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14 : 모래처럼 섰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하(夏)나라 혁련창(I) 본문듣기
작성시간
관련링크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41) 탁발사 사망(AD423)
거대한 북위군이 여러 방면에서 남쪽으로 쳐들어오자 유송은 혼란에 빠져 들었다. 조정에서는 채곽을 이부상서로 임명하였는데 채곽은 중서령 부량에게 이렇게 말했다.
“ 선발하는 일에 관해서는 저한테 전권을 주실 것이고
간섭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면 저는 직책을 받을 수 없습니다.“
황당하다고 생각한 부량은 사공 서선지와 그 문제를 놓고 상의했다. 서선지는 부량에게 이렇게 말했다.
“ 황문시랑과 녹상서사 이하만 다 채곽에게 맡기십시다.
그 이상은 우리가 같이 상의하여 결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부량이 나가 채곽에게 중신회의 결정사항을 알려주자 이렇게 외치며 돌아갔다.
“ 나는 서간목(서선지 어릴 때 이름)을 위해
종이 끝에 서명만 할 수는 없읍니다.“
6세기 남조 양나라 역사가 심약은 채곽이 인선의 일을 통째로 맡기라고 무리하게 요구한 것은 혼란한 그 시기에 직책을 맡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평가하면서 그런 판단을 ‘원대하다’고 말했다.(AD423)
북위와 유송의 전투가 치열하게 진행되던 AD423년 겨울(12월6일) 탁발사가 병환으로 죽었다. 나이가 32세였다. 사흘 뒤에 탁발도(AD408-AD452)가 즉위했다. 이 사람이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 태무제 세조다.
(42) 유의부 폐위와 문제 유의륭 등극(AD424)
유송을 이어받은 황제 유의부는 과연 무능하고 무례하며 황음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의치 않고 놀이와 주연에 탐닉했다. 범태와 같은 은퇴한 중신이 그런 그를 깨우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편 유의부의 한 살 아래 동생 여릉왕 유의진은 총명하고 또 문장을 사랑했으나 좀 경솔하고 겁이 많은 나약한 사람이었다. 한 번은 평소에 가까이 지내는 태자(유의부)궁에 근무하는 사령운과 안연지와 혜림도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 만약에 내가 뜻을 얻게 된다면
반드시 사령운과 안연을 재상으로 삼고
혜림은 도독으로 임명할 것이요.“
사령운이란 비수대전의 대승장 사현의 손자지만 성격이 삐뚤고 오만했으며 평소 자신의 능력에 비해 맡겨진 직책이 낮다고 불평을 늘어놓던 사람이었다. 안함 또한 동진 성제 시절의 중신 안함의 증손자로 술을 좋아하고 방종한 사람이었다.
사공 서선지는 유의진이 이런 부랑배들과 어울리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이 때 서선지는 매우 부족한 유의부 대신 동생 유의진으로 황제를 바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유의진이 사령운 등과 교제를 못하도록 사람을 보내 설득을 시켰다. 그래도 유의진이 행동을 고치지 않자 서선지는 사령운과 안연을 지방 태수로 내보내 버렸다. 유의진은 그런 속내도 잘 모른 채 계속해서 조정의 정치를 비난하고 무리한 요구를 그치지 않았다. 서선지 등은 유의진 옹립계획을 접고 황제를 부추겨 유의진의 죄악을 열거하면서 폐서인 시켜 귀양을 보내버렸다.
서선지는 광릉(강소성 양주)에 주둔하고 있는 또 다른 고명대신 단도제를 건강으로 불렀다.그가 군권을 가지고 있었고 또 명성이 전국에 떨치고 있었으므로 그의 동참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서선지는 서둘러 건강으로 들어 온 단도제와 고명대신 사회에게 황제폐립의 계획을 밝혔다. 단도제는 그 날 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잠을 잘 잤으나 사회는 밤새 잠을 못이루며 뒤척였다. 황제 유의부는 예전처럼 황궁안 뜰에다 상점을 벌여놓고서 측근들과 직접 장사하는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서선지는 이른 새벽 황제 유의부를 체포하여 태자궁에 유폐시키고 영양왕으로 강등시킨 다음에 오나라로 귀양을 보냈다가 사람을 보내 시해했다. 조정에서는 누구를 후사로 삼을 ㄱ서인지 의논을 거쳐 셋째 아들 유의륭을 황제로 세웠다. 이 사람이 유송 태조 문제다.
(43) 하나라 내분과 혁련창 (AD424)
유송의 유유가 AD422년 죽고 북위 탁발사가 AD423년 죽으면서 주군의 사망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하나라도 후계문제로 시끄러웠다. 혁련발발은 장자인 태자 혁련괴를 폐위하고 그 대신 어린 혁련륜을 세우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자 혁련괴는 7만 군사를 발동하여 혁련륜을 공격했다. 3만의 혁련륜 군사는 고원지역에서 크게 패하였고 혁련륜도 전사하고 말았다. 혁련륜이 혁련괴에게 죽자 혁련륜의 형인 혁련창이 1만 군사로 혁련괴를 습격하여 죽이고 그의 무리 8만 5천을 흡수한 뒤 통만으로 철수했다. 하나라 주군 혁련발발은 반란을 일으킨 혁련괴를 성공적으로 제압한 혁련창을 대견해 하여 태자자리에 앉혔다.(AD424)
(44) 혁련발발의 사망(AD425년)과 북위의 1차 하나라 공격(AD426)
AD423 서진의 걸복치반은 북위에 조공하기로 하고 하를 협공할 계획을 세웠다. AD425년 8월 혁련발발이 45세로 사망하면서 하나라는 혁련창이 황제가 되었다. 북위 탁발도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다. AD427년 북위는 하나라를 공격하기로 했다. 북위주군 탁발도가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 혁련과 연연 중 어디를 먼저 공격해야 하는가?”
여기서 연연이란 유연(柔然)이 지배하는 지역으로 내몽고 북쪽 지금의 몽골지역에 웅거하던 흉노족 무리를 말한다. 장손숭과 장손한과 해근이 답했다.
“ 혁련은 토착민이니 해를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벌레 같은 연연은 몰려다니면서 약탈을 자행하는 족속입니다.
쫓아가 사로잡되 못 잡더라도 가축을 뺏아오면 군비를 보충할 수 있습니다.“
태상 최호가 반대하면서 나섰다.
“ 연연은 새무리 같아서
대병으로 가면 따라가도 잡기 힘들고,
가변운 경병으로 가면 적을 제압하기 충분치 않습니다.
혁련은 토지가 작고 정치와 형벌이 잔인하여
민심이 이반 되어있습니다.
사람과 신이 모두 포기한 곳이니 의당 그곳을 먼저 정벌해야 합니다.“
상서 유결도 우선 후연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주군 탁발도는 하를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10월 수도 평성(산서성 대동)을 출발해 통만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추운 겨울에 출병하였으므로 통만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주민 1만여 가구를 빼앗아 돌아왔다.그러나 장안방면으로 나아간 해근은 AD426년 12월 장안을 지키던 하나라 수비군 혁련을두와 혁련조흥을 깨뜨리고 장안을 접수하는데 성공하였다.
(45) 북위의 2차 하나라 공격과 통만 함락(AD427)
통만을 정복하지 못한 탁발도는 하나라 주군 혁련창이 장안을 수복하기 위해 혁련정과 2만 군사를 남하시킨다는 말을 듣고 다시 하를 정복할 생각을 세웠다. 장안에서는 북위의 해근과 하의 혁련정이 대치하고 있었다. 탁발도는 그 틈을 타서 통만을 기습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장손한에게 기병 3만, 탁발소에게는 보병 3만, 탁발복진에게 보병 3만, 그리고 하다라에게 기병 3천을 주어 척후를 맡겼다. 탁발도는 발린산(내몽고 준격이기)에 도착하자 기병 3만을 가지고 배나 빠른 속도로 통만으로 진격했다. 여러 신하들이 통만의견고함에 비추어 볼 때 3만 가지고는 함락을 시킬 수가 없다고 말렸다. 탁발도는 공성전략이야말로 가장 낮은 수단의 전략이며 기습전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공격법이라고 말하면서 일축해 버렸다. 그리고 통만 부근에 가서는 골짜기에 군사를 숨기고 틈이 올 때까지 매복작전을 폈다.
하나라에서 적자옥이 항복해 와서 이렇게 말했다.
“ 혁련정은 지구전을 쓸 생각입니다.”
장기전은 북위에게 불리한 것은 사실이었다. 집이 2천리 먼 데다가 큰 강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탁발도는 유인하기 위해 거짓 퇴각작전을 폈다. 그리고 죄를 지어서 하로 도망간 병졸에게 이런 풍문을 퍼뜨리게 했다.
“북위나라 군대는 식량이 고갈되었고
지원 보병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하나라 주군 혁련창은 그 풍문을 국제 믿었다. 3만 군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북위를 공격했다.(AD427년 6월2일) 북위의 장손한이 탁발도에게 하의 병사가 예리하니 조심하라고 하자 탁발도가 이렇게 대꾸했다.
“ 멀리까지 와서 도적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제 저들이 나오는데 내가 다시 도망가고 피한다면
저들 사기나 북돋울 뿐 우리는 사기가 떨어진다.“
환관 조예도 비바람이 불어 징조가 나쁘니 피하자고 권했지만 탁발도는 듣지 않았다. 최호가 말했다.
“ 무슨 소린가 천리를 달려와 적을 제압할 계획을 세웠는데
하루 아침에 전략을 바꿀 수가 있는가?
적들은 전진하는 것에만 취해 뒤를 수습할 생각을 못하고 있으니
매복으로 습격해야 할 것이고
바람 또한 사람의 이용하기 나름이지
어찌 변하지 말라는 법이 있더냐?“
탁발도가 크게 칭찬하며 말했다.
“ 훌륭한 말씀이시요!”
혁련창의 군사와 맞닥친 탁발도가 넘어져 추락하여 거의 잡힐 뻔 했지만 먼 친척 탁발제의 도움으로 피할 수가 있었다. 화살도 여럿 맞았지만 끝까지 분투하여 하나라 승세를 뒤집어 엎고서 승기를 잡았다. 도망가던 하의 주군은 통만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상규(감숙성 천수) 쪽으로 도망갔다. 탁발도는 미복차림으로 통만성 안으로 잠입했다. 하나라 군대가 성문을 닫는 바람에 갇힌 꼴이 되었지만 탁발도는 오히려 궁성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하나라 군대가 패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궁성에서는 상서복야 문지가 주군의 모후, 즉 혁련발발의 처를 업고 성 밖으로 도주했다. 이제 통만성 안에는 하나라의 신하도 군대도 거의 다 숨어버린 무정부 상태가 된 것이다. 6월3일 탁발도는 하의 군신과 왕족 1만여 명을 체포하였으나 태사령 장연과 서변은 그대로 재임명해서 관용을 보여 주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