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의 나무 사랑 꽃 이야기(47) 누구부터 새싹을 틔울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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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蘇生(소생)하는 봄’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어울리는 계절입니다. 필자도 이미 이 난을 통해 봄꽃 소식을 두 번이나 전했습니다만, 진짜 만물이 소생하는 모습은 아마도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돋아나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필자가 나서는 새벽 산책길 곳곳에서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으니 참으로 만물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지요.
묘하게도 이른 봄에 피는 봄꽃들은 흔히 이런 파릇파릇한 새싹들을 생략하고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필자가 다룬 봄꽃들인 매화, 영춘화, 산수유, 생강나무가 다 그렇고 몇 주 후에 모두의 가슴을 설레게 할 벚꽃도 그렇습니다. 그리고는 그 꽃들이 시들 때 쯤 되어 파란 새싹 잎을 내미는 것이 보통이지요. 물론 그렇지 않은 꽃들도 있습니다만.
필자가 나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풀꽃으로도 관심이 옮겨가면서 온갖 식물들의 생명 활동의 변화에 주목하기 시작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처음에는 나무와 풀꽃들을 구분하는 데 초점을 맞추다가 어느새 나무와 풀들 즉, 식물들의 생명 활동 자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필자는 식물들의 생명 활동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자손을 번식하기 위한 생식 활동입니다. 식물들은 거의 대부분 (소수의 포자 식물들을 제외하고는) 꽃을 자손 퍼뜨리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잎보다도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나 풀들은 다소 성미가 급한 셈입니다. 자손 퍼뜨리는 일부터 하고 느긋하게 자신의 삶을 영위하려는 셈이니까요.
두 번째는 식물 자신들은 물론 지구의 모든 생명들을 먹여 살리는 영양분을 만드는 생산 활동입니다. 그 생산 활동의 주된 도구가 바로 잎이지요. 대부분 식물들의 잎을 초록색으로 보이게 하는 엽록소를 이용해서 뿌리에서 길어 올린 물과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결합하여 포도당을 만들어 내는 광합성을 하는 거대한 생산 공장을 가동하는 셈이지요. 이렇게 생산된 포도당 등의 영양분은 식물 자신의 성장과 생존에 사용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초식동물을 먹여 살리고 그 다음으로 육식동물, 그리고 우리 사람과 같은 잡식동물들까지 먹여 살리는 기본 영양분이 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록색 잎이 나는 것을 보고 우리 조상들이 ‘만물이 소생한다’라고 일컬은 것은 참으로 어울리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만물 소생의 상징인 잎들이 곳곳에서 피어나고 있는 계절입니다. 엄혹한 겨울을 지나 이제 막 생명 활동이 기지개를 펴고 있는 셈이지요. 그래서 필자는 과연 누가 먼저 새싹을 틔울까에 관심을 가지고 주변을 살펴보았습니다.
필자가 내린 결론은 ‘태양 빛을 받기가 힘든 개체들부터 잎을 피우는 경향을 보인다’입니다. 즉, 땅바닥에 붙어서 생명 활동을 하는 풀부터 – 그것도 키 큰 풀들은 뒤에 잎을 내미는 경향 – 잎을 내밀기 시작하고, 키큰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버려 풀들이 자라기 어려운 산에서는 키 작은 灌木(관목)들부터 잎을 내밀기 시작한다는 것이지요. 하늘 가장 가까이까지 자라는 키 큰 喬木(교목)들은 대부분 느긋하게 기다리다가 제법 봄이 무르익은 이후부터 잎을 내밀기 시작합니다. 이런 모습은 어쩌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는 선입관에서 벗어나는 순서인 셈입니다. 가장 튼튼해 보이는 키 큰 나무들이 추위를 더 잘 견딜 터이니 더 이른 봄부터 잎을 내밀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아직 추위가 덜 가셔서 새벽에는 서리가 내리는데도 여린 풀들이 그 추위를 뚫고 생명 활동을 시작하니까요.
최근 새벽 산책길에서 – 특히 햇볕이 잘드는 양지바른 곳에서 – 쑥, 씀바귀, 냉이, 갈퀴덩굴 등이 새싹을 내민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관목들 중에서도 가장 여린 가지를 가진 조팝나무가 먼저 초록색 조그만 잎을 내민 모습도 볼 수 있었지요.
산에서는 아직 뚜렷하게 잎눈을 벌리고 초록색 잎을 내민 녀석들을 만나지 못했지만, 작년의 경험에 미루어보면 높은 나무들 아래에서 자라는 관목들인 때죽나무, 쪽동백나무, 노린재나무 등이 먼저 앙증맞은 모습의 잎들을 펼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조금만 잘 생각해 보면 키 작은 관목들이 자신의 체력이나 체격 면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점을 무릅쓰고 일찍부터 생명 활동을 시작하는 이유는 매우 간단한 셈입니다. 가능한 한 일찍 잎을 펼쳐서 교목들이 하늘을 온통 가리기 전부터 햇볕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서 광합성을 시작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관목들이 잎을 펼치는 모습에서 필자가 관찰한 또 다른 중요한 특징 하나는 이들이 자신들이 클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에 다다르면 가지를 가능한 한 사방으로 마당에 깔아놓는 멍석처럼 펼쳐놓고 그 위에 잎들을 잔뜩 매단다는 것인데, 바로 이 특징도 교목들 사이로 간간이 비쳐오는 햇빛을 가능한 한 한 점이라도 더 받아서 광합성을 하려는 몸부림의 일환이라고 생각됩니다. 위에서 언급한 때죽나무, 노린재나무 등의 아주 작은 관목은 물론 쪽동백나무, 단풍나무 등의 중간 교목들도 이런 모습으로 잎을 펼치고 있는 모습을 계속 보아 왔습니다.
‘햇빛을 향한 몸부림’, ‘삶을 위한 치열한 경쟁’ 이런 모습은 일견 평화로워 보이는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의외의 생존경쟁 현상입니다. 질서를 존중하는 우리 인간 세계에서 그런 경쟁의 원리를 무시하는 일이 더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작으니까 무조건 도움을 받아야 한다’ 라는 인식이 점점 더 팽배해지고 있는 지금의 세태를 바라보면, 키가 작다는 자신들의 약점을 이겨내려는 풀이나 관목들의 처절한 노력을 인간들이 본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런데 예외 없는 법칙이 없다고 하듯이 이런 관목, 교목의 생명 활동 순서에서 벗어나는 교목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작년 이맘 때부터 코로나 사태로 인해 수영장이 문을 닫아 버리는 바람에 새벽 수영 대신에 새벽 산행을 다니기 시작한 필자가 오르는 가까운 거의 모든 산에서 이 나무를 발견하고는 그 주인공이 어떤 나무로 나타날지 궁금해 하곤 했습니다. 묘하게도 벚나무 사촌 쯤 되는 귀룽나무가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이 나무는 아직 관목들도 초록색 잎을 다 내밀지 않은 시기에 벌써 잎을 내밀기 시작합니다. 앞으로 열흘 정도가 지나면 온 몸을 초록색으로 물들인 풍성한 모습으로 바뀔 것인데, 참나무, 서어나무, 팥배나무, 물오리나무, 단풍나무 등의 다른 교목들이 아직도 앙상한 나목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산 속에서 이채롭게 눈에 띄게 되겠지요. 필자의 친구나 지인들도 이 나무를 발견하고는 종종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지난 수요일 오른 남산에서 필자도 올해 처음 귀룽나무가 잎을 펼칠 준비를 마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 산을 오르신다면 귀룽나무가 어디 있는가 살펴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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