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J)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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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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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북위와 유송의 충돌(제3차 위송 전쟁, AD450)
중국의 영토를 거의 반분하고 있는 북쪽의 북위와 남쪽의 유송은 서로 틈을 보고 침략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북위로써는 내몽고에 있는 유연의 세력들이 배후를 찌를까 싶어 감히 유송을 먼저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송으로서도 고조 유유가 사망한 후(AD422) 집권한 유의륭이 원가의 치(元嘉之治:AD424-AD453) 동안 여러 번 북위를 공격해 봤지만 성공하지 못한 터라 라는 망설이던 터였다. AD 449년 북위 탁발도가 유연을 공격하는 틈을 타 유송 황제 유의륭이 중원을 공격하겠다고 하면서 좋은 전략을 바치라고 명했다. 북위는 탁발나의 탁월한 무공에 힘입어 유연을 대파하자 곧바로 남침을 준비했다. 유송도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참이었으므로 북위와 유송의 대전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북위는 AD450년 초 대군을 몰고 남하하면서 양주(梁州,지금의 하남성 상구부근)에서 크게 사냥에 나섰다. 유송의 유의륭이 그 소식을 듣고 이렇게 지시했다.
” 만약 북위군이 작거든 각자 잘 성을 잘 지킬 것이요
만약 대군이거든 백성을 거느려 인솔하고 수양으로 귀환하라.“
북위의 군대가 10만 명이 넘게 쳐들어오자 유송의 변방 장수들은 모두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북위군은 더 내려가 현호(하남성 여남)을 둘러쌌다. 유송군대는 죽음으로 싸워 방어했으므로 쉽게 성이 함락되지 않았다. 탁발인은 1만 군사를 거느리고 여양(하남성 주구시 남쪽 상수현)에 주둔했다. 유송 황제 유의륭은 유준과 유태지를 보내 탁발인을 습격하여 패퇴시켰다. 북위군이 도망가다가 갑자기 돌아와 반격에 나서자 놀란 유송군은 다시 퇴각했다. 유태지는 피살되고 정천조는 포로로 잡혔다. 원겸지와 유정과 두유문은 도망하는데 성공했다. 유의륭이 다시 장질을 파견하여 현호를 구원하려 하자 북위는 탁발걸지진을 보내 대치시켰다. 장질이 탁발걸지진을 사로잡은 뒤 목을 잘랐다. 장질 덕분에 겨우 영토를 지킬 수가 있었다. 탁발도는 대군을 이끌고 다시 평성(산서성 대동)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유의륭에게 편지를 보냈다
” 그대는 나의 적수가 되지 못하오.
가을에 정벌하러 다시 올 것이니
진작 항복하는 게 좋을 것이오.“
탁발도가 물러남으로써 전쟁은 중단되었지만 승리하지 못한 유의륭은 매우 화가 났다. 전투에 참여한 장수들을 죄다 강등시켜 책임을 물었다. 셋째 아들이자 나중에 황제로 오른 무릉왕 유준을 진군장군으로 강등시켰고 전투에서 패해 도망간 원겸지는 복주시켰다. 장수 윤정과 두유문은 상방이라는 하급직책으로 낮추었다.
<43> 유송 유의륭의 반격(제4차 위송 전쟁, AD450 가을)
탁발도가 돌아가긴 했지만 금년 초 북위는 회하를 넘어 유송의 영토 깊숙이 침입하였다. 과거 유송의 땅이었던 황하이남 회하 유역을 AD422년과 AD430년에 걸쳐 잃었던 유송의 유의륭은 옛 땅을 회복하겠다는 생각이 깊었다. 좌위장군에서 이부상서가 된 강담과 복야 서담지와 왕현모 같은 최측근 총신들은 하나같이 유의륭을 부추겨 북벌을 선동했다. 좌군장군 유강조가 이미 가을이 깊어 너무 늦었으니 내년을 기다리자고 간청했다. 황제가 말했다.
” 저들의 포악한 정치로 고통을 받고 있는
의로운 백성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소.
일 년이나 군사를 묶어두는 것은 저들의
의로운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요.
안되오.“
태자보병교위 심경지가 나섰다.
” 우리는 보병이고 저들은 기병입니다.
단도제가 두 번이나 출병(AD422,AD431)했어도 이기지 못하였고
도언지도 큰 손해를 입고 퇴각했습니다.
지금 왕현모가 단도제나 도언지 보다 낫다는 보장도 없고
6군의 병력이 옛날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황제군대의 명예에 두 번 욕을 뵐까 두렵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 황군이 지난 번 굴욕을 보인 것은 따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오.
단도제는 오랑캐들에게 스스로 준비할 겨를을 주었던 것 때문이고
도언지는 중도에 병이 들었기 때문이요.
오랑캐들이야 믿는 것이 말뿐인데
지금이야 강마다 물이 넘쳐나니 배를 띄워 북으로 쳐들어가면
확오의 적군은 반드시 도망갈 것이요
활대의 오랑캐들도 쉽게 뽑힐 것이요.“
이 두 성만 뺏으면 양곡을 거두고 백성을 설득하여
호뢰와 낙양은 저절로 흔들리고 뽑힐 것이요.
오랑캐들이 다시 쳐들어 온들
성과 성들이 서로 연락하여 즉시 사로잡을 것이오.”
심경지가 강력히 반대했지만 황제는 서담지와 강담에게 심경지를 힐난하도록 사주했다. 심경지가 이렇게 탄원했다.
“ 나라 다스리는 일은 마치 집안 다스림과 같아서
농사일은 노복에게 물어야 하고
길쌈 일은 비녀에게 물어야 하는 법이다.
폐하께서는 나라를 정벌하시고자 하면서
백면서생들과 모의하시니
이이 무엇에서부터 해결되겠습니까?”
황제가 웃으면서 그의 충언을 묵살했다. 태자 유소나 다른 신하들도 다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탁발도가 유의륭이 북벌에 나선다는 정보를 듣고 이렇게 서신을 보내었다.
“ 그대 나이 쉰 살로 일찍이 문 밖을 나가 본 적이 없었소.
이곳까지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시나
세 살짜리 영아와 같으시요.
말 위에서 태어 나 자란 선비족과 어떻게 다툴 수가 있겠소.
줄 것은 별로 없지만 사냥 하는 말 12필과 담요와 약재를 싸서 보내 드리오니
먼 길에 피로한 말 대신에 요긴할 것이고
물과 풍토가 편치 않으실 때 약을 긴요히 쓰도록 하시오.”
탁발도의 무례한 빈정거림에 분개한 유의륭은 다음 달(AD450년 7월) 대군을 일으켜 북진했다. 유송의 황제가 북벌 대군을 모은다는 소식이 들리자 왕공은 물론 부유한 상인들이 다투어 나서서 금이나 포백을 바쳐 전쟁비용을 헌납했고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용병군사를 모집했다. 유송 군대는 여러 갈래로 군사를 나누어 회하 전역을 치고 북으로 올라왔다. 왕현모는 활대를 포위했고 신원길은 확오를 침공했다. 최맹과 소빈은 낙안(산동성 광요)를 습격했으며 장질과 왕방회는 허창 방면으로 쳐들어갔다. 윤현조와 유원경과 유탄은 서쪽의 홍농((하남성 영보)지역으로 들어갔으며 방계명은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거대한 유송군대가 몰려오자 북위군은 일단 재빨리 퇴각했다. 유송 군대는 큰 저항 없이 옛 영토를 회복하자 한 편으로는 눈을 의심하며 놀랐고 다른 한 편으로는 북위군에 대한 가벼운 마음이 생겼다.
회하 남쪽 깊숙이 영토를 확장했던 북위 수비군들이 별다른 저항도 없이 밀려오자 북위조정에서는 서둘러 구원병을 일으켜 반격하자고 졸랐다. 탁발도는 느긋하게 말했다.
“ 아직 말들이 살찌지 않았소. 하늘의 기운은 아직 잘 익지 않았소.
서둘러 나간다고 공이 있는 것이 아니오.
만약 적병들이 쳐들어 와서 그치지 않으면 물러나서 음산으로 피할 것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원래 양피를 덮고 자란 몸이니
어찌 비단 옷을 입고 살겠소?
10월까지 간다고 해도 나는 걱정이 없소.”
탁발도는 날이 서늘해질 겨울까지 기다리는 지구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9월 탁발도는 대군을 이끌고 평성을 출발하여 내려왔다. 큰 아들 태자 탁발황은 내몽고 남쪽을 진을 치고서 유연의 습격을 대비하게 하고 둘째 아들 오왕 탁발여로 하여금 수도 평성을 방어하게 하였다. 탁발도는 유송 왕현모의 공격을 받고 있는 활대로 내려왔다. 왕현모는 활대를 포위하고서 화공을 퍼붓자는 부하들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어차피 손쉽게 함락될 것인데 성 안의 집들을 태워버리면 아까운 재산 손실만 생긴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성 안의 사람들은 초가집들을 치워버리고 땅굴을 깊이 파고서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왕현모가 활대를 공략한다는 소문을 듣고 수천 명의 주변 사람들이 매일 식량과 전쟁 물자를 가지고 돕겠다고 나섰는데 왕현모는 그들을 능력에 따라 쓰지 않고 주변의 장수들에게 무관심하게 나누어 배치시켰다. 죽음을 각오하게 자원한 사람들은 왕현모의 이런 무책임한 행동에 격분했다.
왕현모의 활대 함락이 시간을 계속 끌면서 지체하는 동안에 탁발도의 대군이 방두(하남성 기현)까지 내려왔다. 방두는 활대의 서쪽 약 25KM 지점이다. 탁발도는 밤중에 사람 몇 명을 포위된 활대로 들여보내 구원군이 도착했음을 알리고 동시에 포위한 왕현모 군대의 진영을 염탐시켰다. 이틀 뒤 탁발도는 100만에 가까운 대군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활대로 진격했다. 왕현모는 대항할 생각도 못하고 도망쳤다. 추격을 받고 죽은 유송군이 만 명이 넘었고 버리고 무기가 산같이 쌓였다.
당시 청주(산동성)와 기주(하북성) 자사였던 소빈이 심경지를 시켜 5천 군대를 이끌고 활대를 구원하게 했지만 심경지는 이미 늦었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소빈은 억지로 심경지를 활대로 보냈다. 때마침 왕현모가 패주해서 숨어서 돌아오자 소빈이 패전의책임을 물어 그를 죽이려하자 심경지가 말렸다.
“ 탁발도 대군의 위엄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궁수만 100만이라고 하니 누군들 그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싸움 도중에 있는 장수를 죽이는 것은 스스로를 약화시키는 일이오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소빈이 마침내 왕현모를 살려주었다. 소빈은 활대 대신 확오(산동성 치평 부근)를 굳건하게 지킬 생각이었다. 심경지가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 지금 청주와 기주가 다 허약하고 위태롭습니다.
만약 탁발도의 대군이 이쪽을 휩쓸어 점령하고 지나가면
아무리 확오를 견고하게 지킨들 산동성 일대의 땅은
이미 나라의 땅이 아닐 것입니다.
지난 번(AD431) 주수지가 활대를 지켰지만
황하 이남 회하 이북의 땅이 몽땅 탁발도에게 넘어간 것과
똑같은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심경지는 확오를 지킬 것이 아니라 동진하는 탁발도의 군대를 저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때마침 조정에서 서신으로 퇴각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소빈은 제장을 불러 모으고 회의에 들어갔다. 모든 장수들은 산동성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심경지가 말했다.
“ 성 밖의 일은 장군이 알아서 하십시오.
조정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태의 형국을 알지 못합니다.
범증 같은 사람도 항우가 알아보지 못했는데
쓸데없는 의논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소빈은 항우보다도 못하고 또 의논하는 부장들도 범증과 비교도 할 수 없는데 무슨 쓸데없는 토론이냐는 빈정거림이었다. 그러나 소빈과 주변 사람들은 그 속내를 알아듣지 못하면서 웃었다.
“ 심공은 학문이 매우 깊은 사람 같구려.”
심경지가 화난 언성으로 말했다.
“ 많은 사람들이 비록 옛일과 지금 일을 (읽고 배워서)안다고 하지만
하관이 직접 현장에서 귀로 들은 것만 못합니다.”
책을 읽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보고 느낀 상황이 그렇다는 항변이었다. 소빈은 심경지의 말을 듣지 않고 왕현모에게 확오를 지키도록 하고 본인은 역성(산동성 제남)으로 돌아갔다. 유송 군대가 저지하지 않고 거점을 방어하는 전략을 굳히자 탁발도는 곧바로 황하를 건너 동쪽으로 진군하여 추산(산동성 곡부 남쪽 추성)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여러 장수들에게 동시에 남쪽방향으로 진군하도록 명령했다. 영창왕 탁발인은 낙양을 떠나 수양으로, 상서 장손진은 마두(안휘성 회원)으로, 고량왕 탁발나는 청주에서 하비로 내려왔다.
북위 대군이 밀려오자 황제 유의륭은 장안방면으로 나가있던 유송의 유원경 군대들은 물론 유강조까지 모두 불러들였다. 탁발도는 팽성 부근 소성(안휘성 소현)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팽성을 지키는 유의공은 식량이 부족하여 겁에 질려 후퇴를 생각하고 있었다. 심경지는 군대는 적지만 식량은 풍부한 역성(산동성 제남)의 소빈에게로 가서 연합작전을 펴자고 역설했다. 그러나 유의공의 참모 하욱은 동쪽 해변으로 퇴각한 뒤 바다를 타고 건강으로 후퇴하자고 주장했다. 유의공은 하욱의 생각에 더 이끌렸다. 안북장군(유준)부의 장사 장창이 나서서 말했다.
“ 역성으로든지 해변으로든지 나갈 방법이 있다면야
왜 제가 그렇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식량이 부족하여 모두들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지만
문을 닫아걸고 있어서 못 가는 것입니다.
만약 문을 열고 나간다면 모두들 뿔뿔이 흩어져
어디로든지 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 굶는 것도 아닌데 어찌 그리 급하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멸망의 길로 서둘러 가시려는 것입니까.
가시려면 제 목의 피를 밟고 가시지요.”
무릉왕 유준이 나서서 말했다.
“ 숙부(유의공)께서 전 군대를 통솔하시는 총통이십니다.
어떻게 결정을 내리시든 숙부님의 결정이라 아무도 간여할 바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진을 버리고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장 장사의 말과 제 생각은 같습니다.”
유의공은 팽성을 지키기로 했다. 탁발도의 대군이 유의공과 대치했다. 전에 포로로 잡은 괴응을 성 안으로 들여보내 사탕수수를 달라고 요구하자 유준이 달라는 대로 갖추어 주면서 답례로 낙타를 요구했다. 상서 이효백이 탁발도의 지시를 받고 유의공에게는 담비가죽을 제공하고 유준에게는 낙타와 노새를 주면서 말했다.
“ 위 주군께서 안북장군(유준)에게 성의를 보였습니다.
잠깐 나오셔서 저를 보시지요.
나는 성을 공격하지 않고 있는데
어찌 방어하느라고 백성들을 고생시키십니까”
위의 주군이 감귤을 요청하고 또 도박놀이기구를 빌려 달라고 하자 유준이 그대로 들어주었다. 탁발도는 답례로 아홉 종류의 소금과 북을 보냈다. 북위가 악기를 좀 빌려 달라고 하자 유의공이 전쟁터라 악기는 없다고 말했다. 탁발도는 팽성을 공략했으나 쉽게 무너지지 않자 팽성을 그대로 두고 남하했다. 곳곳에서 북위군이 유송군을 이기고 내려갔다. 황급한 유송 황제는 방위군들을 다 불러들였다. 그리고 팽성을 지원하기 위해 장질에게 1만 여명을 주어 보냈지만 도중에 북위군에게 처참하게 패배하여 장질은 700여 패잔병을 이끌고 심박이 충실히 수비하고 있는 우이로 피신해 들어갔다.
<44> 탁발도의 혼인요청(AD450)
탁발도의 대군은 과보산(강소성 육합)까지 내려왔다. 수도 건강과는 강을 사이에 두고 지척지간이었다. 장강물을 마시면 탁발도가 죽는 다는 흉흉한 소문이 껄끄러워 직접 하북의 물을 싣고 다녔다. 탁발도는 황제에게 낙타와 명마를 선물했다. 유의륭은 진미와 명주를 답례로 보냈다. 주변에서는 독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고 말리자 탁발도는 대꾸하지도 않은 채 손자를 들어 유송 사신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 내가 멀리서 이곳까지 온 것은 공명을 위함이 아니요.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고 백성을 쉬게 하며
영원히 혼인관계와 원조관계를 맺기 위함이요.
송이 만약 딸을 주어 내 손자며느리로 삼게 한다면
나도 무릉왕(유준)의 딸을 처로 삼게 할 것이며
단 한 마리의 말도 남쪽을 돌아보지 않게 할 것이요.”
사신 전기가 돌아와 들은 대로 말하였다. 유송 조정에서는 혼인문제를 가지고 의논했다. 다른 신하들은 모두 찬성했는데 강담 만이 반대했다.
“ 융적은 친애함이 없어서
화혼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태자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 지금 세 왕(유의공, 유준, 유삭)이 험한 전선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어찌 딴 소리를 한단 말입니까?”
태자 유소는 나오면서 측근에게 강담을 세게 밀어젖히게 하여 크게 다칠 뻔하였다. 유소는 나중에 황제에게 말했다.
“ 북벌이 실패하여 치욕으로 남았습니다.
강담과서담지의 목을 베어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유의륭이 말했다.
“ 북벌은 나의 뜻이었다.
강담과 서담지는 이의가 없었을 뿐이다.”
이일로 태자는 서담지와 강담과의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고 북위와의혼사도 성사되지 못했다. 그 다음해(AD451) 제도군사 유의공은 확오(산동성 치평)를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왕현모를 소환했다. 탁발도는 심박과 장질이 지키고 있던 우이를 포위하고 30일 동안이나 집중 공격을 퍼부었지만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유송군대가 북위의 퇴로를 차단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게다가 북위군대 내에서 역병이 돌았다. 북위군은 서둘러 북쪽으로 돌아갔다. 북위군의 공격을 잘 막아낸 장질과 심박은 서로 공을 떠넘겼다. 이번 패전으로 원가의 치는 퇴색되기 시작했으며 책임을 물어 태위 유의공은 표기장군, 진군장군 유준은 북중랑장으로 강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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