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1:3대(代)만에 최강국 전연을 무너뜨린 모용위(I)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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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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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석지가 후조를 계승(AD350)
석호의 친아들인 양국(하북성 형태)의 신흥왕 석지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연호를 영녕이라고 하면서 여음왕 석곤을 상국으로 삼았다. 주변에 흩어져 웅거하는 모든 이민족은 석지에게 지지를 표명하였다. 석지는 요익중에게 우승상, 친조왕이라고 칭하면서 특별히 우대하였다. 요익중의 아들 요양이 배포도 크고 용감하며 지략이 뛰어났으므로 주변 모두가 그를 세자로 책봉하라고 권했지만 요익중은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석지는 요양을 예주자사 신창공에 책봉했고 부건에게는 도독하남제군사 및 연주목과 약양군공에 봉하였다.
AD350년 4월 석지는 10만 군사를 석곤에게 붙여서 왕랑과 장거 등과 함께 남쪽 염민의 위나라를 공격했다. 6월에 석곤의 군사는 한단을 점거하고 번양(하남성 내황현)에서 유국과 협공하기로 했다. 그러나 염위의 장군 왕태가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석곤의 군대는 크게 깨졌다. 유국은 군대를 돌려 돌아가고 말았다.
(42) 부건의 관중 장악과 장안입성(AD350)
석지의 거기장군 왕랑이 석곤과 함께 업을 공격하러 떠난 사이 왕랑의 사마 두홍은 장안을 점거하고서 스스로 동진의 정북장군 및 옹주자사라고 부르면서 장거를 자신의 사마로 삼았는데 부홍의 아들 부건이 장안을 탐내어 뺏을 생각이 있었다. 따라서 두홍이 그 생각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겉으로는 석지가 내린 후조의 관작(도독하남제군사 및 연주목과 약양군공)을 받는 척하면서 부하들을 하남 요지에 임명하여 서쪽(즉 장안)에 뜻이 전혀 없는 것 같이 위장했다.
이렇게 위장하여 두홍을 안심시킨 뒤 부홍은 스스로 동진이 내린 직책, 즉 정서대장군 및 도독관중제군사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전격적으로 군대를 몰아서 두홍을 쳐들어갔다. 동생 부웅은 5천 군사로 동관으로 들어가고, 부청은 7천 무리로 지관(하남성 제원)으로 들어갔다.
부웅이 동생 부청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 성공하지 못한다면
너는 하북에서 죽을 것이고
나는 하남에서 죽을 것이다.“
두홍은 장수 장선과 1만 3천의 군사를 보내 동관의 북쪽에서 부웅과 부청의 군사를 맞아 싸웠으나 장선은 참패하고 말았다. 두홍은 관중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장안에서 부웅 부청의 군사를 대적했으나 두홍의 아우 두욱이 부건에게 항복함으로써 거의 모든 전투에서 지고 말았다. 주변의모든 성읍들은 부건에게 귀부하였지만 두홍은 장안성을 닫아걸고 대치하면서 항복하지 않고 버티었다.(AD350년8월)
부청은 위수 북쪽에서 장선의 나머지 군사를 격파하고 그를 사로잡았다. 장선이 잡히자 삼보(장안을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눈 지역)의 모든 성과 보루들이 부청에게 항복했다. 10월 부건이 장안으로 급히 들어오자 석 달간이나 버티던 두홍과 장거도 성을 버리고 서쪽의 사죽(섬서성 주지)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부건은 11월 27일 장안성에 입성했다. 당시 백성들은 진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살아있었으므로 부건은 참군 두산백을 건강에 보내 형식적으로 장안이 진나라 소유의 땅이 된 것처럼 승리를 바쳤다. 다음해(AD351년 1월) 부건은 장안에서 대진(大秦:역사에서는 전진前秦)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천왕자리에 오른다.
(43) 모용준의 천도와 남진 (AD351)
모용준은 후조가 뿌리째 흔들리면서 남쪽 영역을 확대하자 수도를 용성(요녕성 조양)에서 계(북경)로 옮겼다. 그리고 세 갈래로 나누어 대대적인 남진 정책을 펼쳤다. 모용각에게 중산(하북선 정현)을 공격하게 하고 모용낙에게 상산(하북 정정)을 내침하도록 했으며 모용평은 노구(하북 요양)의 왕오를 침범하도로 했다.
양국을 무난히 방어한 조왕 석지는 장수 유현과 7만 군사를 일으켜 업성의 염민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석지의 군대가 업성 부근까지 도달하자 겁이 난 염민은 위장군 왕태와 상의하려고 했지만 왕태는 병을 핑계로 의논하기를 거부했다. 할 수 없이 염민은 홀로 전쟁에 나섰고 유현을 대파하고 3만여 명을 참살했다. 유현이 염민에게 항복하면서 자신이 돌아가서 석지를 암살하여 보답하겠다고 하자 염민은 그렇게 믿고 회군하여 돌아갔다. 그리고는 반란음모죄로 도와주지 않은 왕태와 그 삼족을 처치했다.
양국으로 돌아온 유현은 석지와 승상 석병, 그리고 태재 조서 등 10여명을 시해하고 그 머리를 업으로 보냈다. 이로써 마지막 남은 후조의 뿌리가 완전히 절멸된 셈이다. AD319년 석륵이 후조를 세운지 꼭 32년 만에 망한 것이다. 염민은 석지의 머리를 사거리에서 태워버리고 유현에게 상대장군 및 대선우 기주목의 직책을 내렸다.(AD351년3-4월) 그러나 몇 달 뒤 유현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업을 공격했으나 패해서 돌아온 뒤 스스로 황제를 자칭했다.
(44) 염위 주군 염민의 사망과 모용준의 칭제(AD352)
양국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했던 유현은 그 다음해(AD352년) 염민의 공격을 받고 사로잡혀 죽었다. 염민은 전연 모용준의 장수 모용각의 공격을 받고 정현(하북 정주)에서 사로잡혀 계성(북경)으로 압송된 뒤 다음 해인 AD352년 5월 처형되었다. 염민의 군대는 보병 중심이라서 산에 숨었으므로 기병 중심의 모용준 군대가 쉽게 이길 수가 없었다. 모용준은 염민의 군대를 평지로 유인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포위를 풀고 퇴각하는 척했다. 산 속에 고립되어있던 염민의 군대가 모용준이 퇴각하는 것을 보고 산을 내려오다가 모두 포획되었다.
모용평은 군대를 몰아서 진군해 업성을 포위했다. 다른 지역을 모두 평정한 모용준이 모용군, 모여근, 황보군과 2만 기보병을 보내 업성 포위를 강화했다. 염민의 아들 염지가 업성에서 버티었으나 7월 염위의 장수 마원이 성문을 열고 항복함으로써 염위는 건국 2년 만에 멸망했다. 모용준은 염민의 아들 염지를 죽이지 않고 해빈후라는 작위를 주어 생계를 이어가게 하였으나 2년 뒤 반역죄의 무고를 덮어씌워 죽였다. 전연이 막강한 세력으로 남쪽으로 밀려들자 예전에 후조의 장수였던 사람들은 속속 전연에 항복했다. 모용준은 이들을 후대하면서 예전의 직책을 그대로 수여했다. 왕탁은 익주자사, 기일은 진주자사, 장평은 병주자사, 이력은 연주자사, 고창은 안서장군 그리고 유녕에게 거기장군의 칭호를 내렸다. 모용각은 군사를 안평에 주둔시키고 왕오가 지키고 있는 안국을 공략했다. 왕오의 부장 진흥이 왕오를 살해하고 여호라는 사람은 그런 진흥을 죽이고 스스로 안국왕이라고 칭했다. 소림이라는 자도 무극(하북성 무극)에서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자 모용각기 나서서 소림을 토벌했다. 모용각은 노구(하북성 요양)를 포위하고 공략했는데 2년 뒤인 AD354년 마침내 노구를 함락시켰다. 자칭 안국왕이라고 떠던 여호는 남쪽으로 도망갔다가 결국에는 전연에 항복하고 말았다.
수도를 옮기고 하북 지역의 후조 영토를 거의 장악한 모용준은 부하들의 지극한 요청으로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면서 신하들의 직책을 걸맞게 올려 주었다. 국상 봉혁을 태위로 삼고 좌장사 양무는 상서령, 우사마 황보진은 상서좌복야 그리고 전서령 장희를 우복야로 임명했다. (AD352년 10월) 다음 해 AD353년 모용준은 모용엽을 황태자로 삼았다.
(45) 전연과 동진의 접촉마찰(AD356)
AD350년대 중엽 동진과 전진이 격렬하게 싸우는 동안 용맹한 모용패(수)가 산동성 서부 일대를 장악한데다 요양이 회남 땅을 가지고 전연에 귀속하자 갑자기 전연은 당시 어느 나라 못지않게 영토가 넓고 강대해 졌다. 전연의 영토는 황하를 경계로 동진과 맞붙게 되었는데 이 때 이 지역 동진군대의 수장이 광고(산동성 익도, 지금의 청주북쪽)성에 주둔하던 진북장군 단감이었다. 단감은 모용준에게 편지를 보내 황제를 칭한 것의 참람한 것을 지적하였다.단감은 모용준 어머니가 단씨였으므로 외사촌 이었다. 모용준은 화가 나서 모용각을 대도독 무군장군으로 삼고 양무를 부이관으로 삼아서 단감을 치도록 했다. (AD355)
모용준은 모용각을 보내 황하를 건너게 했다. 단감의 동생 단비가 자신이 전연의 모용각 군사를 먼저 막겠다고 간청했으나 단감이 허용하지 않았다. 전연의 군사를 들여보낸 다음 공격하겠다는 것이 단감의 전략이었다. 단비가 계속해서 우겨대자 단감은 동생 단비를 죽였다.
전연의 군사가 무방비 상태의 황하를 건넜다. 단감은 곧바로 3만 대군을 보내 전투에 들어갔다. 치수에서 양 쪽 군대가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으나 결과는 모용각의 대승이었다. 단감의 동생 단흠이 포로로 잡히고 모용각은 군대를 몰아서 광고성(산동성 익도현)을 포위했다.(AD356) 단감은 부하 단온을 동진 조정으로 보내 구원병을 요청했다. 동진은 서주자사 순선을 보내 낭야(산동성 임기)에 주둔시켰다. 전연에서도 모용각을 후원하기 위해 견성(산동성 견성)에 있던 왕등을 보냈으나 왕등은 양도(산동성 기남 북쪽)에서 순선에게 붙잡혀 죽었다.
모용각이 단감이 장악하고 있는 광고(청주)를 포위한지 오래되자 제장들이 서둘러 공격하자고 졸랐다. 모용각이 이렇게 말했다.
“ 군사 사용에는 천천히 할 때와 서둘러 할 때가 따로 있는 법이다.
옛 말에 열 배면 포위하고 다섯 배면 공격한다고 했는데
아직 단감의 군사가 많고 또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굳건한 성채에 의지하여 위아래가 힘을 합하고 있으니
아직은 쉽지 않다.
필사적으로 공격한다면 못 뽑을 것은 없겠으나
우리 병사가 많이 다치게 된다.
잠시도 쉬지 못한 병사들 때문에 나도 잠을 자지 못했고
또 요점은 함락하는 데 있는 것이지
급하게 공을 세우려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포위상태가 오래 지나자 단감의 식량이 부족해졌다. 단감은 속전속결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와 전투를 도발했다. 기다리고 있던 모용각의 병사들은 재빨리 성문으로 들어가는 퇴각로를 차단했다. 결국 안팎으로 곤궁해진 단감이 그 해 11월 면박하고 투항해왔다. 모용각은 단감과 2년 전 전연을 배반하고 동진으로 도망갔던 주독을 계로 압송했다. 모용준은 단감에게는 복순장군이라는 칭호를 내렸지만 다음 해에 3천여 동진 무리들과 함께 죽여서 묻었다. 주독은 5형(묵형,주형,태형,절형,참형)을 다 갖추어 죽였다. 왜냐하면 주독이 배반하면서 황족 모용수를 죽였기 때문이다. 모용준은 모용진을 광고성에 주둔시켰다. 이 해 여름에 태자 모용엽이 일찍 죽었는데 모용준은 다음해에 일곱 살 된 모용위를 태자로 책봉했다 임기에 주둔하던 동진의 순선은 단감이 패하자 군사를 물려 기남에서 서주자사의 본영이 있는 하비로 돌아왔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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