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의 나무 사랑 꽃 이야기(48) 살구나무는 억울하다 본문듣기
작성시간
관련링크
본문
살구나무는 요즘 억울합니다.
지금 한창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데, 매화나무에게 봄소식을 제일 먼저 전하는 역할을 빼앗겨 버려서 그렇고, 벚나무에게 화사한 진짜 봄이 우리 곁에 내려앉았음을 알리는 역할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갈함이나 화려함에서 매화, 벚꽃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데도 그저 중간에 피기 때문에 사람들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SNS에서조차도 살구꽃은 이런 이유로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억울함은 또 있습니다. 필자가 먹어 본 경험으로는 살구 열매도 훌륭한 맛을 지니고 있는데도 조금 크게 달리는 복숭아와 자두의 물기 풍부한 단맛에는 못 미치고, 비슷한 크기로 달리는 매실이 가지는 여러 가지 쓸모에도 (술, 우메보시, 매실차 등) 못 따라가기 때문에 그 열매의 가치도 그만 중간에 끼어 버린 신세인 셈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살구나무는 공원이나 아파트 단지의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공간에서 심겨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 단골로 심어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아파트 단지에 사는 주민들도 눈치채지 못하는 수가 많고 공원의 산책객들도 그만 놓쳐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옛날에는 그렇게 괄시받는(?) 신세는 아니었나 봅니다. 그 사실은 온 국민의 애창곡 ‘고향의 봄’이 증명하고 있지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복숭아꽃 피는 골짜기 혹은 시골 마을의 이름으로 흔히 복사골이란 말이 있었듯이, 살구꽃 마을 즉, 행화촌(杏花村)이란 조금은 연정이 꽃 피는 곳을 이르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과객들이 술 한 잔 걸치는 동네란 뜻으로 쓰인 셈이지요.
그런가 하면 오래 된 살구나무 목재는 나름 단단해서 그런 목적의 단단한 나무 재질의 물건을 만드는 데 종종 쓰였다고 합니다. 제가 항상 참고로 하는 나무백과 세 권을 쓴 원로 수목학자 임경빈 선생님에 의하면 살구나무를 벤 뒤에 물속에 오래 담가두었다가 다듬이돌 방망이, 목탁 등을 만드는 데 썼다고 합니다. 살구나무로 만든 목탁이 매우 청명한 소리를 낸다고 임 선생님은 강조합니다.
그나저나 살구꽃은 참으로 묘하게도 매화꽃과 벚꽃의 중간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술이 다소 긴 모습은 매화의 특성을 온 가지에 화려하게 매달리는 모습은 벚꽃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맘 때면 이 세 꽃을 구분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글들이 SNS에 넘쳐나게 됩니다. 필자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꽃자루의 길이를 기준으로 삼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매화는 가지에 딱 붙은 듯 보일 정도로 짧고 꽃자루가 제법 긴 벚꽃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성질이 더 드러나는데 살구꽃은 또다시 그 중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살구나무는 잎 모양조차도 매화나무와 벚나무의 중간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매화가 훨씬 더 짧은 둥근 모양이고 벚나무 잎이 조금 더 긴 타원형이라 한다면 살구나무 잎은 그 중간쯤 되니까요. 살구나무가 이렇게 어중간한 중간 모습을 하고 있으니 지금 다소 천대 받는 억울함도 자신이 사서 받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살구씨의 알맹이 즉 행인(杏仁)은 천식에 매우 좋다고 알려져 있는데 때로는 이 한자 행자를 살구나무와 공유하는 은행나무의 씨앗 알맹이도 천식에 좋다고 하니, 묘하게도 다른 나무의 씨앗이 같은 이름으로 같은 약재로 쓰인 셈입니다.
궁궐의 우리 나무를 쓰신 박상진 선생님은 이런 살구나무 씨앗의 효능을 더욱 강조하면서, 과거에는 그 씨앗이 거의 만병통치약으로 간주되었다고 전합니다. 박선생님은 중국 오나라의 명의 동봉이란 사람이 환자들에게 병을 낫게 해주는 대가로 살구나무를 심게 해서 (중환자는 다섯 그루, 가벼운 환자는 한 그루 하는 식으로) 살구나무 숲을 만든 뒤에 그 열매를 곡식과 교환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 숲을 ‘동선행림’이라 불렀는데 진정한 의술을 펴는 의원을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고 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