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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1:3대(代)만에 최강국 전연을 무너뜨린 모용위(G)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9월25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8월17일 14시14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2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31) 명군 모용황의 지시(AD345)

 

기실참군 봉유의 폐부를 찌르는 간언을 들은 모용황은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렸다.

 

“ 봉기실군의 간언을 듣고 고는 참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들은 곡식을 생명으로 삼는 것이니

  원유(왕실 소유 전지)를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라.

  실로 가난한 자에게는 관의 소를 무상으로 빌려줄 것이며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는 위, 진의 예(10분의 3)에 따르라.

  하천과 도랑으로 유익한 것은 때에 맞추어 수리하고 다스리라. 

  공훈을 세운 사람이 많으므로 관원을 줄이는 것은 어려우니

  장차 중원을 장악할 때 까지 기다려서 천천히 논의하라.

  공인, 상인, 학생의 수는 마땅히 줄여서 고르게 하라. 

  무릇 신하가 임금에게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니

  비록 미치고 망령된 소리 같아도 

  그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쓰도록 하라.  

  왕헌과 유명은 비록 폐출될 죄를 지었으나

  고가 관대함과 도량이 좁아서 그런 것이니 마땅히 관직에 복직시키고

  여전히 간언을 담당하는 관청에 있게 하라.

  봉생은 충성을 다하여 왕신의 본체를 깨우쳐 주었으니 5만전을 하사하여 

  고의 허물을 말하고 싶은 사람은 귀천을 불문하고 구애받지 않고

  거리낌 없이 말하게 하라.“  

 

원래 모용황은 문학을 매우 좋아하여 항상 학교에 가서 강의도 하고 토론하기를 좋아하였다. 왕의 그런 성품에 따라 학생의 숫자가 1천명을 넘으면서 온갖 외람된 사람들의 폐단이 늘어나게 되자 봉유가 그것을 지적한 것이다. 모용황은 이해부터 동진의 연호를 버리고 스스로의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

 

 

(32) 모용황이 부여를 멸망시킴(AD346)

 

부여에는 녹산이라는 땅이 있었는데 대략 현도에서 북쪽으로 천 여리 쯤 된다고 했다. 백제가 쳐들어오자 약한 부여는 전연의 동쪽 국경부근까지 도망갔다. 모용황은 세자 모용준과 1만 7천 군사를 파견하여 부여를 습격했다. 군사를 통솔한 모용각이 부여를 뽑아 버리고 부여왕 부여현을 사로잡았다. 모용황은 부여현에게 진군장군이라는 직을 내리고 자신의 딸을 부여현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33) 전연왕 모용황의 죽음(AD348)

 

전연왕 모용황에 병이 들었다. 나이 51세였으니 한창의 나이였다. 세자 모용준을 불러 이렇게 부탁했다.

 

“ 지금 중원이 아직도 평정되지 못했구나.

  바야흐로 현명하고 걸출한 인물을 밑천으로 

  세상을 경륜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동생 모용각은 지혜와 용기를 모두 갖추었고 

  그 재주 또한 중임을 감당할 만하니 너는 국사를 그에게 위탁하여

  나의 뜻을 완성시켜라.

  또한 양사추(양무)는 선비로서의 품행이 매우 고결하고 

  충성스러운 줄기가 곧고 굳으니 큰일을 그에게 부탁할 수 있을 것이다. “

 

9월 17일 모용황이 죽고 시호를 문명왕이라 했다. 그 큰 아들 스물 아홉 살 모용준이 왕위를 계승했다. 동생 모용교를 좌현왕으로 삼고 양무를 낭중령으로 등용했다.

 

 

(34) 석호의 와병과 혼란(AD349)

 

모용황이 사망한 그 석호는 병이 들었다. 총애하는 아들 석도를 죽인 또 다른 아들 석선에게 잔혹한 형벌을 내리면서 같이 죽인 손자(석선의 어린 아들)이 억울한 울부짖음을 듣고 병이 났다고 자치통감에는 기록되었다. 다음 해 4월 석호의 병이 깊어갔다. 황제 자리에 오른 지 넉 달도 채 되지 않았다. 석호는 팽성왕 석준에게 대장군 직을 주어서 관중의 오른쪽을 방어하게 하고 연왕 석빈을 승상으로 삼아서 상서업무를 총괄하게 했다. 그리고 장시는 진위대장군 및 영군장군 이부상서로 삼아서 석빈과 함께 정사를 나누어 보도록 했다. 태자의 어머니 유후는 석빈이 정치를 보좌하는 것을 꺼려하여 장시를 꾀어서 석빈을 도모하게 하였다. 장시는 사냥으로 양국(하북성 형태)에 가있던 석빈에게 거짓 편지를 보냈다.

 

“ 주상의 병이 이미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사냥을 좀 더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석빈은 정말로 그런 줄 알고 사냥과 음주를 계속했다. 유황후와 장시는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조서를 고쳐서 불충하고 불효한 석빈을 관직에서 몰아내고 귀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는 장시 동생 장의에게 무사 500명으로 석빈의 집을 지키게 하였다.(AD349년4월9일)

 

4월 19일 석준은 유주에서 업성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를 뵐 수가 없었고 다만 금병 3만 명을 배속 받고 임지(관중의 오른 쪽)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의식을 차린 석호가 석준의 도착을 물었는데 이미 떠난 지 한참 뒤였다. 석호를 호위하는 군사들은 연왕 석빈을 근위병사의 책임을 맡게하고 황태자로 삼을 것을 간청했으나 연왕을 불러도 유황후와 장시가 가로막아 들어올 수가 없었다. 석호의 눈이 가물가물해지자 인새를 직접 가지고 연왕에게 주려고 했지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석호의 마음이 석빈에게 있음을 알아챈 유황후와 장시는 다시 조서를 고쳐서 석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장시를 태보⦁도독중외제군사로 삼았다. 최고의 군권이 장시에 쥐어진 것이다. 시중 서통은 절망에 빠져 음독자살하고 말았다.(4월22일) 그 다음날 석호가 55세의 나이로 죽었다. 열 살 태자 석세가 즉위하고 유씨가 유태후가 되어 황제를 대행했다. 장시는 태위 장거와 사공 이농을 죽이려고 모의했는데 장거가 사이가 좋았던 이농에게 미리 그 사실을 알려줬다. 이농은 즉시 식솔을 데리고 도망갔다.

 

 

(35) 석준의 무혈 쿠테타 집권(AD349)

 

팽성왕 석준이 하내에 이르렀을 즈음 아버지가 죽은 소식을 들었다. 요익중과 포홍과 석민이 양독을 정벌하고 돌아오다가 이성(하남성 온현)에서 석준을 만났다. 이들 노장들은 석준이 장자이고 도 무공이 혁혁한데다가 석호가 장차 후사로 생각했었으나 말년에 정신이 혼미해 지고 현혹되어 장시와 유후에게 휘둘렸다고 말하면서 장시를 토벌하는 것이야말로 쉽고도 바른 길이라고 설득했다. 석준도 동의했다. 군사를 돌이켜 이성을 출발해서 업성으로 들어가니 주변의 낙주자사 석준과 유국도 합류했다. 석준의 군사들은 탕음(하남성 탕음현)에 진을 쳤는데 융졸이 9만이었고 석민이 선봉에 섰다. 주변 성읍의 주민들은 물론 업성의 주민들도모두 다 석준에게 부응하여 왔다. 간사한 우복야 장리마저 마지막에는 장시에게 등을 돌리고 성문을 열어 석준의 군사를 영입했다. 다급한 유황후와 장시는 석준에게 있는 직책을 총동원하여 환심을 사려 했다. 승상, 영대사마, 대도고, 독중외제군사 녹상서사가 석준에게 내려진 직책이었고 덧붙여 황월과 구석(황제만 가질 수 있는 물건 아홉 가지) 내렸다.  

  

14일 석준이 업 부근에 도착하자 장시가 몸소 나아가 영접했는데 석준이 그를 잡아 가두었다가 다음날 평락시장에서 목을 베었고 삼족을 멸했다. 유씨(유태후 였다)의 명령을 빌어서 석준이 황위를 이어받도록 했다.(AD349년 4월 16일) 석세를 폐위하여 초왕으로 책봉하고 유씨도 태비로 책봉한 다음 얼마 후 모두 죽였다. 옛 연왕 석빈의 아들 석연을 태자로 삼았으며 석감을 시중 및 태부, 낙평공 석포를 대사마에 임명했다. 일등공신 선봉장 석민에게는 도독내외군사 및 보국대장군이라는 최고의 군사직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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