진주로 보내 구원하게 했다. 주군 우문옹은 잠깐 장안으로 갔다가 열흘 뒤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대군과 합류했다.  

   

 

<134> 고위의 도망(AD576)

 

총력 공격에도 불구하고 진주를 수복하지 못한 고위는 고아나굉에게 계속 공격을 할 것인지를 물었다. 고아나굉이 말했다.

 

  ” 우리 군사가 많으나 전투를 감당할 군사는 10만을 넘지 못합니다.

    다들 병들고 다쳤으며 나무하거나 불 때는 사람들 뿐 입니다.

    물러나서 분수 동북쪽 다리를 지키는 것만 못하겠습니다.”

 

북주군의 위세가 대단하니 일단 후퇴하자는 말이었다. 안토근이 발끈하며 반박했다.

 

  “ 무슨 말씀입니까.

    한 줌 정도밖에 되지 않는 도적들을 

    말 위에서 베고 분수 속에 내던져 버릴 뿐입니다.”

 

고위는 한참 망서렸다. 그 때 누군가가 북주군이 더 먼 곳에서 와서 상황이 더 나쁠 것이므로 공격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위는 그렇다고 판단하고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기다리고 있던 우문옹도 고위의 군대를 맞아 격전을 벌였다. 시간이 갈수록 북제의 패색이 짙어졌다. 녹상서사 목제파가 황제에게 도망가야 한다고 두 번이나 소리 질렀다. 고위는 풍숙비를 데리고 달아났다. 개부의동삼사 해장이 말리고 나섰다.

  “ 반진반퇴는 전쟁에서 늘 있는 일입니다.

    지금 병사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있고 다치지도 않았습니다.

    폐하께서 버리고 어디로 가신단 말입니까.

    말굽이 한 번 움직임에 따라서 

    사람의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다시 안정시킬 수가 없습니다.

    원컨대 속히 돌아오셔서 안심시켜 주십시오.”    

 

 무위장군 장상산도 황제 뒤에서 간하였다.

 

  “ 군대가 다시 집결했고 포위상태도 좋습니다.

    지존께서는 마땅히 돌아가셔야 합니다.

    거짓말 같으시면 시종들과 같이 가셔서 직접 보십시오.”

 

황제가 그럴 생각으로 바뀌자 목제파가 팔꿈치로 치면서 만류했다.

 

  “ 저런 말들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마침내 고위는 풍숙비를 데리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주군이 도망갔다는 소식이 퍼지자 북제의 군사는 안개처럼 무너졌다. 죽은 사람이 만 명이 넘었고 가지고 온 전쟁물자는 고스란히 버리고 돌아갔다. 고연종만이 자신의 군대를 가지런히 하여 후퇴했다.

 

우문옹이 평양(임분)에 입성하고 나서 피곤한 군사를 되돌리려고 하자 양사언이 극구 반대했다.

 

  “ 지금 북제 군주가 혼비백산 도망갔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크게 동요하고 있습니다.

    다시 공격할까 매우 두려워하고 있으니

    그것을 이용하여 공격하시면 반드시 적을 꺾을 수 있습니다.”

 

우문옹이 양사언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 진주를 얻은 것은 장차 북제를 평정하는 기초이다.

    나는 후방의 변고를 염려하여 근심하고 있으니

    너는 나를 위하여 이곳을 잘 지키고 있으라.”

 

우문옹은 군사를 가다듬고 북쪽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돌아가자는 장수들이 많았으나 따라오지 않으면 혼자라도 가겠다고 생각을 꺾지 않았다. 

 

북제 주군은 진양을 고연종과 고효형에게 맡기고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 북삭주(산서 삭주)로 도망갔다. 신하들이 북삭주로 가면 진양을 포기하는 것이며 돌궐에게 귀속되는 것이므로  안 된다고 애원했으나 고위는 듣지 않았다. 고위는 진양을 지키는 고연종과 고효형에게 조서를 내려 군사를 모으라고 지시했다. 고위가 장차 북삭주로 가겠다고 하자 울면서 말렸지만 먼저 황태후(호태후)와 태자를 먼저 북삭주로 피신시켰다. 고위는 안덕왕 고연종에게 상국 및 병주자사로 임명하면서 말했다.

 

   “ 병주는 형님(사촌 형)이 가지십시오.

    이 아이는 지금 떠나겠습니다.”  

 

고연종이 말했다.

 

  “ 폐하께서는 사직을 위해 움직이지 마십시오.

    신이 폐하와 사직을 위해 

    나가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반드시 적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목제파가 곁에서 비웃으며 말했다.

 

  “ 지존께서 이미 계획을 확고히 하셨으니

    왕께서 막을 수가 없으십니다.” 

 

고위가 밤에 오룡문(진양궁 동문)을 부수고 나서 돌궐로 달아나려 하자 시종하던 신하들이 다 도망가고 사라졌다.

 

북제의 장수들은 속속 북주에 항복했다. 하발복은이 북주로 망명해오자 우문옹은 그에게 높은 벼슬을 내렸다. 고아나굉은 1만 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북준군이 온다는 풍문만 듣고 도망치고 말았다. 한건업이 투항하자 북주에서는 상주국으로 우대했다. 

 

 

<135> 북주에게 함락되는 북제 진양(태원(AD576) 

 

돌궐 땅인 북삭주로 향하던 고위는 영군장군 매승랑이 말 앞에서 막고 조아리자 생각을 바꾸어 업으로 가기로 했다. 도망온 고아나굉이 수행했고 무리의 숫자는 광녕왕 고효형과 양성왕 고언도 등 십여 명이었다. 

 

목제파는 서쪽으로 달아나 북주에 투항했다. 육령훤은 자살하고 그의 친족들은 모두 주살되었다. 우문옹은 목제파에게 주국 및 의주(산서성 동천)자사를 주었다. 그리고는 조서를 내렸다.

 

  “ 만약 사람이 꾀를 묘하게 쓴다면 천명에 깊이 통달하여

    관직을 높이고 상작을 더 높이 내릴 것이다.

    저쪽으로 투항한 옛 나의 장수들도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사면해 줄 것이다.”

 

우문옹의 사면 조서가 알려지자 북제의 신하들은 다투어 북주로 투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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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1월27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3년01월21일 15시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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