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N)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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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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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탁발홍의 양위(AD471)
탁발홍은 똑똑하고 예지가 깊었으며 일찍 성숙하였고 강직하고 결단성이 있었다. 다만 여러 가지 잡스러운 종교나 학문에 빠져서 조정에서도 신하들과 정사를 보기 보다는 담론을 나누기를 좋아하였다. 마침 숙부이면서 경조왕인 탁발자추가 사려가 깊고 또 고상하고 인자했으므로 그에게 정권을 이양할 생각이었다. 멀리 사막에 원정 나가있던 태위 원하를 급히 불러들여 그 문제를 상의했으나 감히 아무도 입을 열려하지 않았다. 탁발자추의 동생 임성왕 탁발운이 나서서 말했다.
” 위로는 종묘를 어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또 전위하신다면 아들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원하도 그 생각에 동의했다. 동양공 탁발비가 나서서 말했다.
” 지금 태자(탁발굉)은 너무 어리십니다.
종묘를 버리지 마시고 백성을 지켜 주십시오.“
상서 육발도 나섰다.
” 폐하께서 태자를 버리시고 제왕으로 교체하신다면
신은 전정에서 목을 베고 죽을지언정 조서를 받들 수가 없습니다.“
중서령 고윤이 나서서 말했다.
” 신은 감히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만
위로는 종묘의 부탁한 중임을 생각하시고
주공이 성왕을 안고 보필한 지난 일을 생각해 보시지요.“
황제가 말했다.
” 그렇다면 태자를 세우고
여러 공들이 그를 보필한다면 어찌 안 될 일이 있겠소.
육발은 곧은 신하이니 반드시 내 아들을 잘 보필할 것이요”
마침내 육발을 태보로 삼고 원하와 더불어 부절을 가지고 황제의 옥새와 인끈을 주어 전위하였다. 이로써 북위 고조 탁발굉이 5세의 나이에 즉위 하였다.(8월20일) 조정에서는 큰 일은 탁발홍이 맡도록 부탁해서 승낙을 받았다. 탁발홍은 거칠고 다듬지 않은 나무로 지은 집에서 살았으며 집으로 선승들을 불러 같이 살았다.
<62> 사당의 제사를 줄여 살생을 막은 탁발홍(AD472)
북위에는 사당이 많았다. 1천 곳이 넘었다. 매 해 약 7만 5천여 마리의 가축들이 제사에 희생되었다. 불심이 깊었던 상황 탁발홍은 그렇게 많은 가축들을 죽이는 것이 싫어서 이렇게 조서를 내렸다.
“ 지금부터는 하늘과 땅, 종묘사직에 올리는 제사가 아니면
희생의 제물을 올리지 말고 오직 술과 마른 고기로만 제사를 올려라.”
<63> 유휴범 반란(AD474)
AD472년 유송의 황제 명제 유욱의 병이 매우 깊어졌다. 그가 죽은 뒤 황후 왕정풍이나 그의 오빠 왕경문이 권세를 독차지할 것이 걱정되었다. 황제는 이런 말까지 만들어 그들을 경계했다.
“ 한 선비(一+士, 즉 王)는 가까이 할 수가 없고
궁(弓)과 장(長)은 활로 사람을 죽이네”
한 선비는 왕경문을 말하는 것이고 궁장은 군권을 쥐고 있는 장영을 뜻하는 것이다. 유욱이 회생의 가망이 없게 되자 왕경문에게 사약을 내리면서 편지에 이렇게 썼다.
“ 경과 더불어 오래 지냈소,
경의 가문을 온전하게 지속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임을 이해하기 바라오.”
바둑을 두던 중에 편지를 받은 왕경문은 슬쩍 편지를 훑어 본 뒤 태연하게 바둑을 계속 두었다. 그리고는 먹을 갈아 황제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뒤 사약을 먹고 죽었다.
유욱(彧) 황제는 곧바로 강주자사 유휴범을 사공으로 승진시키고 저연, 유면, 원찬, 채흥종, 심유지, 소도성의 일곱 명으로 고명대신을 삼았는데 그 날 저녁 죽었다.(4월 17일) 열 살이던 창오왕 유욱(昱)이 자리를 이어받았다. 형식적이니 권세는 저연과 유찬에게 있었으나 실제 권력은 뇌물과 부패로 얼룩진 완전부와 왕도륭 양운장 등에게서 나왔다.
황제의 유일한 삼촌인 유휴범은 재상이 되기를 기대했으나 그렇게 되지 않자 불만을 품고 인심을 끌고 병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본래 능력도 부족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어서 형 유욱이 집권할 당시에도 주목을 받지 못하던 용렬한 사람이었다. 유휴범이 다른 뜻을 가지고 잇다는 것을 알게 된 조정에서도 반란에 대해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다. 강주(지금의 구강)자사 유휴범은 AD474년 5월 2만 보병과 500기병으로 장강을 따라 내려갔다. 명분상으로는 근습(황제의 최측근) 양운장과 왕도륭을 타도하여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것이었다.
소도성은 일단 건강까지 적군이 내려오기를 기다릴 것, 그리고 자신과 부하들을 거짓 항복시켜 유휴범의 신임을 얻을 것, 그런 다음 유휴범의 머리를 베어 올 것이란 전략으로 반란을 수습했다.
<64> 탁발홍(AD474)
북위 현조 헌문제 탁발홍은 인자하면서도 뛰어난 군주였다. 모반이나 반란의 죄가 아니면 죄는 자신에게만 국한되도록 제한하여 문주(門誅, 멸문)과 방주(房誅,멸방)라는 악습을 없앴다. 여기서 방이란 씨족 중의 한 지파를 말한다. 정치에 힘을 써서 상벌이 매우 공정하고 엄격하였으며 주목태수를 선발할 때 신중하게 능력을 보고 선임하였다. 의혹이 가는 사건들은 여러 부서의 관리들로 하여금 상의하여 결정하도록 하였고 판결은 항상 법을 기준으로 내리도록 했다. 통상으로는 입으로 전달되어 와전되기 쉬웠던 조서를 반드시 문서로 하게 했으며 대형(사형)은 반드시 여러 번 반복하여 국문하게 함으로써 신중한 판결을 내리도록 했다.그리고 사면을 자주 내림으로써 해이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면을 내리지 않았다.
<65> 돈황을 포기하는 문제(AD474)
유연이 자주 돈황을 침략하였다. 돈황지역을 수비하는 울다후가 조정에 주청하였다.
“ 돈황은 너무 멀리 치우쳐있습니다.
서쪽과 북쪽의 강한 적들 사이에 끼어 있으므로 지키기 힘듭니다.
주민들을 내지로 옮겨 양주(감숙성 무위)로 가게 해주십시오.”
여러 신하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급사중 한수가 반대하며 나섰다.
“ 돈황이 설치된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비록 외적들이 가까이 자주 침략해도 주민들은 강하게 대처해 왔습니다.
서쪽과 북쪽의 오랑캐를 잘 갈라놓아 내통할 수 없게 하면 됩니다.
또 양주에서 돈황까지는 천리 길이라서 방어를 하기 힘듭니다.
지금 만약 옮기신다면 국토를 축소시켰다는 소리를 들을 뿐이고
오랑캐들이 만약 협력하여 양주를 공격한다면
관중지역이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주민들 중에는 옮기는 것을 싫어하여
왜구들을 몰래 끌어들일 수도 있습니다.
절대로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한수의 말대로 양주 이주를 중단하였다.
<66> 풍태후의 탁발홍 독살(AD476)
풍태후는 자신이 아끼는 이혁과 그 형 이부를 탁발홍이 죽인 것에 대해 몹시 화가나 있었다. 섭정을 하다가 정권을 일찌감치 물려준 것이 자신인데 총애하는 이혁을 죽인 것은 공연한 도전이라고 분개해했다. 풍태후는 은밀히 독약을 넣어 탁발홍을 죽였다.(6월13일) 그때 탁발홍의 나이는 22세였다. 전국적으로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탁발홍은 금릉(내몽고 허린컬) 부근에 묻었다. 서른 네 살의 풍태후는 스스로를 태황태후라고 부르며 칭제하였고 탁발장락을 태위, 탁발목진을 사도, 이흔을 사공으로 삼았다.
문명황후 풍태후는 검소하고 총명하고 세밀하며 정치와 셈에 매우 밝았다. 다만 시기심이 많았고 잔인하고 또 권모술수에도 매우 능했다. 탁발홍이 효심이 지극해서 항상 풍태후의 안색을 보고 태후의 의견을 따라 결정했으므로 둘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으나 다만 이혁의 살해 이후 급격히 악화되었다. 풍태후는 자신이 총애하던 환관을 모두 후대하여 고관대작으로 임명하여 조정 내에서 인심을 샀을 뿐만 아니라 명성이 높은 황족 탁발비와 유명근 등을 존대함으로써 사심이 없음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풍태후는 자신이 저지른 비행(스캔들)이 드러나는 것을 매우 꺼려하여 조금이라도 그것을 논의할 낌새가 보이면 가차 없이 죽였다. 사소한 과실로도 자주 채찍질 혹은 태장으로 벌을 주었지만 오랫동안 감정을 묵히는 일이 없이 곧바로 다시 후대하였으므로 풍태후에게 반발감을 오래 지니는 사람은 없었다.
<67> 북위 조정의 혼란 : 조흑과 이흔(AD477)
북위의 서주자사 이흔은 탁발홍을 섬길 때 창부상서로 승진하여 올라왔다. 이 때 범표라는 사람을 믿고 등용했는데 동생 이영이 범표의 사람됨이 악하다고 믿고 그것을 말렸다. 그러나 이흔은 그 말을 믿지 않고 모든 것을 범표와 상의하고 결정했다. 당시 조정의 인사문제는 상서 조흑과 이흔이 전담하고 있었는데 사사로운 관계를 앞세워 이흔이 사람을 등용하자 조흑이 그것을 탁발홍에게 지적하여 이흔과의 사이가 나빠졌다. 이흔은 조흑이 과거 관물을 횡령한 것을 들추어내어 조흑이 조정에서 쫒겨났다. 조흑은 그 일로 인해 분개한 나머지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신경쇠약에 걸렸으나 다행히 다음해에 다시 조정으로 소환되어 인사업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마침 탁발홍이 죽고 풍태후가 실권을 잡자 조흑은 이흔의 전횡과 방자함을 지적하였고 풍태후는 상서 이흔을 서주자사로 내보냈다.
이 때 이흔의 측근 범표는 풍태후가 과거 이흔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것을 알게 되었다. 이흔이 풍태후가 아끼는 이부-이혁 형제를 모함한 사건을 알게 된 것이다. 범표는 풍태후에게 잘 보이려고 이흔이 모반을 일으키려한다고 무고하였다. 풍태후가 급히 이흔을 소환하여 친히 국문하였다. 이흔이 그런 일이 없다고 말하자 범표를 불러와 대질시켰다. 이흔이 이렇게 말했다.
“ 네가 나를 이렇게 무고를 하였는데 내가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너는 나에게 받은 은혜가 이와 같이 두터운데
차마 이렇게까지 할 수가 있는가?”
범표가 이렇게 말했다.
“ 저 범표가 공의 은혜를 받은 것은 맞지만
어찌 공이 이부의 은혜를 받은 것만 하겠습니까.
공께서 이부에게 하지 못할 일을 했는데
저 범표도 어찌 공에게 그런 일을 못 하겠습니까”
이흔이 탄식하며 말했다.
“ 내가 동생(이영)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으니 후회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조흑은 이흔의 죄명을 다시 조작하여 이흔과 그의 두 아들마저 죽였다. 조흑은 그런 연후에도 태연하게 먹고 마시고 잠자고 행동했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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