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청 시인의 문학 산책 <36> 단절과 소외의 자리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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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절과 소외가 시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작고한 선배 시인 이형기 선생은 ‘폐허가 시를 만든다’고 말한 바 있는데 비슷한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단절과 소외의 자리로 가서 그것과 하나가 될 수 있을 때, 시적 자아가 활달한 상상력과 푸진 감수성 속에서 맘껏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절과 소외 속으로 가서 일상을 향해 열려진 문들을 닫아 걸고, 세상사에 길들여진 눈과 귀를 잠재우고, 텔레비전과 신문과 전화기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때, 나는 시를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대개의 경우, 그동안 내가 써 온 시들이 대개의 경우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2000년에 간행한 내 시집 『석탄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의 시편들은 대부분 강원도 탄광지대인 사북, 고한, 장성지역 탄광 마을을 찾아가 거기 머물면서 노트북을 두드려 얻어낸 시편들이었다. 전 시집 『코뿔소를 찾아서』를 낸 1955년 이후 5년여에 걸치는 기간 동안 나는 탄광 마을을 수도 없이 오르내렸다.
내가 탄광 마을을 오르내린 이유는 이렇다. 잘 아는 대로 1982년 소위 ‘사북사태’ 이후 이 지역은 운동권 사람들의 관심이 가장 치열하게 분출되던 현장이었다. 열악한 노동 현장과 가난한 노동자들이 있었고, 정부의 소위 주유종탄(主油從炭 )정책에 대항해서 힘겨루기를 할 수 있는 주된 무대였다. 그래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진 실천가들이 그곳에 집결하였고, 또 그런 이념에 관심 있는 많은 문필인들이 그곳과 그곳의 사람들을 노래하였다.
그러나, 그 후 결국 그곳 탄광들의 대부분은 폐광되었고 그곳에서 마지막 길을 찾던 사람들은 춥고 검은 그곳 마을들을 떠났다. 그리고 그곳을 그렇게도 열심히 노래하던 시인 소설가들의 관심도 차츰 그곳을 떠났다. 말하자면 그곳은 관심 밖의 빈 공간이 되어 남았고, 얼마 후 대신 카지노와 전당포들이 들어와 그곳에 환락을 뿌리고 있다.
나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던져진 사북, 고한, 장성으로 가서 광부들이 살았던 그 사택촌을 거닐고 빈 시가지를 거닐었으며 무연탄을 실어 나르던 컨베이어벨트가 흉물처럼 버려진 탄광 자리를 살펴보곤 하였다. 광부들이 살다 떠난 빈집도 살펴보았다. 부엌과 방 하나씩으로 잇대어진 부로크담과 슬레이트 지붕들, 그곳에서 탄광촌 산골마을의 혹한을 견딘 사람들을 생각하였다. 거기 뒹구는 양은 냄비와 이불들, 그 담 벼락에 붙은 노총회장 선거 벽보들-사람이 떠난 빈 집은 원래가 썰렁하기 마련이지만 거기 버려진 집이라는 것들은 그냥 슬픔이었다.
탄광들이 폐광되면서 그곳의 자료들 중 일부가 그곳의 석탄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곳 한 공간에 전시된 기록 보관 전시실의 문서들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탄광사고로 사망한 광부 가족들과의 합의서 -일방적으로 회사 측에 유리하게 작성된-, 진폐 환자의 진료 기록 등 수많은 기록들을 나는 그대로 필사해 가져왔었다. 이 기록들은 시집 『석탄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의 시편들 속에 그대로 인용되었다. 나는 그 자료들을 내 시적 감성 속에 용해할 수가 없었다. 자료 자체가 가장 여실한 리얼리티를 지니고 있었음으로, 자료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전율이었음으로.
나는 이 시대를 사는 시인으로, 또한 언필칭 지성을 자처하고 사는 자로서 이 참담한 단절과 소외의 현장에 구경꾼으로만 머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 ‘막장’이라는 곳을 들어가 보기로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나는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의 소장에게 특청을 넣어 거길 들어가 보기로 하였다. 막장은 멀었다. 입구로부터 500m를 걸어들어 가서 엘리베이터로 800m 를 수직 하강한 다음 다시 인차(석탄과 광부들을 실어 나르는 레일 차)를 타고 3000m 를 가서야 막장이었다. 후꾼후꾼 지열이 끓고 있었으며 석탄의 비산 먼지가 자욱하였다. 방진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답답함이 더했다. 4억 년 전의 밀림과 거대 짐승들의 포효가 살아 있는 곳, 아니 4억 여 년 전의 밀림이 현생 인류와 처음으로 조우하는 현장이 막장이었다.
시집 『석탄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의 시편들은 그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내가 시집 『석탄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내자 너무 고지식하고, 시대 조류에 맞지 않는 게 아니냐는 말들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나는 시의 진정성이 배어 있는 이 시집을 보람으로 생각한다.
앞으로도 나는 이제까지 그렇게 시의 자리를 마련해 왔듯이 그렇게 시에게도 닥아 갈 것이다. 가장, 정통적인 보폭으로 가장 보수적인 빠르기로 걸어가면서 내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가려 한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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