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1 : 3대(代)만에 최강국 전연을 무너뜨린 모용위(A)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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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1) 선비족의 나라들과 모용씨
선비족은 고대로부터 지금의 중앙아시아 북부 지역과 몽고와 내몽고 등지에 살았던 유목민족이었다. BC 3세기경 강력한 유목민족이었던 흉노족에 의해 선비족이 복속된 이래로 흉노족에 충성을 받쳤으며 흉노족이 한나라에 의해 정복된 이후부터는 한족에게도 충성을 받쳐 왔었다.
AD 87년 흉노족의 족장 우류를 제거한 뒤부터 선비족은 흉노족으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했지만 정치적 조직력이 매우 약한 탓에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중국의 여러 지역을 유랑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였고 다만 중앙정권에 의해 위성국가의 지위를 내려 받아 명맥을 유지할 수는 있었다. 당시 대표적인 선비족 집단은 북위를 세운 탁발씨와 전연을 세운 모용씨였고 조금 지나서 서진을 세운 걸복씨와 남량을 세운 독발씨가 다 선비족 국가들이다.
이 중에서 모용씨가 세운 전연은 요동반도 주변 지역을 기반으로 나라를 키워갔으므로 고구려와 오랫동안 국경 전쟁을 피할 수가 없었다. AD 342년에는 고구려 수도 환도를 침공하여 5만 명 이상을 납치해 갔으며 광개토대왕의 조부인 고국원왕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다 주었고 AD346년에는 부여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부여 국민들이 한반도 남쪽으로 대이동하게 하기도 하였다.
(2) 전연과 후연의 시조 모용섭귀(AD317)
모용씨의 시조인 모용섭귀는 아들 모용외의 서형 모용토욕혼에게 1700호를 나누어 주었다. 모용섭귀가 죽으면서 왕위를 모용외가 잇게 되자 모용토욕혼과 모용외의 부락민들 사이에 목초지를 가지고 다투게 되었는데 모용외(AD269-AD333)가 모용토욕혼에게 사자를 보내 꾸짖으며 말했다.
“ 돌아가신 선조께서 목초지를 분명하게 나누어 주셨는데
어찌하여 목초지를 가지고 다투며 말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까? ”
모용토욕혼이 화가 나서 말했다.
“ 말은 가축이라서 당연히 서로 싸우기 마련인데 그걸 가지고
형제와 사람들이 다투다니 어쩌자는 심산이냐.
멀리 떨어져 나가라고 하신다면 당연히 그리 하겠지만
다시 만나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장 무리를 끌고 만 리 바깥으로 옮겨 가겠다.”
모용토욕혼은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해갔다. 동생 모용외가 이를 후회하고 곧바로 사람을 보내 그에게 사과했다. 모용토욕혼이 이렇게 말했다.
“ 선친께서 일찍이 점쟁이 말을 가지고 말씀하시기를
‘내 두 아들이 모구 강성해져서 복이 후세로 이어질 것이라’고 하셨다.
어차피 나는 서자이니 이곳에서는 클 수가 없을 것이므로
지금이야말로 내 앞길을 내가 닦는 하늘의 뜻이라고 본다.”
모용토욕혼은 무리를 몰아 서쪽으로 향해 내몽고 자치구 음산지역에 뿌리를 내렸다. 흉노족유연이 서진에 반발하여 일어난 영가(AD307-AD312)의 난 때에는 남쪽으로 내려가 농산을 지나 백난(청해선 서남쪽)지역으로 옮겨갔다. 형이 떠나자 동생 모용외는 이를 슬퍼하며 형을 위한 노래(아간, 즉 형의 노래)를 지업 불렀다. AD317년 모용토욕혼이 죽었는데 그에게는 아들이 60여 명 있었는데 그 중에 장자 모용토연은 가장 용기가 많고 지략이 깊어서 토욕혼이라는 나라를 세우는 기초가 되었다.
(3) 서진 멸망과 사마예의 동진 건국(AD317)
AD317년 서진 황제 민제 사마업이 한조(=전조)의 유총에게 피살되면서 서진이 완전히 멸망하게 되자 당시 건강에 있던 사마예는 충격에 빠졌다. 상복을 입고 상례를 치르는 동안 조정 대신들은 끊임없이 사마예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간청했다. 군사좨주 기첨이 나아가 이렇게 진언했다.
“ 서진 황실의 대통이 끊어진 지 두 해가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당연히 대업을 이으셔야 합니다.
종실에 다른 사람을 돌아보신 들 누가 있습니까?
만약에 대위를 빛나게 밟으신다면 우리 신들과 백성들은 의지할 곳을 갖게 되는 것이고
만약에 하늘이 주신 기회를 어기고 버리신다면 대세가 한 번 지나고 나서야 어찌 쉽게 되 돌아오겠습니까?
지금 두 도읍 낙양과 장안은 모두 불타서 없어지고 종묘에서는
신주조차 모시지 못하는데 유총은 황제의 자리를 훔치고
날뛰는 데도 불구하고 폐하께서는 남쪽에 웅크리고 앉아서 양보만 하고 계시니
이를 읍하고 사양하면서 불을 끈다(揖讓救火)고 하는 것입니다.”
기첨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사마예는 허락하지 않고 전중장군 한적에게 황제 의자를 없애라고 지시했다. 한적이 의자를 치우려고 하자 기첨이 한적을 크게 나무랐다.
“ 황제의 자리는 하늘 별자리를 본 따 만든 것이다.
함부로 치우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사마예는 얼굴빛을 고쳤다.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결심을 굳힌 것이다. 그런데 이때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 봉조청의 주숭이 말리는 상소문을 올렸다.
“ 옛 고사를 보면 왕들은 의로움을 온전히 한 다음에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양보를 할 만큼 하고 나서 자리에 올랐으니
그 까닭에 만 년 동안 황실을 유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재궁도 아직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옛날 도읍지는 깨끗이 정리되지도 못했습니다.
의당 널리 훌륭한 인재를 구하시고
군사를 강건하게 하여 나라의 치욕을 깨끗이 씻은 다음에
사해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신다면
신기(황제의 자리)가 어디 가겠습니까?
불쾌해진 사마예는 주숭을 바깥으로 내쳤다. 사마예는 3월 10일 황제의 자리에 나가 동진을 건국하였다.(AD317)
(4) 단말배의 쿠테타(AD318)
단씨 세력은 모용외와 같은 선비족으로 북경 동쪽, 지금의 요녕성 서쪽과 산동성 북부 지역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서진 때 요서공 단질육권이 죽었는데 아들이 너무 어려서 단질육권의 동생 단섭복진이 실질적인 권력을 계승하였다. 단질육권의 또 다른 동생 단필제가 형의 죽음에 대해 문상하려 달려오자 단필제의 사촌 형인 단말배는 단필제가 오는 것이 권력을 찬탈하려고 오는 것이라면서 실권자 단섭복진에게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섭복진이 그 말을 듣고 군대를 보내 단필제를 막으러 나갈 때 단말배는 안에서 군사를 일으켜 단섭복진의 무리를 죽이고 권력을 장악했다. 단말배가 단필제를 막아서 못 들어게 하자 단필제는 계성(지금의 북경)으로 되돌아갔다.(AD318)
단필제가 형님 문상을 갔을 때 단필제에게 의탁하여 계성에 피신 와 있던 전 유주자사 유곤은 아들 유군을 단필제에게 보내 호송하게 했는데 도중에 단말배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단말배는 유군을 후하게 예의를 갖추어 대접했다. 속내는 유군의 아버지 유곤과 함께 손을 잡고서 단필제를 제거할 생각이었다. 몰래 사람을 유곤에게 보내 유군의 편지라는 것을 보냈으나 그 사자가 도중에 단필제의 순시병에게 잡히면서 단필제가 그 계획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유곤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단필제가 유곤에게 다가가서 그 편지를 보여 주었다. 유곤이 말했다.
“ 공과 더불어 동맹을 맺어 국가의 수치를 깨끗이 씻기를 바랐는데
만약 우리 아이의 편지가 비밀리에 내게 왔다고 하더라도
아들 때문에 내가 공과 맺은 결의를 버리고 옳은 일에 배반하지는 않을 것이오.“
단필제는 유곤을 깊이 믿었으므로 그의 진의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필제의 동생 단숙군이 그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 우리는 호인일 뿐입니다.
우리가 진나라 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리가 많아서
저들이 겁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골육간에 분쟁이 일어나 세력이 갈라지고 있으니
그들이 획책하기 딱 좋은 환경입니다.
만약 어떤 인간이 유곤을 받들어 세워 일어나면
우리 종족은 순식간에 멸절되고 말 것 입니다.“
단필제는 유곤을 죽이지는 않고 억류해 두었다. 유곤의 서장자 유준이 겁에 질려 반항했으나 단필제가 쉽게 토벌해버렸다. 또 다른 유곤의 무리들이 반란을 획책하다가 실패하자 결국 단필제는 진 조정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유곤과 그의 아들과 조카를 모두 죽여버렸다. 유곤의 부하 장수 몇몇은 화를 피해 동쪽의 요서(요녕성 의현) 단말배에게로 달아나 억류되어있던 유군을 주군으로 모셨다. 자칭 유주자사 단말배는 군사를 보내 단필제를 공격했고 단필제는 남쪽으로 달아나려 했으나 석륵의 부대가 막아서자 다시 계성으로 돌아가 수비에 충실했다.(AD318)
(5) 동진 사마예가 모용외에게 용양장군 부여(AD318)
모용외는 도하(지금의 요녕성 금주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원래 총명하고 인재를 중시하면서 정치에도 밝았다. 그런 그에게 많은 모사와 재주꾼 인재들이 있었는데 배억, 양탐, 황홍, 노창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대개 서진 조정의 관료들이었으나 AD313-314년경 후조의석륵이 서진 조정의 유주자사 왕준이 장악하고 있던 유주(북경지역)를 침공하면서 난을 피해 동쪽에 있던 모용외에게 의탁한 사람들이다. 배억은 원래 서진 조정에서 창여현의 태수였는데 청렴하고 방정하였으며 재간과 지략이 매우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서현 태수 양탐 또한 정직하고 청렴하였으며 침착하면서도 민첩하였다고 했다.
석륵이 북경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동안 그 지역의 서진 장수들 중에서 유곤과 단씨 형제 즉, 단질육권과 사촌 동생 단말배는 서로 동맹의 결의를 맺고서 서진 조정에 충성을 바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사신을 건강에 보내 사마예에게 황위에 오르기를 간청했다. 모용외 또한 노창과 고후의 권고를 받아들여서 사신 왕제를 건강에 파견하여 황제의 자리에 나아가기를 앙청했다.
황위에 오른 사마예는 즉시 모용외에게 용양장군 및 창여공이라는 작위를 내렸는데 모용외는 용양장군직은 받았으나 창여공 작위는 받지 않았다. 겸손해서가 아니라 작위가 너무 낮아서였을 것이다. 모용외는 용양장군부를 꾸린 다음 유수라는 장수를 장사, 즉 최고책임자로 삼고 유상을 주부로 임명했다. 그리고 유수에게 용양장군부의 모든 의례절차와 규칙과 법도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이 때 모용외의 최측근 배억이 이렇게 말했다.
” 진 황실이 허물어져 영역이 오직 강표(장강의 건강 부근)에만 국한되어있고
전국은 여러 도적들에게 유린 되고 있습니다.
이를 점차 합병하는 것은 오직 공에게 달려 있습니다.
세력을 확장하십시오.“
모용외가 말했다.
” 그대의 뜻은 크지만 내 힘이 못 미칠 것 같소.
그러나 그대는 중원의 조정에서 큰 덕과 지략을 가지고 이름을 떨친 사람이니
이는 하늘이 그대를 우리에게 보내주어서 우리를 돕게 하려는 것이요.
부디 나를 어리석고 편벽하다고 하지 마시고 깊이 가르쳐 주시오.“
모용외는 마침내 배억을 장사로 임명하고 모든 전략과 국사를 함께 모의하면서 주변 지역을 합병해 나갔다.
(6) 평주자사 최비의 모용외 공격(AD319)
서진 조정의 평주(요녕성과 한반도 북부)자사 최비는 스스로 위엄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지역 사람들은 모용외를 더 중시하였다. 화가 난 최비는 자주 그 지역 관리들을 소환했으나 소환에 응하지 않자 모용외가 뒤에서 배후를 조종한다고 여겼다. 최비는 고구려 고씨 세력과 북경지역을 장악했던 단씨 세력과 요녕성 조양지역을 장악한 우문씨 세력을 규합하여 모용외를 공격하자고 계획하고 성공하면 지역을 삼분해서 나누자고 제안했다. 최비의측근 고첨이 계획의 무리함을 들어 반대했으나 최비는 듣지 않았다.
삼국이 연합하여 공격해 들어오자 제장들은 반격에 나서자고 졸랐다. 모용외가 말했다.
” 저들은 모두 이익에만 눈이 멀어있다.
지금은 칼끝이 매우 예리할 것이므로 나설 것이 아니다.
지키고 있으면 저들은 서로 의견이 틀어지면서 초조해지고 반목하면서
두 가지 의심을 할 것이다.
첫째로는 내가 최비와 짜고 친다고 의심할 것이고
다는 하나는 서로를 의심할 것이다.
저들이 서로 의심하면서 분열될 때를 기다렸다가 공격하면
격파가 확실할 것이다.“
삼국 연합 세력이 극성(요녕성 금주 북쪽)을 공격하자 모용외는 성문을 굳게 닫고 방어에 몰두했다. 그리고 우문씨에게는 위로한다는 뜻으로 고기와 술을 보냈다. 단씨와 최비 쪽에서는 우문씨를 의심하기 시작하고는 군사를 뒤로 물려 돌아갔다. 우문씨 군사들은 연대가 깨어졌지만 수십 만 대군으로 모용외를 격파할 수 있다고 여기고 퇴각하지 않았다.
모용외는 사람을 보내 수도 도하에 있던 아들 모용한을 전장으로 불렀다. 원군을 요청한 셈이다. 모용한은 사람을 보내 아버지 모용외에게 이렇게 말했다.
” 우문씨 군사들은 온 나라를 기울여 침공해 들어왔으니 대군이고 우리가
감당하기 버겁습니다.
계책으로 이기는 것은 몰라도 힘으로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성안에 있는 무리로도 충분히 버틸 수 있습니다.
제가 기습병이 되어서 바깥에서 습격할 때 안에서도 호응하여 양쪽으로 공격하면
저들도 놀라서 어쩔 줄 모르게 됩니다.
만약 제 병사와 성 안의 병사를 합하게 되면 저들은
오로지 성을 공격하기 위헤 총력을 기울일 것이니
이런 계책은 별로 좋은 계책이 아닌 듯합니다.
또 군대의 숫자가 적어서 도움을 청하는 모습은
군사들에게 사기를 떨어뜨릴 염려도 깊습니다.“
그래도 모용외는 의심스러웠다. 요동사람 한수가 이렇게 말했다.
” 우문씨 총두목 우문독실관은 교만하고 건방집니다.
졸병들은 게으르고 겁이 많습니다.
군사조직도 단단치 못합니다.
만약 기습의 움직임이라도 보이면 저들은 혼비백산 흩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드디어 모용외가 결심하고서 아들을 부르지 않았다. 우문독실관은 그 소식을 듣고서 군사를 나누어 도하의 모용한을 먼저 공격하기로 했다. 모용한은 우문독실관의 군대가 쳐들어온다고 하자 거짓으로 사람을 보내어 단씨의 사자 행세를 하면서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 우리 단씨들도 모용한이 걱정거리였는데 이렇게 친히 공격하러 오시니
반갑고 고맙기 짝이 없습니다.
어서 저희 준비된 군사와 더불어 진격하시지요.“
모용한은 사자를 보내고 나서 즉시 군사를 매복시켜 우문씨 군대를 기다렸다. 우문씨의 군대는 위장한 단씨의 기병이 마중 나오자 기뻐 어쩔 줄을 몰랐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안내를 받아 모용한이 매복해 있는 곳으로 군사를 몰아 나갔다. 모용한은 한편으로 우문씨 군사를 습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급히 사자를 아버지에게 보내 공격을 개시하도록 재촉했다. 우문씨의 군대는 양쪽에 대패했고 우문독실관만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갔다.
우문씨의 군대가 참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최비는 조카 최도를 보내 승전을 축하하는 척했다. 그러나 우문씨와 단씨의 사자가 들어와서 처음부터 최비의 계략이었다고 실토를 하자 최도 또한 속일 수가 없었다. 모용외는 최도를 시켜 최비에게 통첩을 보냈다.
”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고
달아나는 것은 하책이다.“
최비는 수십 기 기병을 이끌고 고구려로 도망갔고 나머지 군대들은 모두 모용외에게 투항했다. (다음에 계속)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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