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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1: 3대(代)만에 최강국 전연을 무너뜨린 모용위(C)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8월28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8월17일 14시07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4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11) 모용외의 죽음과 모용황의 세습과 동생의 쿠테타 음모 (AD333)

 

AD333년 5월 6일 무선공 모용외가 죽었다. 세자 모용황이 6월에 평주자사의 직책을 대리했다. 장사 배개를 군자좨주로 삼고 고후를 현도태수로 임명했다. 대방태수 왕탄을 좌장사로 삼았으나 사양하고 요동태수 양무를 추천하자 그를 좌장사로 지명하고 왕탄은 우장사로 등용했다.  

 

모용황은 매우 엄격하고 까다로운 사람이었던 반면 서형 모용한(翰)과 동복동생 모용인과 모용소는 총명하면서도 용기가 있고 또 인자하여 아버지 모용외는 물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당연히 모용황이 시기하고 질투했다. 모용한(翰)은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가족을 이끌고 단씨에게로 도망갔다. 모용인이 아버지 상을 당하여 돌아온 참에 동생 모용소에게 말했다.

 

“ 형님(모용황)이 까다롭고 엄격하시니 장차 우리의 신변이 걱정되오.”

 

모용소가 말했다.

 

“ 우리는 모두 아버지의 적자입니다.

  당연히 일정한 나라의 몫이 있습니다. 

  나는 아직까지 의심받을 일을 한 적이 없으니

  틈을 보다가 일을 일으키면 됩니다.

  형님이 바깥에서 군대를 가지고 오시면 

  나는 안에서 호응하겠습니다.

  성공하는 경우에 저에게 요동을 주십시오.

  남자가 일을 벌여서 이기지 못하면 죽는 것이고

  건위장군(모용한)처럼 이역에서 구걸하는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요.“

    

모용인이 말했다.

 

“ 좋소.”

 

모용인은 임지인 평곽(요녕성 개평현)으로 돌아갔다. 그런 뒤 10월에 모용인은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어떤 사람이 모용인과 모용소가 모의한 것을 밀고를 하니 모용황은 믿을 수가 없어서 사람을 모용인에게 보내 조사하도록 했다. 모용황의 사자가 도착하자 모용인은 계획이 탄로 났다고 판단하고 사자를 죽였으며 즉시 평곽으로 돌아가 점거하면서 수성자세에 돌입했다. 모용황은 모용소에게 자진을 명령하고 고후, 모용유, 모용치, 모용군 모용한 등을 보내 모용인을 토벌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모용인의 수비군사들은 모용황의 토벌군을 격파하여 모용유, 모용치, 모용군이 사로잡히고 모용한과 봉혁은 패잔병을 이끌고 돌아왔다. 이 지역의 모용황의 군사들이 모두 성을 버리고 도망가니 모용인이 요동 땅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단료와 선비족의 여러 부족들이 강퍅한 모용황에 대하여 반기를 들면서 모용인과 서로 연대하고자 하였다. 모용황은 이 때에 비로소 자신의 엄격한 통치에 대하여 반성하고 그 부분을 항상 지적하던 황보진을 평주별가라는 중책에 임명했다.

 

 

(12) 단료의 모용황 공격(AD334)

 

단료가 군사를 보내 도하(요녕성 금주시)를 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다시 동생 단난과 망명온 모용한(翰)을 시켜 유성(요녕성 조양현)을 공격하였으나 모용황의 장군 모여니, 성대, 석종 등이 훌륭하게 방어하였다. 단료가 화가 나서 20여 일 뒤에 더 많은 군사로 유성을 침공했으나 비록 1천여 명 수비대를 격파했지만 성을 함락할 수는 없었다. 모용황은 사마 봉혁과 모용한(汗)에게 구원군을 보내면서 말했다.

 

“ 적들의 기세가 예리하니 저들과 칼날을 겨루지는 말거라.” 

   

모용한((汗)은 성격이 사납고 과단성이 있어서 봉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천 기병을 몰아 선봉으로 나갔다가 단난의 군대를 만나 크게 패하였다. 다행이 봉혁이 곧바로 뒤를 받쳐 주었으므로 모용한이 전멸을 피할 수 있었다. 단난이 승세를 몰아 반격하려고 하자 모용한(翰)이 말리면서 계속 공격한다면 자신은 군사를 물려서 되돌아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단난은 할 수 없이 군사를 되돌려 돌아왔다. 만약 단난이 공격을 계속했다면 모용황과 전연이 태어나지 못했을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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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모용황의 모용인 토벌(AD336)

 

모용황은 좌우 사마를 두고 사마 한교와 군자좨주 봉혁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 그리고 열 여섯 살짜리 모용준(AD319-AD360)을 세자로 삼았다. 이년 전(AD333년) 모용외의 죽음을 동진에 알리기 위해 파견했던 왕제가 건강에 갔다가 바닷길로 돌아오던 도중에 모용인이 장악하고 있던 평곽 부근에서 억류되었다. 모용인은 스스로 평주자사 요동공이라고 주장했으므로 동진 조정에서 준 공식적인 평주자사 임명장을 들고 오는 왕제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모용인은 왕제를 풀어 주면서 건강으로 되돌려 보냈는데 왕제 등은 몰래 바닷길로 금주로 들어가려다가 해풍을 만나 들어가지 못했다. 동진 조정의 사신 서맹이 극성에 도착하여 모용황에게 내린 여러 직책을 다시 수령하자 모용황은 동진조정에 충성을 바치기로 다짐했다.        

금주 북쪽 유성(요녕성 조양)에 있는 우문씨와 하북성 천안에 있는 단씨가 몰래 사신들을 보내 모용인과 내통하려고 하자 모용황은 수 백기의 기병을 보내 우문씨의 사신을 모두 죽이고 단씨 사신은 사로잡아 돌아왔다.(AD335) 모용황은 주변 세력들과 연대하여 포위하려는 모용인 세력을 그냥 둘 수가 없었다. 사마 고후가 거들며 나섰다.

 

“ 모용인은 주군과 친척을 배반하고 버렸으니

  백성들과 하늘이 함께 화가 났습니다. 

  전에는 도대체 얼지 않던 바다가 

  모용인이 반란을 일으킨 이후 최근에는 

  세 번이나 언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용인은 육로만 신경을 쓸 뿐 바다를 방비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해로로 침략하라는 교시를 내려 준 것입니다.“

 

모용황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해로로 내려와 평곽의 모용인을 습격했다. 모용황은 동생 모용평을 대동하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얼음 위를 걸어서 300여리를 내려간 다음 역림구(요하 입구)에서 치중을 버리고 육로로 강가를 거슬러 평곽까지 올라갔다. 모용인은 모용황이 

 

직접 출정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1월이라 날씨도 몹시 추웠지만 모용황의 병력 자체가 대수롭지 않다고 폄하했었다. 모용인은 전군을 성벽에 모아놓고서 외쳤다.

 

“ 적군의 말 한필도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라.”

 

문제는 안에서 일어났다. 모용인 휘하의 모용군이 자신의 부하를 이끌고 모용황에게 항복한 것이다. 모용인의 군대는 크게 흔들렸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모용황의 대군이 들이닥쳐 모용인 군대를 대파하였다. 모용인은 도망가다가 배반한 부하에게 붙잡혔 모용황에게 끌려왔다. 모용황은 먼저 배반한 모용인의 부하의 목부터 내려쳤다. 그런 다음에 모용인에게 사형을 내렸다. 모용인의 부하들은 동쪽 고구려로 도망갔다. 모용황 군사들이 추격하여 적해와 방감은 잡아 죽였지만 동수와 곽충은 무사히 고구려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 해 6월 단료가 중군장군 이영과 군대를 보내 모용황을 습격했다. 모용황의 장수 장맹이 이영을 사로잡았다. 단료는 다시 단란에게 수 만 명의 대군을 붙여서 유성의 서쪽 강가에 주둔시키고 우문씨와 힘을 합해 모용황을 칠 준비를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모용황은 기다리지도 않고 보기병 5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유성을 향해 진격했다. 모용황의 5만 대군이 쳐들어온다고 하자 단란은 싸움을 포기하고 혼비백산 도망쳐 버렸다. 움씨의 군사들도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 버렸다. 모용황이 군사들에게 말했다.

 

“ 저들이 공을 세우지도 못하고 도망갔으니 

  반드시 다시 쳐들어 올 것이다.

  마땅히 유성 주변에 매복하고 기다렸다가 저들이 올 때를 기다려라.“

 

봉혁과 수 천 기병을 풀어서 마두산(요녕성 조양부근의산)에 매복시켰다. 몇 개월 뒤에 단요의 군사들이 쳐들어 왔지만 매복한 모용황 군사에게 전멸 당하였다.  

 


(14) 단료의 충신 양유의 권고(AD337)

 

단료의 영토와 모용황의 영토는 서로 겹치기 때문에 두 군사들 간의 크고 작은 충돌은 끊이질 않았다. 단료가 보낸 습격부대는 대부분 모용황의 장수들에게 격파되었다. 단질육권 때부터 5대(단질육권-단섭복진-단말재-단아-단료)를 거쳐 충성을 바쳐왔던 양유가 단료에게 말했다.

 

“ 어진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이웃과 화목한 것은 

  나라의 보배입니다.

  모용씨와는 대대로 혼인을 하였고

  바꾸어가면서 외삼촌과 조카가 되었습니다.

  모용황은 특히 재주와 덕망이 높아서 

  백성들의 지지가 매우 높은데 

  우리는 그들과 원수를 맺고서 허구한 날 

  전쟁으로 쉴 틈이 없으니

  백성들이 마르고 피폐하여 이익도 없이 해만 입고 있습니다.

  신은 사직의 걱정거리가 이로부터 생길까 염려됩니다.

  바라건대 피차간에 잘못한 것을 잘 더듬어 보신 뒤

  처음과 같이 서로 소통하고 연락하여 잘 지내시어서  

  나라를 편안케 하시고 백성들을 쉬게 하십시오.“

 

단료는 그의 권고를 따르지 않고 지방관으로 내보내버렸다. 

 

 

(15) 모용황의 전연 건국(AD337)

 

AD337년 9월 진군장군부의 좌장사 봉혁과 여러 막료들이 모용황에게 연왕의 칭호를 사용하기를 권했다. 모용황은 부하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연왕에 오르기로 하고 봉혁을 국상, 한수를 사마, 배개를 봉상, 양무를 사예로 임명했다. 모용황은 다음 달 10월에 연왕에 즉위하고 위나라 조조와 진나라 사마염이 한 예에 따라서 예식을 올림과동시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부인 단씨를 왕후로 삼고 아들 모용준을 왕태자라 불렀다. 

 

단료의 군대들이 끊임없이 조의 영토를 침략하자 모용황은 양렬장군 송회를 후조에 보내 스스로를 낮추어 후조의 번속이라고 칭하면서 동생 모용한을 인질로 보내고 동시에 단요를 토벌하겠으니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후조 석호는 크게 기뻐하면서 인질을 받지 않고 돌려보내면서 후하게 위로하고 답례를 보냈다. 그리고 비밀리에 내년에 연합작전을 펼 것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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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20년08월17일 14시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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