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1:3대(代)만에 최강국 전연을 무너뜨린 모용위(D)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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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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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모용황과 후조 석호의 공동작전과 단씨의 멸망(AD338)
해가 바뀌자말자 모용황은 조반을 후조에 보내 군사발동의 시기를 물었다. 후조왕 석호는 단료를 치기 위해 이미 3만의 정예병을 모집하여 대비하고 있었다. 단료가 단굴운을 보내 유주(북경)을 습격하자 유주자사 이맹은 뒤로 물러나서 역경(하북성 웅현)을 지켰다. 석호는 도표와 왕화를 각각 횡해장군과 도요장군으로 삼아서 수군 10만 대군을 이끌고 표유진(천진시 동쪽 해안)을 출발하였다. 동시에 요익중과 지웅에게 보기병 7만 명을 주어서 육로로 단요를 정벌하게 하였다.
모용황의 도위 조반이 극성으로 돌아오자 모용황 또한 군사를 이끌고 단료의 영토를 침입하였다. 단료가 화가 나서 모용황에게 대응하려고 하자 모용한(翰)이 말렸다.
“ 지금 후조의 대군이 남쪽에서 밀어닥치고 있습니다.
모용황과 힘을 합해서 싸워도 모를 텐데
정예병을 끌고 오는 연왕과 싸움을 하게 되면
장차 남쪽 대군을 어떻게 막겠습니까?“
단료의 친동생 단란이 화를 내면서 막아섰다.
“ 내가 전에 당신의 말을 잘못 듣고서
오늘의 걱정거리를 만들었는데
이 번에는 속지 않을 것이요.“
단란이 말하는 속임이란 4년 전 AD334년 모용황의 군대를 크게 격파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용한의 만류로 기회를 놓친 것을 말한다<위(14)> 그러나 모용황은 단란을 훨씬 뛰어넘는 지략을 지닌 사람이었다. 병사들을 요지에 매복시켜놓고 단란을 기다리고 있다가 단란의 군대를 대파하여 참수한 자만 수천 급이었고 5천호와 가축 1만 여 마리를 거두어 갔다.
후조의 석호는 계(북경) 근처까지 밀고 들어왔다. 석호의 부장 지웅은 계의 서남쪽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니 단료가 임명했던 지방관들이 모두 항복해 들어왔고 40여 개의 성을 빼앗았다. 북평으로 좌천되어 왔던 양유는 수천 가호를 이끌고 연산 산성으로 들어가 굳게 성문을 닫고 항거했다. 석호의 부장들이 양유를 함락시키자고 했지만 석호는 이렇게 말했다.
“ 그는 절개 높은 선비일 뿐이다.
항복을 수치로 생각하고 죽음까지 포기하면서 저항할 것이니
가만 두어도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을 것이다.“
석호는 양유를 그대로 두고 북진하여 서화(하북성 밀운)에 당도하였다. 단료는 이미 단란이 패한 것을 알고는 전의를 잃고 말았다. 처자와 종족 1천 여 호를 인솔하고 영지(하북성 천안)을 버리고 밀운산 속으로 도망갔다. 석호는 2만 군대를 거느리고 직접 단료를 추격하여 단료의 어머니와 처자를 붙잡고 수천 군사를 참수했다. 단료는 단기로 험지로 도망을 가면서 아들 단걸특진을 후조에게 보내 명마 한 필과 함께 항복의 문서를 올렸다. 단료의 신하들도 모두 나아와 후조에 항복하면서 부고(창고)의 열쇄를 바쳤다. 석호는 노획물을 골고루 나눠주고 재주 있는 선비를 등용하는가 하면 단씨 나라의 2만여 가호를 남쪽의 사주, 옹주, 연주 및 예주에 나누어 이사시켰다.
산속에 웅거하면서 버티던 양유가 군영에 나아와 항복을 표하자 석호가 양유를 나무랐다.
“ 그대는 옛날 오랑캐처럼 산 속으로 도망을 갔는데
이제 선비가 되어 돌아왔으니 어찌 천명을 안다고 하겠는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던가?“
양유가 떳떳하게 대답했다.
“ 저는 옛날 유주자사 왕준을 섬겼는데
왕준이 패하는 바람에(AD314) 단씨에게로 도망 왔었습니다만
단씨 또한 패망하는 바람에 제 목숨이 온전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하늘의 그물을 높이 치시고
사해를 마음대로 주무르시는데
유주와 기주 호걸들 중에서 소식을 듣고 좇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그들과 견주어 부족할 것이 없다고 생각되어
나아온 것일 뿐 제가 죽고 죽지 않고는 제가 관심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폐하가 통제하고 계신 것입니다. “
석호는 양유의 말을 듣고 무척 기뻤다. 그 자리에서 양유가 관리로 있던 북평의 태수로 임명했다.
(17) 석호의 1차 모용황 공격 실패(AD338)
석호는 이번 단료토벌 때 군사를 일으키지는 않고 변경에서 자신의 실리만 챙긴 모용황의 태도에 몹시 분개했다. 석호의 태사령 조람이 석호의 군사행동을 막고 나섰다.
“ 금년 별자리가 흉흉합니다.
군사를 일으키면 반드시 결과가 좋지 않을 것입니다.“
석호는 들고 있던 채찍을 조람에게 내리쳤다. 모용황은 석호의 그런 움직임을 예견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수십만 후조의 대군이 걱정되었다. 모용황의 내사 고후가 모용황을 다독이며 말했다.
“ 저들은 강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염려할 것 까지는 없습니다.
굳게 지키면서 틈을 보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승산이 있습니다.“
석호는 사신들을 사방팔방으로 보내 연합전선을 구축하려했다. 그 주변 여러 성들도 초강대국 후조의 제안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무려 36개성이 석호에게 호응해 왔다.
석호의 수십만 대군은 점차 모용황 전연의 수도 극성에 다가오고 있었다. 모용황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려하자 모여근이 막아서면서 말했다.
“ 조는 강하고 우리는 약하니
대왕께서 도망가는 한 발만 들기만 하면
조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게 되고
조의 병사들이 우리 백성들을 약탈하는 신호가 되는 것입니다.
저들이 계획하는 것이 마로 그것인데
어찌 대왕은 그걸 모르시고
스스로 그들의 계략에 말려들고자 하십니까?
지금 당장 성을 굳게 지키십시오.
그러면 우리 쪽 기세가 백배나 높아질 것이며
그들이 공격해 들어오더라도 쉽게 무너뜨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버티다가 형편의 변화나 기회를 보아 이로움을 찾고
그래도 안 되면 그 때 도망간다 하더라도 늦을 것이 무엇입니까?“
모용황이 마침내 도망가는 것을 그만 두었지만 얼굴빛은 어둡고 두려움이 가득했다. 현도태수 유패가 다시 모용황에게 말했다.
“ 지금 강한 도적이 바깥에 있고 사람들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이 모든 것의 안위를 해결할 한 사람은 대왕 이십니다.
대왕께서는 스스로 강하게 마음을 먹으시고 약함을 보이지 마시고
장군들과 군사들을 격려하셔야 합니다.
제가 작은 힘이나마 보탤 것이니 설사 큰 승리는 아니더라도
군사들의 사기를 안정시킬 수는 있을 것입니다.“
유패는 군사 몇 백 명을 모아 직접 인솔하고 나아가서 후조의 대군과 맞붙었다. 몇 시간의 전투에서 적군과 적장의 목을 여럿 베어 들어오니 성안의 사기는 더없이 충천했다. 모용황이 안심이 되어 봉혁에게 전투의 전략을 물었다. 봉혁이 말했다.
“ 석호는 학정으로 민심을 크게 잃어왔습니다.
백성들과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이 단단히 벼르고 있습니다.
지금 나라를 비워두고 멀리 군사를 몰고 와 있으니
걱정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날짜가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초초해 질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굳게 성문을 닫고 기다리다가 틈이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모여근과 유패와 봉혁의 말을 듣고 나서야 모용황은 안심이 되었다.
“ 천하를 내가 차지할 것인데 어찌
석호 따위에게 내가 항복한단 말이요.“
후조의 군사들이 밤낮으로 성의 사면을 공격해 들어왔지만 모용황의 수비군들은 훌륭히 방어해 냈다. 10여일의 총공세에도 불구하고 성이 함락되지 않자 후조의 대군은 군사를 물려 되돌아갔다. 모용황은 아들 모용각을 보내 퇴각하는 후조의 후미를 습격했다. 후조가 대패하고 목을 잃은 병졸의 숫자가 3만을 넘었다.
석호가 후조의 수도 업으로 되돌아가자 모용황은 자신을 배반하고 석호에게 항복하거나 호응했던 그 지역 여러 성들을 공격했다. 더러는 업으로 달아났고 더러는 고구려로 도망갔다.
(18) 전연의 충신 이홍(AD338)
전연의 우사마 이홍에게는 이보라는 동생이 있었다. 이보는 이번 후조의 공격에서 전연이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군사력으로 보나 나라의 크기로 보나 후조는 전연이 막아내기에는 누가 보더라도 역부족이었다. 이보가 형님에게 같이 도망가자고 권했다. 이홍이 이렇게 말했다.
“ 하늘의 도는 그윽하고 멀어서
사람들이 알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오.
내가 가벼이 전연의 중책을 맡은 것이 아니니
가벼이 움직일 것은 아니요.“
그래도 불안을 느낀 동생 이보가 계속해서 망명하기를 요청하자 이홍이 다시 말했다.
“ 경의 생각이 맞는 것이라면 경은 그렇게 하시오.
나는 조정의 논과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았으니
의리로 보아 갈 수가 없소. 죽는다면 여기서 죽을 것이요.“
동생 이보는 설득이 어렵다고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헤어졌다. 이보는 조에 항복한 뒤 조의 군사를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모용각의 습격 때 길에서 죽었다. 이홍의 명성은 전연 조정에서 높이 드러났다. 단씨가 무너지고 후조가 물러나자 전연 모용황의 영토는 하북 북경지역과 요녕성 전역으로 크게 넓혀졌다.
(19) 밀운산에 숨어있던 단료의 투항(AD338)
밀운산 깊숙이 숨어있던 단료는 사람을 후조에 보내 투항하겠다고 말하면서 적당한 자리를 주어 영접해 달라고 요청했다. 후조 석호는 당연히 그러겠다고 하면서 장군 맞추를 3만 기병과 함께 보냈다. 후조의 영접군이 오고 있는 도중에 단료는 생각을 바꾸어 전연에 투항할 의사를 전했다. 아무래도 석호보다는 종족적으로 더 가까운 모용황에게 항복하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용황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직접 단료를 영접했다. 단료는 모용황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 지금 후조의 대군들이 나를 영접하려고 오고 있소.
저들이 우리를 모르고 있으니 매복 작전으로 저들을 소탕합시다.“
모용황이 좋다고 생각하여 모용락에게 7천 기병을 주어 밀운산 자락에 매복시켰다가 삼장구(밀운산 북쪽자락)에서 마추의 대군을 섬멸했다. 마추는 걸어서 도망쳐 목숨을 건졌고 선우량이라는 장군은 말을 잃고 걷다가 길에서 포로로 잡혔다. 전연의 병사들이 선우량을 조롱하면서 모욕을 주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 내 자신이 귀한 사람이고
의로 보아도 소인배들에게 농락을 당할 처지가 전혀 아니다.
너희들이 죽이려면 당장 죽일 것이고
그렇지 못할 것이라면 빨리 꺼져 버려라.“
선우량의 태도와 기상이 너무 높고 매워서 병사들이 그를 감히 죽이지 못했다. 모용황이 그 소식을 듣고서 직접 선우량에게 말을 주면서 그를 영접했다. 모용황은 선우량의 용기와 학식과 지모의 깊이에 크게 감복하여 그를 좌상시로 삼고서 최비의 딸을 그에게 내려주었다.그리고 모용황은 단료를 상빈으로 대우하면서 단료의 신하들을 모두 얻었다. 그러나 다음해(AD339) 단료는 전연을 배반하기로 모의하였다. 모용황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전연 사람이 단료의 모의를 듣고 단료와 그의 무리 수십 명을 죽이고서 그 머리를 후조에 보냈다.
(20) 석호의 모용황 2차 공격 실패(AD339)
모용황의 휘하에 있던 장수가 단료무리의 목을 가지고 후조로 들어오자 석호는 다시 모용황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무군장군 이농을 사지절, 감요서북평제군사로 삼고 군대를 영지(하북성 천안)에 진수시켰다. 이농은 정북대장군 장거와 더불어 3만 군사를 이끌고 전연의 범성(하북성 편천)을 공격했다. 모용황은 군사 1천을 열관에게 부어 범성을 지키게 했다. 후조의 대군이 몰려오자 범성의 관리들은 다들 도망갈 생각이었다. 열관이 이렇게 외쳤다.
“ 명령을 받고서 도적을 치는 것은
죽음을 각오로 하는 것이다.
성에 의지하고 굳게 지킨다면
한 사람이 백 명을 대적할 수 있는 법이다.
감히 망령된 말을 떠들면서
항복할 생각을 하는 자는 당장 목을 벨 것이다.“
열관이 단호하게 말하자 성내 수비군들이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열관이 스스로 앞장서서 활을 쏘고 적군의 돌을 피하지 않고 분투하자 감동을 받은 군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방어에 나섰다. 열흘이 넘도록 후조의 대군이 이길 수가 없게 되자 퇴각했다. 그리고 성을 이기기 쉽지 않다고 판단하고 성 밖 주민들을 몰아서 남쪽 기주(하북성 중남부)로 옮겼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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