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T)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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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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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원굉의 사망(AD499)
AD498년 겨울 탁발굉이 심하게 아팠을 때 곁에서 시중을 든 사람은 동생 팽성왕 원협이었다. 그는 모든 정사를 도맡아 했으며 명의 서건을 들여서 탁발굉의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마침 탁발굉의 병이 조금 나아서 서건에게 큰 상을 내렸다. AD499년 2월 마권성(하남성 등주)을 침략한 진현달을 격퇴시키기 위해 출정했던 탁발굉의 병환이 심해졌다. 탁발굉은 곁에서 시중을 들던 원협에게 도독중외제군사라는 직을 주어 모든 군권을 맡기려고 했으나 원협이 극구 사양했다. 원협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떠맡긴 탁발굉은 병세가 악화되자 군사를 낙양으로 돌렸다. 비록 진현달의 군대를 격퇴했지만 제나라가 멸망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탁발굉이 앞으로의 모든 것을 원협에게 부탁했다. 아들 원각(AD383-AD515)이 열여섯이었으니 아주 어린 것은 아니었지만 탁발굉은 미덥지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원협은 극구 사양했다. 울면서 모든 관직을 내려놓겠다고 말했다. 탁발굉은 아들 원각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했다.
” 너의 숙부(원협)는 청아하고 아름답고 칭찬할 만하고
흰 구름 같이 청결한 분이다.
부귀영화를 싫어하고 관직을 버리고 대나무 소나무 같이
살기로 작정했다.
내가 죽은 뒤에 그것을 허락하여 겸손한 성품을 완성하게 하라.“
그리고는 태자를 보필한 여섯 명의 보좌(육보)를 임명했다.
북해왕 원상 : 사공
진남장군 왕숙 : 상서령
진남대장군 광양왕 원가 : 좌복야
송변 : 이부상서
태위 겸 시중 함양왕 원회
상서우복야 임성왕 원징
탁발굉은 4월 1일 낙양으로 가던 도중 곡당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32세였다. 북위 고조 효문황제로 불린다. 팽성왕 원협과 임성왕 원징은 탁발굉의 사망소식을 숨겼다. 진현달이 패하긴 했어도 멀리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황제가 살아있는 것처럼 꾸미고 며칠을 가다가 완성에 도달하고 나서야 염습을 마쳤다. 급히 낙양에 있는 태자를 노양(하남성 노산)으로 불러들였고 마침내 발상하고 4월 12일 원각이 즉위하면서 대사면을 내렸다.
태자 원각측은 원협의 모반의사를 감지하고 은밀히 방비하였지만 원협은 원굉이 남긴 유조를 전달하면서 예의를 다하고 틈새 없이 행동하였다. 함양왕 원희가 낙양에서 서둘러 노산으로 내려와 한참 동안을 노산성 밖에서 머무르다가 들어와 원협에게 말했다.
” 너는 일을 열심히 하긴 했지만
실제 매우 위험하였다.“
원협이 말했다.
” 형님은 나이도 많고 식견도 높아서 평온한가 위험한 가를 아시지만
저는 뱀을 손으로 잡고 호랑이에 올라타고서도
어려움을 못 느꼈습니다.“
원희가 말했다.
” 내가 늦게 온 것을 꾸짖는 것 같구나.“
원협은 탁발굉의 유지에 따라 유폐되어있던 풍후(풍윤)에게 사약을 내렸다. 풍후는 전 남편 탁발굉이 사약을 내렸다는 사실을 믿으려하지 않고 저항했다.
” 어찌 관께서 나를 죽이려 했겠는가.
여러 왕들이 나를 죽이려하는 것일 뿐이다.“
백정이 풍후를 붙들고 강제로 약을 먹였다. 여러 왕들이 풍후의 시체를 확인한 다음 말했다.
” 설령 유조가 없었더라도 우리 형제들이 죽였을 것이다.
어찌 행실을 잃은 아녀자로 하여금 세상을 재제하게하고
또 우리를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있었겠는가?“
<101> 탁발굉에 대한 평가
북위 고조 효문제 탁발(원)굉은 끝까지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두터웠다. 일찍이 동생 함양왕 원희 등에게 말했다.
” 내가 죽은 뒤 내 아들 중에서 형편없는 불초한 사람이 있거든
너희들이 잘 살펴보고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되
그렇지 못하거든 자리를 빼앗아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
현재를 뽑아 임명했고 선한 것을 따르는 것이 물 같았으며 열심히 정무를 보살펴 조석으로 나태함이 없었다. 항상 이렇게 말했다.
” 군주는 마음을 씀에 공평(處心公平)함이 없을까,
사물을 처리함에 성의를 다하지 못할까(推誠于物) 이 두 가지를 걱정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다 잘한다면 호족이나 월족이라도 형제처럼 다룰 수가 잇을 것이다.“
법을 다룸에 있어서는 대신에게는 용서함이 없었으나 보통 사람들의 작은 과실은 관대히 용서하였다. 음식 속에 벌레가 들어있거나 뜨거운 국을 쏟아 손을 데어도 모두 웃으면서 용서하였다. 궁실은 부득이 하지 않으면 수리하지 않았고 옷이 헤어져도 새 것이 아니라 세탁해서 입었다. 항상 사관에게 말했다.
” 사관이란 정직하게 기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군의 위엄과 복은 자기에게 스며들어 잇는 것이지
글이나 책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사서에 죄악을 제대로 기록해 두지 않으면
장차 누가 두려워하고 꺼릴 것이 있겠느냐?“
<102> 제의 배숙업이 위에 항복(AD500)
당시 남쪽의 제나라에서는 국정이 극도로 문란하고 불안했다. 특히 군주 소란은 병이 있는데다가 제나라를 건국한 숙부 소도성(고제)와 소색(무제)의 자녀들이 장성한 것에 대해 매우 불안해 하였다. AD497년 왕안의 반란이 있었고 황제의 병환은 심해졌다. 황제 소란은 소요광을 시켜 소도성과 소색의 직계후손인 열 명의 왕들을 몰살시켰다(AD498). 제나라 황제가 고제나 무제의 직계를 다 죽이자 고제나 무제 때 중신이었던 사람들도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고제와 무제의 사랑을 받았던 회계태수 왕경칙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목이 잘렸다. 소란의 지병이 악화되어 47세로 세상을 떠나고 16세 소보권이 황제가 되었는데 형편없는 무능한 폭군이었다.
동궁에 있을 때부터 배우기를 싫어하고 오직 놀기만을 즐겨했다. 성격은 편협하여 오로지 환관들과 어울리기만 하고 시종들만 만났다. 회의 도중에 궁전 구석으로 들어가 잠을 자는 바람에 대신들은 쓰러질 정도로 배고픔을 참고 깨기를 기다려야 했다. 조정 대신들은 무능한 황제를 갈아치워야 할지를 고민했는데 황족은 황족대로 서로 다른 생각을 품었고 대신들은 대신들 또한 누구와 손을 잡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도 소요광과 진현달과 소연은 가장 막강한 세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제와 무제의 예주자사 배숙업은 고민이 깊어졌다. 예주자사에서 남예주자사로 전보되었는데 기쁘지가 않았다. 진현달의 반란(AD499)이 일어났을 때에도 형식적으로는 조정을 구원한다고 군대를 보냈지만 속으로는 스스로 반란의 생각이 없지 않았다. 조정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 정보를 들은 배숙업의 친족들도 서둘러 조정에서 빠져나와 배숙업에게 서둘러 움직일 것을 재촉했다. 조정에서는 배숙업을 토벌하려고 하는 경우 북위를 끌어들일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배숙업은 측근 마문범을 양양에 있는 옹주자사 소연에게 보내 살아남는 방법을 타진하고자 넌지시 물었다.
” 만약 얼굴을 돌려서 북쪽(위나라)를 섬기지 않으면
하남공 자리는 잃지 않겠지요.(不若回面向北,不失作河南公)“
소연의 대답은 딴 생각 품지 말라는 것이었다.
” 만약 북쪽을 향하고 싶으시다면 저쪽에서는 반드시 사람을 보내
하북의 한 주를 거처로 주겠지요마는
어떻게 하남공의 자리는 다시 얻겠소.
반드시 남쪽으로 돌아올 가망이 끊기는 일이요.“
(若欲北向,彼必遣人相代,以河北一州相处,河南公宁可复得邪!如此,则南归之望绝矣)
배숙업은 고민을 거듭하다가 아들은 건강에 인질로 보내고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의햐을 타진했다. 위나라 설진도는 빨리 투항해야 공이 크다고 재촉했다. 결국 배숙업은 북위에 항복하고 말았다.(AD500년 1월) 위나라는 배숙업에게 도독예옹주제군사 정남장군 및 예주자사로 봉하고 팽성왕 원협과 거기장군 왕숙에게 10만 대군을 주어 수양(예주 도읍)으로 보냈다. 제나라는 즉각 최혜경을 보내 북위대군을 토벌했지만 그 마저 아들 최각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최혜경의 반란도 실패하여 부자 모두 죽었다.
<103> 북위의 가장 훌륭한 왕족 원협(AD500)
수양을 지키고 있는 팽성왕 원협을 대사마로 승진하고 상서령 왕숙은 개부의동삼사를 덧붙여주었다. 북위 조정에서는 제나라의 수양 구원군을 잘 격파한 원협을 낙양으로 불러들였다.원협은 대사마직을 극구 사양하고 중산(하북성 정주)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원협은 평소 소박한 것을 좋아하고 권세나 이익을 탐하지 않았다. 끝내 바라는 바를 들어주지 않자 처량하고 슬픈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문학과 역사를 좋아하여 책읽기를 그치지 않았고 항상 신중하고 생각이 깊어서 실수를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역사가들은 원협을 위나라 종실 제왕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104> 원각의 친정선언(AD501)
함양왕 원희는 황제 원각의 숙부이면서 모든 신하의 가장 으뜸이었다. 그러나 교만하고 사치하면서 탐욕 음란하여 주군이 매우 꺼려하고 있었다. 원희가 노복을 영군장군 우열에게 보내어 황제만이 쓸 수 있는 경호병 즉, 우림군과 호분군을 요구하였다. 우열이 어렵다고 반대하자 우열을 항주(대동시) 자사로 전보시켰다. 우열의 아들 우충이 황제의 시위장군으로 항상 황제의 좌우에 있었는데 아들에게 원희의 모든 비리를 황제께 고해바치도록 했다. 황제 또한 그 사실을 짐작하였으므로 우열에게 내일 조정에 들어오도록 시켰다.
다음날 우열이 조정에 입조하자 황제가 우열에게 직접 명령을 내렸다. 근위병 60명을 데리고 가서 원희, 원협 및 원상 세 숙부를 조정으로 호위하여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세 숙부가 들어오자 황제는 모든 정무와 백관을 직접 다스릴 것이니 여러 숙부들은 원하시는 대로 돌아가 계시면 추후 처분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협은 본인이 원하는 대로 은퇴를 허락했고 원희는 명분상의 직책만을 주었으며 원상에게는 실권 있는 대장군을 주었으나 여기에는 나중에 꼬투리를 잡고 몰아내려는 계략이 숨어있었다. 원로 종친을 다 몰아낸 원각은 총신 측근 여섯 명, 즉 여호, 왕중흥, 구맹, 조수, 조옹 및 고조를 중심으로 국정을 장악하기 시작했다.(AD5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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