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사정관제의 진짜 문제점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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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사정관제(현 학생부 종합전형)에 꽤 큰 기대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기존의 입시보다 나을 게 별로 없는,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 제도라는 생각을 점점 많이 하게 된다. 입학사정관제에는 어떤 문제점들이 있는가?
최근 언론에 부각되어 세간의 관심을 끈 문제점은 ‘스펙’의 조작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수상 실적의 조작을 통해 자녀를 명문 한의대에 합격시킨 학부모가 경찰에 적발됨으로써 수면 위로 떠오른 문제점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얼마나 많을까? 적발된 학부모가 경찰에게 했다는 "왜 나만 갖고 그러세요. 지금 강남에선 다들 이렇게 하고 있어요"란 말로 미루어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는 일인 것 같다. 하지만 그 학부모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 들여선 곤란하다. 강남에서도 그 학부모가 했던 방식의 명백한 조작 행위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범죄행위에 해당하는 정도의 커다란 부정행위는 강남에서도 소수일 것이다.
물론 소수의 행위에 불과할지라도 그런 식의 부정행위는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기에 충분하다. 정부 차원의 단호한 대응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입학사정관제의 진짜 문제는 아니다.
입학사정관제에서는 검증 불가능한 허위사실을 적당히 섞어 넣거나 작은 일을 과장하여 대단한 일로 만드는 작은 부정행위가 일상화되어 있다. 이러한 부정행위는 사안 하나하나만 떼어놓고 보면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일이지만 입학사정관제에 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다는 점에서 소수의 커다란 부정행위보다 더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자기소개서와 교사추천서만 해도 허위와 과장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모든 자기소개서와 교사추천서가 거짓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온전히 사실(진실)로만 이루어진 자기소개서와 교사추천서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물론 자기소개서와 교사추천서에 약간의 허위나 과장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허위와 과장의 정도가 교사들이 도덕적으로 상당한 불편함을 느끼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강남의 실상을 전해준 어느 교사는 교사추천서에서 차지하는 진실의 비중을 10에 2~3정도로 판단하고 있다. 거짓의 비중을 훨씬 크게 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허위를 적당히 섞고 사실을 과장하여 그럴듯한 자기소개서와 추천서를 만드는데 소모되는 학생과 학부모와 교사의 에너지는 상당하다. 사회적으로 무용한, 오히려 사회에 해로운 일에 너무나 큰 에너지가 소모되고 있다.
입학사정관제는 이렇게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거짓말 경쟁을 강요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윤리를 타락시킨다. 하지만 이것도 입학사정관제의 진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입학사정관제의 진짜 문제는, 비유적 표현을 좀 쓰자면, 답안지 작성을 학생이 혼자서 하지 않고 자신을 도와주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데에 있다.
입학사정관제를 수능시험과 비교해보자. 수능시험은 적어도 시험을 치르는 그날만은 학생과 학생끼리의 경쟁이다. 시험 전까지 부모는 비싼 사교육을 제공함으로써 학생을 지원할 수 있고, 학교는 수업을 철저히 입시위주로 함으로써 학생을 도울 수 있다. 하지만 경쟁이 벌어지는 시험장에는 학생 외에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 학생은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답안지를 작성해야 한다. 그동안 학생을 도왔던 나머지 사람들은 멀리서 기도나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입학사정관제는 다르다. 입학사정관제에서 답안지 역할을 하는 자료와 스펙의 상당부분은 학생과 부모와 학교교사들이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자기소개서는 대부분 부모와 학생이 함께 작성한다. 아예 부모가 대신 써주는 경우도 적지 않다. 부모가 대신 써주면 입학사정관이 알아챈다고? 사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실제로 나는 부모가 완전히 대신 써준 자기소개서를 가지고 최고 명문대학에 합격한 경우를 알고 있다. 자기소개서만이 아니다. 경시대회에 제출하는 작품을 집에서 만들 수 있는 경우, 예컨대 UCC 경시대회 같은 경우는 출품할 작품을 부모가 함께 만들거나 아예 부모가 전문가를 고용하여 만들어 줄 수 있다.
교사추천서, 학교생활기록부, 수상경력을 만드는 데에서 학교(교사)의 역할은 매우 크다. 학생과 함께 입학사정관이 읽을 답안을 작성한다.
교사추천서는 교사가 전적으로 답안지의 작성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교사추천서에서 거짓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결국 교사추천서에서는 사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버무려 그럴듯한 추천서를 작성하는 능력이 절대적이다. 이런 일에 서투른 교사만을 주위에 둔 학생은 입학사정관을 감동시키는 추천서를 받아낼 수 없다. 학교생활기록부 역시 교사가 답안지의 작성자이다. 학생을 훌륭한 학생으로 묘사해주는 교사의 역량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런데 모든 교사가 이런 능력을 갖출 수는 없다. 이럴 때는 부모가 직접 나선다. 추천서를 대신 써서 교사에게 주고, 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될 내용을 직접 작성하여 교사에게 준다. 물론 학부모가 작성하고 교사가 그대로 기록하는 경우는 아직 널리 퍼진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입학사정관제의 비중이 더 커지면 그런 현상 또한 점차 많아질 것이 분명하다.
학생의 스펙은 전적으로 학생과 학교의 공동 작업에 의해 만들어진다. 좋은 스펙은 학생이 혼자 열심히 한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예컨대 학교에서 경시대회를 많이 만들어 주지 않으면 제아무리 뛰어난 학생도 상을 많이 받을 수 없다. 또 학교가 적절히 편법을 동원하여 상의 가치를 높여주어야 학생에게 유리하다. 학교가 너무 교육적으로만 행동하면 스펙의 질이 좋아질 수 없다.
지금 학교에서는 입학사정관제를 위한 경시대회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참가여부를 학생의 자유의사에 맡기면 경시대회가 높은 참여율을 달성하기 어렵다. 아무래도 수상 가능성이 없는 대다수 학생들은 경시대회에 무관심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수상기록에 참가 학생 수를 기록해야 하기에 참가자 수가 적으면 상이 가치를 잃을 수 있다. 이때 학교가 모든 학생이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경시대회의 수를 늘리거나, 이러저러한 편법을 동원하여 참가자 수를 부풀리는 행동을 적극적으로 하면 그 학교 학생들은 좋은 스펙을 쌓게 된다. 경시대회의 수를 적절한 수준으로 유지하거나 학생의 자유의사를 존중하는 학교는 학생들로 하여금 좋은 스펙을 쌓게 할 수 없다. 편법을 동원하여 참가 숫자를 부풀리는 일을 잘못하는 학교의 학생들은 스펙 쌓기 경쟁에서 현저히 불리하다. 결국 학생의 좋은 스펙은 학생 혼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학교와 함께 만드는 것이다.
입학사정관제에서는 부모와 학교가 선수로서 직접 경쟁에 참여한다. 입학사정관제에서는 부모와 부모의 대결, 학교와 학교의 대결이 입시경쟁의 공식적인 한 부분이다. 이 경쟁의 결과는 너무나 명백하다. 부모와 학교를 잘못 만난 학생은 입학사정관이 요구하는 답안지(자료)를 제대로 작성할 수 없어 패배한다. 부모와 학교를 잘 만난 학생은 그들과 함께, 아니 그들로 하여금 입학사정관을 감동시키는 답안지(자료)를 작성하게 하여 승리한다.
성적 위주의 경쟁에서도 부모와 학교의 역할은 컸다. 비싼 사교육을 제공하는 부모를 둔 학생이 유리하고, 입시명문고를 다니는 학생이 유리했다. 이것은 우리사회의 큰 문제다. 입학사정관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문제를 현저히 더 심화시킬 것만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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