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1: 3대(代)만에 최강국 전연을 무너뜨린 모용위(B)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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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서,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7) 모용외가 동진에 사신을 보내 승전을 보고(AD320)
최비와 우문씨와 단씨의 연합군을 대파한 모용외는 주부 송해의 권고를 받아들여서 승전소식을 건강의 동진 황제에게 보고하기로 하여 송해가 쓴 표문을 가지고 배억을 건강에 보냈다. AD320년 3월 건강에 도착한 배억은 승전을 바침과 동시에 모용외의 위엄과 총명함과 어진 것을 대단히 칭찬하였으며 그로 인해 온 천하 인재가 그에게 몰린다고 말하였다. 사마예는 모용외는 물론 배억의 인물됨을 인상 깊게 여기고 중시하기 시작했다.
” 경은 중조의 뛰어난 신하이니
마땅히 강동에 머물면서 나를 보필하시오.
용양장군에게는 별도로 지시를 내려 온 가족을 이리로 모시게 할 것이요.“
배억이 이렇게 말했다.
” 신이 젊어서 나라(서진을 말함)의 은혜를 입었고 궁정을 출입했으니
다시 황제를 모시게 되면 그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옛날의 도읍(장안과 낙양)이 망해버렸고
황제의 능묘들은 뚫리고 황폐해 졌는데
비록 뛰어난 신하와 장수라 하더라도 이 치욕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용양장군만이 황실에 충성하였고 속으로 흉악한 적들을 소탕할 생각으로
가득 차있으니 소신을 보내어 소식을 정성껏 보고 드리게 한 것입니다.
지금 신이 왔다가 다시 돌아가지 않으면
용양장군부 조정에서는 반드시 이족을 버리고 화족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것인즉
이는 의로운 사람이 의로운 일을 하는 마음을
외롭게 하여 도적을 토벌하는 일을 게을리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것이 제가 사사로운 것을 좇지 않으며 공적인 것을 잊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사마예가 감탄하며 말했다.
”그대 말이 지극히 옳다.”
사자를 배억과 함께 보내 모용외에게 안북장군, 평주자사의 벼슬을 내렸다.(AD320)
(8) 모용외가 거기장군이 되다(AD321)
AD321년 12월 동진 조정은 모용외에게 도독유평이주제군사, 거기장군 및 평주목의 직을 내리고 요동공의 작위를 하사했다. 모용외는 예에 따라 배억과 유수를 장사로 임명하고 배개는 사마, 한수는 별가로 등용했다. 양탐은 군사좨주, 최도는 주부 그리고 황홍을 참군사로 임명했다. 그리고 아들 모용황을 세자로 세웠는데 모용황은 당시 24세로써 체구가 크고 강하였으며 권모와 지략을 많이 갖추었으므로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모용외는 또 다른 아들 모용한을 옮겨서 요동에 진수시켰고 모용인은 평곽(요녕성 개평)에 주둔시켰다. 이들 모두 똑똑하고 부지런했으며 위엄도 있고 현명했으므로 그 지방 이민족을 잘 다스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9) 후조 석륵의 모용외 공격과 모요외의 성공적 방어(AD325)
후조의 석륵은 모용외의 명성을 이미 듣고 있었으므로 그를 포섭하기 위하여 사자를 보내 우호관계를 맺자고 제안하였다, 모용외는 그 사자를 잡아서 건강으로 보내버렸다.(AD323) 당시 석륵은 하북지역의 최강자로써 도읍 양국(하북성 형태)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내몽고로부터 남쪽으로는 장강 중류까지 아우르는 초강대국이었다. 이런 초강대국의 우호제안을 거부한 모용외를 석륵이 가만 둘 이유는 없었다. 석륵은 우문걸득귀에게 사신을 보내어 관작을 높여주고서 모용외를 치도록 권유했다.
모용외 또한 석륵의 제안을 거부하고서 그냥 앉아 있지만은 않았다. 세자 모용황과 색두 단국 등을 파견하여 반격하도록 지시했는데 우익은 배억에게, 좌익은 모용인에게 맡겼다. 우문씨는 요수(내몽고 서납목륜하)를 점거하고서 모용황을 막았고 우문실발웅은 모용인을 방어했다. 모용인의 군대는 우문실발웅의 군대를 쉽게 깨뜨리고 그의 목을 잘랐으며 곧바로 모용황 군대와 합류하여 우문걸득귀를 토멸하였다.
(10) 석륵의 황제등극과 모용외의 토벌제의(AD331)
사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후조의 석륵은 석호가 요동지역을 장악한 데에 이어 AD325년 호뢰관 전투에서 유요의 전조대군을 크게 격파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후조의 석총이 동진의 예주(안휘성 수춘)를 격파하였다. 이제 석륵의 후조는 황하가 이북은 물론 회하를 넘어 장강지역까지 넘보는 광활한 영역을 지배하는 강대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동진 조정은 왕돈의 전횡과 황제 사마예의 사망(AD323)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태자 사마소가 사공 왕도의 지지를 받고 황위에 올라 충신 치감의 도움을 받아 왕돈의 정권농단을 저지하려 했으나 정치혼란은 왕돈이 왕도-온교-치감의 토벌될 때(AD324) 까지 이어졌다. 이 후 명제 사마소가 AD326년 갑자기 사망하고 다섯 살짜리 태자 사마연을 대신하여 유태후가 섭정을 하면서 소준과 조약의 반란이 일어났고 동진 조정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모용외는 동진의 태위도간에게 쪽지를 보내 팽창하고 있는 석륵을 함께 저지할 계획을 세웠다. 모용외의 측근 송해가 이렇게 말했다.
“ 아무리 전공을 세웠다 하더라도
공의 신분은 모퉁이 지역의 수장에 불과하니
북벌을 하더라도 화족과 이족을 아울러 지휘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따로 표문을 올려서 먼저 공의 관작을 높여야 합니다.“
참군 한항이 반박하면 말했다.
“ 무릇 공로를 세우는 것은 믿음과의로움으로 하는 것이지
명성과 지위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환공과 진 문공은 먼저 광복(匡復)의 정의를 구했지
예명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의당 갑옷과 무기를 수선하여 흉악한 무리를 먼저 제거하면
구석은 저절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모용외는 한항의 말이 달갑지 않았다. 그를 외직으로 내치고 말았다. 그리고 동이교위 봉추 등을 시켜 도간에게 편지를 보내 모용위에게 연왕에 책봉하고 대장군의 칭호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도간이 회답을 보내왔다.
“ 무릇 공로를 올리면 작위가 올라가는 것은 옛날부터 있던 제도요.
거기장군(모용위를 이름)께서 비록 조정을 위하여 석륵을 꺾기는 부족하지만
그러나 충성심과 의로움을 다하고 있으니
내 지금 쪽지를 올려 조정에 요청하겠소.
다만 빨리 되고 안 되고는 황제의 결정에 있다고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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