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경제정책의 비극적 요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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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이기자면서 일본을 그대로 흉내 내는 거시정책 기조
우리는 지금 외형상으로 일본과 첨예한 갈등을 보이고 있다. 2019년 10월 22일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수십 년 동안 못해왔던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국산화와 수입 다변화에서 불과 100일 만에 의미 있는 성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라고 최근 일본과의 마찰에서 긍정적인 성과를 냈다는 점을 강조하기까지 하였다.
실제로 일본과의 갈등은 여러 모로 활용되고 있다. 국민 결집을 이끌어 내는 수단이 되고 있고, 진정한 경제적 독립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새로운 경제 비전을 제시하는 데에도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는 최근의 경제 상황 악화의 핑계거리로도 이 갈등을 활용하고 있다. 사실 이웃 나라와 갈등하고 경쟁하는 것이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의 경제상황과 그에 대처하는 정책당국의 전략을 보면 한일갈등의 긍정적 측면과는 다른 비극적 요소를 담고 있는 듯하다. 일본을 이기자면서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일본을 그대로 흉내 내는 분야가 있다. 바로 최근의 거시경제정책 기조이다.
10월 24일 3/4분기 경제성장률 속보치가 발표되었다. 3/4분기 전기대비 경제성장률은 0.4%로 추계되었다. 지난 분기의 1%에 비하면 대폭 낮아진 것이다.
이에 따라 금년 중 경제성장률이 2%를 밑돌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금년 중 경제성장률이 2%가 되려면 4/4분기 중 대략 0.9% 이상 성장하여야 한다. 이는 작년 4/4분기 중 전기대비 성장률이 0.9%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년 4/4분기 중 그 정도로 성장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정부 재정지출의 효과를 더 이상 기대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3/4분기 성장률 둔화는 정부에 의한 성장률 지지 효과가 한계에 이른 것을 반영하고 있다. 관련 예산의 조기 집행으로 향후의 재정 집행 여력은 크지 않다. 정부 지출 증가세는 2/4분기 1.2%에서 3/4분기 0.2%로 대폭 축소되었다. 민간 지출이 획기적으로 늘어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4/4분기 경제성장률이 대폭 높아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금년 중 경제성장률은 2%를 밑돌 것이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올해 2% 경제성장률 달성은 ‘이미 물 건너 갔다’
사실 2% 수준의 경제성장률 달성 여부는 큰 의미가 없다. 비록 언론에서는 심리적 마지노선이라고 하지만 우리 경제의 실상은 이미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다. 우리 경제는 성장률이 추세적으로 하락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다음의 왼편 그림에서 보듯이 2010년대 3% 대의 성장률 수준으로 하락하였고 최근 들어 2% 수준으로 하락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경제성장률이 더욱 하락할 것으로 우려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우리 경제의 실상으로서 이와 같이 경제성장 하락세가 본격화되고 있는 것을 첫 번째로 꼽아야 하겠다.
이에 더하여 최근 경제성장의 내용으로부터 우리 경제의 실상이 더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민간경제의 활력이 극히 침체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성장에 대한 기여도를 경제주체별, 즉 민간과 정부를 구분하여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 위의 오른쪽 그림이다. 붉은 막대그래프가 민간의 기여도를 나타내고 초록 막대가 정부의 성장 기여도를 표시하고 있다. 2018년 이전에는 민간의 성장 기여도 확실히 높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정부의 성장 기여도가 월등히 높은 반면 민간의 성장 기여도는 극히 낮다. 이 지표로 보면 최근 민간 부문의 경제활동은 거의 성장세를 멈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 성장 기여도 높아져 민간 부문의 경제활동은 거의 “정체(停滯)” 수준
따라서 현재의 경제성장률 2%는 실상에 비하면 높다고 해야 하겠다.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활동을 제외하여야 실상이 보인다. 일시적인 재정지출 확대를 통해 높게 나타난 경제지표를 우리 경제의 실상으로 인식하여서는 안 된다. 경제의 바탕을 형성하는 기저 요인이 곧 우리 경제의 실상인 것이다. 현재 민간 부문의 경제 활력 침체가 우리 경제의 실상으로 인식하여야 것이 두 번째 사안이다.
정책당국은 경제성장률이 이와 같이 낮아질 것으로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부터 종전 전망 수준의 경제성장률에 이르지 못할 가능성을 언급하는 등 당국자들의 언변을 통해 그 징후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지난 7월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서 경제전망치를 소폭 하향 조정하기도 하였다. 한국은행도 지난 7월의 경제전망에서 전망치를 하향 수정하였고, 다음 달로 예정된 새로운 전망에서도 추가적으로 더 하향할 가능성이 높다. 3/4분기 경제성장 속보치가 7월 전망 당시 예상한 것보다 훨씬 낮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여러 사안들을 종합하면 정책당국도 우리 경제의 실상을 어느 정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적극적 재정정책과 이완적 통화정책을 향후 정책기조로 삼은 듯하다. 정부는 513조원에 달하는 내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는 올해에 비하면 9% 이상 늘어난 규모로서 확장적 재정기조라고 평가할만하다. 그리고 한국은행은 지난 10월 16일 정책금리를 인하한 데다 금융시장에서는 앞으로 한국은행이 정책금리를 추가 인하할 가능성을 시사하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초저금리시대가 전개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거시경제정책 기조가 1980년대 후반 일본의 거시경제정책을 닮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비극적 요소가 숨어있다. 일본을 이기겠다고 하면서 일본이 장기불황으로 가는 데 결정적인 실수를 한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최근 거시경제정책 당국이 경제 사안을 다루는 것을 보면 너무 단순하다는 생각이 든다. 거시경제지표들이 당초 전망이나 예상과 달리 진행되면 천편일율적, 기계적, 도식적 대응을 반복하고 하고 있다. 경기가 하강하면 거시정책수단을 동원하여 대응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거시경제정책을 만병통치약(one-size-fits-all approach)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일부 당국자는 이러한 정책의 당위성이 교과서에도 나온다고 강변하고 있다.
국제무역환경 악화를 확장적 거시정책으론 극복 못해
하지만 이상적인 거시경제정책은 예술에 가깝다. 감안해야 해야 할 사안들이 많고 그 효과가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등 예민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고급” 교과서에서는 경기가 나쁘다고 무작정 확장적 거시경제정책을 펼치라고는 하지 않는다. 경기 둔화나 침체의 원인을 진단하고 평가하라고 권고한다. 공급 충격 등에 의해 야기된 불경기라면 그 원인적 처방을 내리거나 부작용을 줄이는 대응 전략을 동원하라고 한다.
수요측면의 요인에 의한 불경기라 하더라도 일시적인 경우에만 거시경제정책 수단을 동원하여야 한다고 본다. 만일 구조적 장기적 충격 형태의 수요 요인이라면 그 영향을 수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리고 사안에 따라서는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적절히 구분하여 사용하기를 권하고 있다. 결론은 표면적인 현상보다는 기저에 흐르는 요인들을 보고 적절한 수단을 개발하여 대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 실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지금의 불경기는 어떤 요인으로 초래되었는가? 이와 같은 의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구체적인 경제정책 수단을 동원하기 이전에 선행적으로 행하였어야 할 과업이었다.
지금이라도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책 집행의 효율성 등을 높이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절차라고 보면 된다. 다만 구체적인 원인 등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분석이라면 수용되고 관련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이하에서 필자가 제시하는 견해도 그 중의 하나일 수 있다.
우리 경제 성장률이 큰 폭으로 낮아진 것은 2010년대 중반에 이미 한차례 겪은 것이다. 앞의 그래프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최근 들어 경제성장률이 추가적으로 더 낮아지고 있다.
최근에 경제 성장률이 둔화된 원인으로는 미중통상마찰 등과 최근의 한일갈등이 거론되고 있다. 많은 당국자들조차도 이러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만일 이 견해가 옳다면 확장적 거시경제정책을 동원하여야 하는가? 그 답은 결코 “아니다”이다. 국제무역환경의 악화로 인한 문제를 내수 확장적 대책으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최근의 거시경제정책기조가 1980년 후반 일본의 거시경제정책과 유사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80년대 당시 세계 최강의 경쟁력을 자랑하던 일본 경제는 미국으로부터 통상압력을 받고 통화협력 방안으로서 플라자 합의(Plaza Agreement)를 맺고 엔화 환율을 고평가하게 된다. 이 결과 수출이 감소하였고 그 충격으로 국내경기가 둔화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일본은 통화공급을 확대하는 등 확장적 통화정책을 시행하여 내수 진작을 도모하였다. 초기에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부동산 버블을 야기하였고 결국 1990년대 초 세계적 불경기가 오면서 일본의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소위 “잃어버린 20년”의 장기불황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경기침체의 근본 원인은 우리나라 ‘산업 경쟁력의 약화’
사실 우리 경제의 근본적 어려움은 수출 부진에 기인하고 있다. 최근의 경기 둔화뿐만 아니라 2014년 이래 미진한 경기회복도 수출 부진에 따른 결과였다. 중국 산업의 경쟁력이 우리를 추월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근래 불경기에는 미중무역마찰이라는 이례적 요인보다는 우리 산업의 경쟁력 약화라는 근본적 요인이 숨어 있는 것이다. 즉 경쟁력 약화, 생산성 향상 지연 등의 문제가 우리 경제의 또 다른 실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정책당국자라면 필히 인식하고 있어야 할 사안이었다.
이러한 진단 없이 경기둔화에 대응하여 기계적으로 추진한 확장적 거시경제대책은 효과가 없다는 사례는 최근에도 있었다. 박근혜 정부는 경기활성화를 위해 금융자금 공급 확대 및 부동산 거래 활성화 등을 도모하였으나 우리 산업의 국제경쟁력 회복과는 무관하게 부동산 가격 상승이라는 부작용만을 야기하고 말았다.
최근의 경기부진이나 불경기 문제를 해결하는 데 확장적 거시경제정책은 결코 바람직한 수단이 아니다. 마땅한 정책 수단을 별도로 강구하지 않은 채 지금과 같은 확장적 거시경제정책 기조를 계속 밀고 나간다면 과거 일본의 전철을 밟게 될 공산이 있다는 점을 명확히 인시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거시경제정책 이외의 정책수단을 개발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종래에는 환율을 통해 대외부문 교란을 어느 정도 차단하고 가격 경쟁력도 확보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여의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경쟁력 약화 등에 대응하기 위한 R&D 전략, 신기술정책, 4차 산업혁명의 가속화 등의 산업정책적 수단들을 폭넓게 모색하고 일관되게 추진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울러 정책 신뢰도 유지를 위한 체계적 전략도 개발하고, 부동산 가격 앙등 등 불건전 경제 현상의 방지와 같은 경제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한 노력도 병행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민간의 적극적 능동적 경제활동을 유인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을 찾는 일도 시급한 과제이다. 최근의 불경기에 대응한 정책 과제를 찾는다면 지금과는 다른 수많은 대책들을 발굴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지금 우리 경제는 장기불황에 진입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해있다. 앞으로 불행한 경제 상황에 직면하는 일을 기필코 피해야 한다. 지금 이대로 가면 오히려 장기불황에 진입하는 시기가 앞당겨질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야말로 거시경제정책의 비극이 아니겠는가.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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