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U)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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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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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원각의 친정선언(AD501)
함양왕 원희는 황제 원각의 숙부이면서 모든 신하의 가장 으뜸이었다. 그러나 교만하고 사치하면서 탐욕 음란하여 주군이 매우 꺼려하고 있었다. 원희가 노복을 영군장군 우열에게 보내어 황제만이 쓸 수 있는 경호병 즉, 우림군과 호분군을 요구하였다. 우열이 어렵다고 반대하자 우열을 항주(대동시) 자사로 전보시켰다. 우열의 아들 우충이 황제의 시위장군으로 항상 황제의 좌우에 있었는데 아들에게 원희의 모든 비리를 황제께 고해바치도록 했다. 황제 또한 그 사실을 짐작하였으므로 우열에게 내일 조정에 들어오도록 시켰다.
다음날 우열이 조정에 입조하자 황제가 우열에게 직접 명령을 내렸다. 근위병 60명을 데리고 가서 원희, 원협 및 원상 세 숙부를 조정으로 호위하여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세 숙부가 들어오자 황제는 모든 정무와 백관을 직접 다스릴 것이니 여러 숙부들은 원하시는 대로 돌아가 계시면 추후 처분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협은 본인이 원하는 대로 은퇴를 허락했고 원희는 명분상의 직책만을 주었으며 원상에게는 실권 있는 대장군을 주었으나 여기에는 나중에 꼬투리를 잡고 몰아내려는 계략이 숨어있었다. 원로 종친을 다 몰아낸 원각은 총신 측근 여섯 명, 즉 여호, 왕중흥, 구맹, 조수, 조옹 및 고조를 중심으로 국정을 장악하기 시작했다.(AD501년 1월)
<105> 원희의 반란(AD501)
중신들을 다 몰아내고 마음이 맞는 총애하는 측근들을 중심으로 정치를 펴면서 대신들은 점차 황제를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영태위 원희에게 그 사실을 고해바치자 황제의 측근들이 원희를 주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희도 그런 소문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처남 급사황문시랑 이백상, 저왕 양집시 등과 함께 때를 기다렸다. 황제가 사냥을 나가자 측근 걸복마거가 원희에게 말했다.
” 지금 바로 낙성으로 들어가셔서 성문을 닫으십시오.
황제는 반드시 평성으로 도망갈 것입니다.
황하의 다리를 끊어 놓으면 반드시 천자가 되십니다.“
원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밤이 늦어 반란 모의자들이 흩어지자 그중에 양집시가 곧바로 황제의 사냥터로 달려가 모반 사실을 고해바쳤다. 때는 아침이라 주변 사람들이 나가서 사냥감을 몰고 있었던 때였으므로 황제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위하던 우충이 황제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 저의 아버님께서 만반의 준비를 잘하고 계셨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런 일이 벌어진 줄 모르는 원희는 밤새 희첩들과 어울려 놀면서 유소구에게 반란 선언문을 곳곳에 알리면서 응원군을 모으는 작업을 시켰다. 유소구가 황제의 사냥터 부근에서 군대에게 들키게 되자 급히 말을 바꾸어 반란을 보고하러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원희의 주변에서는 반란소식이 새어 나갔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태연하게 놀고만 있느냐고 비판했지만 원희는 걱정하지 않고 태연하게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우열은 호분(황제 경비군) 300명을 보내 원희를 사로잡아오도록 지시했다. 원희가 도망갔지만 얼마가지 못하고 잡혔다. 그에게는 자진 명령이 떨어졌고 나머지 주동자 10여명이 주살되었고 그의 재산은 대부분 측근인 고조와 조수에게 돌아갔다. 하내태수 육수는 그곳에 와있던 원희의 아들 원통의 목을 베어 조정으로 보냈다.
<106> 충신 우충의 배척(AD501)
AD501년 11월 북해왕 원상이 태부가 되고 동시에 사도직을 겸하였다. 원상이 직위가 높아지자 그의 심복 왕우가 사사로이 정부의 물품을 그에게 주었다. 사도부의 장사 우충이 왕우를 심하게 꾸짖었다.
” 전하는 나라의 주공이며 왕실의 아형(황제가 의지하는 중신)이신데
필요하신 물건이 있으면
당연히 황제께 요구하여 쉽게 얻으실 수가 있소.
어찌 아첨하여 권세에 기대어 사사로운 용도로
공적인 물건을 함부로 쓴단 말이오.“
왕우도 부끄러웠고 원상도 사죄하였다. 매 사건마다 우충이 화나게 하였으므로 원상이 이렇게 소리쳤다.
” 내가 걱정하는 것은 내 앞에서 너의 죽는 것을 보는 것이고,
내가 걱정하지 않는 것은 네가 내 죽는 것을 보는 것이다.“
우충이 불쾌한 듯 대꾸했다.
” 사람이 잘고 죽는 것은 정해진 분수가 있는 법입니다.
만약 마땅히 왕의 손에 죽어야 한다면 피한 들 피할 수가 없는 법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왕은 죽이려고 하셔도 저를 죽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원상은 우충이 산기상시로 승진되는 직을 (형식적으로나마) 사양할 때를 틈타서 황제에게 사양을 수용하고 대신 명예직을 주어 황제 곁에서 멀어지도록 설득했다.
<107> 북위의 남침(AD501)
당시 제나라 조정은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란 수습에도 정신이 없었지만 안으로 강력한 실권자인 옹주자사 소연과 그의 형 상서령 소의에 대해 매우 깊은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소의의 주변에서는 상서령 소의에게 반란을 일으키라고 주문했지만 듣지 않았다. 황제의 간신측근 여법진과 왕훤지 등이 소의의 위엄을 겁내어 황제를 꼬드겨 죽음을 내리도록 했다.
소의가 죽자 소연은 장홍책, 여승진 등 여러 측근들을 불러 모아 계획을 확정했다. 군주의 포학함이 주왕을 능가함으로 여러 사람들과 함께 몰아내자는 것이었다. 주군으로는 황제 소보권의 동생 소보륭을 세웠다. 소보권은 건강성을 지키다가 성 안에서 환관 황태평의 칼을 맞고 무릎이 부서진 다음 장제가 목을 베었다(AD501년)
이 틈을 타고 북위가 남쪽으로 쳐들어왔다. 위의 진남장군 원영이 황제에게 편지를 올려서 3만 군사를 주면 양양으로 내려간 곧바로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고 재촉했다. 조정은 회답하지 않았다. 거기장군 원회가 다시 요청했다.
” 장강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는 일이 오늘에 달려있습니다.(廓清江表,正在今日)“
마침내 북위조정에서는 원징을 도독회남제군사로 삼고 출병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동예주자사 전익종은 건강이 아니라 하남의 의양(신양)을 공격하여 뺏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권하므로 군사를 돌려 그 방면의 영토를 뺏는데 성공했다.
<108> 소연의 양나라 건국(AD502)
AD498년 소란이 죽고 소보권이 황위를 물려받았지만 형편없는 재능의 보유자라 나라를 지킬 수가 없었다. 전국에서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 왕경칙의 반란(AD498)
· 강석·강사의 반란모의(AD499)
· 소요광의 반란(AD499)
· 진현달의 반란(AD499)
· 배숙업의 반란과 위 투항(AD500)
· 최혜경의 반란(AD500)
아마도 위진 남북조 기간(AD220년-AD587)의 360여년을 통하여 이렇게 반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적이 없을 정도로 나라는 혼란했다.
때마침 예주자사로 군사를 이끌고 최혜경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수습한 소의가 조정에 들어가게 되자 동생 소연이 측근 우안복을 몰래 보내 소의에게 말했다.
” 만세에 한 번 올까 말까한 이윤과 곽광의 일을 하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역양(예주의 도읍, 안휘성 화현)으로 돌아가신다고 하면
누가 형님의 길을 막겠습니까?
만약 군대를 놓으시고 무거운 작위를 받으신다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기실 것입니다.“
소의의 장사 서요보도 그렇게 하기를 권했지만 소의는 수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황제가 주는 상서령을 직을 받았다. 황제가 시도 때도 없이 궁정을 드나들었으므로 그 때를 타서 황제를 폐위시키라고 권했지만 끝내 소의는 듣지 않았다.
소의의 권위와 권력이 두터워지자 황제 소보권의 간신측근 여법진과 왕훤지 등이 황제를 꼬드겨 6년 전 AD494년 4월 소융창이 태자 울림왕 소소업을 폐위한 것처럼 소의가 소보권을 폐위할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 황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소의를 죽일 생각을 굳혔다. 그런 모의를 알게 된 소의의 측근 서요보가 도망가라고 권고했지만 소의는 도망간 상서령이 될 수는 없다고 하면서 눌러 앉아 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AD500년 10월 13일) 소의의 동생 9명은 다 도망갔고 오직 소륭만이 사로잡혀 주살되었다.
황제는 정만장군 옹주자사 소의를 살려둘 수가 없었다. 정만장군부의 장사 정소숙의 형 정식을 보내 소연 암살을 지시했는데 정소숙이 그 정보를 소연에게 알려주었다. 소연은 정식을 위한 연회를 열면서 소연이 가지고 있는 무기들을 모두 진열하고 보여주었다. 정식은 무기를 보고 동생 정소숙에게 말했다.
” 무기를 보니 옹주의 힘이 대단하네.
힘으로 이기기는 쉽지 않겠구나.“
소연은 소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장홍책, 여승진, 왕무, 유경원, 길사첨 등 측근과 함께 거사를 확정했다.
AD500년 11월 9일 갑병 1만여 명과 말 천 필, 그리고 배 3천척을 얻어 출병했다. 황제 소보권은 동생 남강왕 형주자사 소보융와 소영주을 중심으로 유산양과 3천 군사를 보내 소연을 토벌하게 하였다.
소연은 형주부사 소영주와 보국장군 유산양이 서로 의심하게 만드는 전략을 썼다. 그 중심에는 희생제물이 될 왕천호가 있었다. 왕천호에게 소영주에게로 가서 ‘유산양이 오면 먼저 형주를 차지하려 할 것이다’라고 말하게 했다.
소보융과 소영주는 소연을 믿어야할지 조정에서 보낸 유산양을 믿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석천문은 유산양을 죽이고 소연과 연합하자고 건의했고 유침이나 소영달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소영주는 소연이 보낸 왕천호의 목을 베어 유산양에게 보이면서 힘을 합하여 소연을 공격하자고 했다. 유산양은 이 계략을 전적으로 의심하지 않고 홀로 수레를 타고 소영주 군영으로 갔다. 유산양이 군영 문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군사들이 붙들어 목을 베었다. 유산양의 나머지 군사들은 즉각 항복했다. 옹주의 소연은 형주의 소보융을 주군으로 옹립한 다음 손을 잡고 황제를 타도할 계획을 세웠다. 소연에게는 도독전봉제군사라는 최고의 군권을 주었다. 곳곳의 지방세력은 소보융과 소연에게로 항복해 들어왔다.
다음해인 AD501년 3월 소보융은 강릉에서 천자의 자리에 올랐고 소영주에게 상서령, 소연에게 좌복야 및 도독정토제군사라는 직위를 내렸다. 소연은 왕무와 조중종 등을 거느리고 무한을 공격한 다음 장강을 따라 곧바로 건강을 공격했다. 제나라의 방위군들은 속속 소연에게 투항해 왔고 소연은 그들에게 죽이지 않고 새로운 직위를 내려주어 환심을 샀다.
제나라 황제 소보권은 평소에 재물에 매우 인색하여 황궁 안에서도 인심을 많이 잃었는데 소연과 내통하던 측근 왕진국의 주동으로 도망가다가 칼을 맞고 죽었다.(AD501)
AD502년 소연은 제나라의 대사마 및 도독중외제군사가 되어 행정권 및 군권을 모두 쥐게 되었다. 측근 중의 한 명인 심약이 소연에게 양위를 받는 것이 어떠냐고 소연에게 물었다. 소연은 그러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면서 수긍했다. 심약이 나가자 범운을 불러 그 문제를 상의했는데 범의 또한 생각이 같았다. 소연은 범운에게 내일 아침 심약과 같이 오라고 지시했다. 범운이 나와서 그 사실을 말하자 심약은 반드시 자기를 기다렸다가 같이 들어가자고 다짐을 받았다.
그러나 그 다음날 범운이 오기도 전에 심약은 선양에 관한 모든 계획을 다 소연에게 보고했고 소연 또한 심약의 계획을 거의 고치지 않았다. 들어자기 못한 채 밖에서 기다리던 범운은 심약이 나오자말자 물었다.
”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심약은 손을 들어 왼쪽을 가리켰다. 범운이 말했다.
” 소원을 어그러뜨리지는 않았구려.“
조금 있다가 소연이 범운을 따로 불러 말했다.
” 내가 군사를 일으킨 지 3년인데
공신들과 제장들의 많은 노고가 있었으나
제왕의 대업을 일으키는 것은 그대와 심약 두 사람의공이 제일 크오.“
이 날로 소연은 양왕이 되었고 구석의 예를 갖추었으며 문무백관을 설치하고 사실상의 황제역할을 하였다. 곧 제나라 소란의 아들 소보유, 소보숭 소보정을 죽였다. 제나라 황제 소보융은 고숙(안휘성 당도현. 건강의 남쪽)에 도착하자 곧바로 조서를 내려서 황위를 소연에게 물려주었다.(AD502년 2월 28일) 4월 8일 소연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양무제 소연의 나이는 39세 였다.
소연에 대해서는 자치통감에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몸소 옷을 세탁해 입었고 채식을 위주로 했으며 관리를 뽑을 때에는 항상 청렴하고 공정한 사람을 뽑았고 직접 불러서 면접을 했는데 정치의 도리를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청렴하고 능력이 있으면서 알려지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109> 망명 세력들의 남침 요청(AD503)
AD502년 소연의 세력들이 제나라 친왕을 모두 제거할 때 소보권의 동생 16세 소년 소보인은 환관 안문지와 마공의 도움으로 빠져나가 숨었다가 수현을 지키던 북위 임성왕 원징에게 몸을 위탁했다. 제나라 강주자사 진백지도 소연에게 반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북위로 도망갔다.
AD503년 망명온 소보인과 진백지는 남쪽의 양나라를 정벌해야 한다고 엎드려 요청했다. 위의 주군 원각은 남정문제를 두고 중신들의 의견을 물었다. 원각은 소보인에게 도독동양등삼주제군사, 진백지에게는 도독회남제군사의 직을 주어 준비를 하게 한 뒤 겨울에 크게 거사하기로 했다.
북위의 양주자사 원징은 적의 허점을 노려서 기마로 공격하면 통일은 아니더라도 장강의 서쪽은 확실히 장악할 것으로 믿었다. 원징은 가을에 정주, 병주, 영주, 기주, 제주, 상주의 여섯 개 주에서 2만 병사를 모으고 1500두의 말을 징발한 다음 회남 아래에 집결하고 소보인과 진백지를 선봉에 세웠다. 새해(AD504) 벽두에 북위 황제 원각이 직접 친정에 나섰다.
AD504년 북위와 양나라의 전투는 장강의 서쪽에서 대치하는 형국이었지만 의양(하남성 신양)을 놓고 위나라 장군 원영과 양의 채도공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채도공이 전쟁 중에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사촌동생 채령은과 조카 채승협이 방어에 나섰다. 채도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북위군은 총력전을 펼친 끝에 8월 11일 채령은이 마침내 위에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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