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14 : 모래처럼 섰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하(夏)나라 혁련창(H)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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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36) 혁련발발이 은사(隱士) 위조사를 죽임(AD419)
하나라를 세우고 황제자리에 오른 혁련발발은 그래도 들은 것이 있어서 숨어있는 인재를 등용하여 나라를 튼튼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후진시절부터 명망이 있던 숨어있는 은사 위조사를 징소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내성적이고 겸손하며 혁련발발을 어려워했다. 화가 난 혁련발발이 심하게 그를 질책했다.
“ 내가 선비를 등용하려고 너를 불렀는데
너는 나를 못된 무리로 생각하고 나를 꺼리는구나.
요흥에게도 절을 하지 않던 네가
나에게는 어찌 절을 하느냐?
살아있는 나도 황제로 대접하지 않는다면
내가 죽으면 어쩔 참이냐?“
마침내 위조사를 죽였다. 혁련발발의 조급하고 과격하며 선비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잘 나타나는 사건이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혁련발발은 성격이 영리하면서도 교활 포학하고 백성을 지푸라기 보듯 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주변에 거리끼는 혐의가 있는 사람은 직접 칼이나 활로 죽였으며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눈을 뽑았고 빈정거리며 웃는 사람은 입술을 도려냈고 간언을 올리는 사람은 혀를 뽑은 다음 목을 잘랐다.
혁련발발의 신하들은 줄기차게 도읍을 장안으로 정하자고 졸랐다. 혁련발발은 이렇게 대답했다.
“ 짐이 어찌 역대 조정의 도읍지 장안을 모르겠느냐?
그러나 장안에 도읍하게 되면
강적 북위까지 거리가 100리 밖에 되지 않는 통만(섬서성 정변)이 위태롭다.
그러나 내가 만약 통만에 있으며
북위는 절대로 황하를 건너 쳐들어오지 못할 것 아니겠느냐?‘
신하들이 놀라면서 말했다
”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혁련발발은 장안에 남대를 설치하고 아들 혁련귀에게 옹주(장안지역)을 맡기고 통만으로 돌아갔다.
(37) 동진이 멸망하고 유유가 송을 건국(AD420)
지난 해(AD419) 동진 황제 안제 사마덕종을 교살하고 그 동생 사마덕문을 세웠던 58세 송왕 유유는 장안에서 물러나와 수양(안휘성 수현)에 주둔하면서 동진으로부터 선양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군웅이 그랬듯이 그런 속내를 감히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말을 꺼내는 순간 자리를 탐내는 하찮은 인간으로 전락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한 유유는 연회석상에서 신하들에게 이렇게 한탄했다.
“ 경사(수도 건강)로 돌아가 노후를 편하게 보내고 싶소.”
유유의 중서령 부량이 그 말뜻을 알아챘다. 연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불현 듯 유유의 속뜻을 알아차린 부량이 재빨리 발길을 돌려 유유의 숙소로 되돌아갔으나 이미 궁궐문은 잠겨있었다. 문짝을 급히 두드려 유유를 뵌 부량이 유유에게 이렇게 간청했다.
” 신이 잠시 도읍으로 돌아가야 겠습니다.“
유유 또한 밤늦게 다시 되돌아와 건강으로 가겠다는 그의 의도를 즉시 짐작했다.
“ 몇 명이면 되겠소?”
부량은 수십 명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유유는 흔쾌히 허락했다. 밤늦게 궁궐을 나오면서 부량은 하늘에 장성(유성)이 하늘 가로지르는 것을 보면서 신음하듯 중얼거렸다.(AD420년 초)
“ 내 평소에 천문이라는 것을 믿어 본 적이 없지만
오늘에서야 영험이 있다는 것을 알겠구나.“
부량은 건강에 도착한 뒤 얼마 되지 않은 4월 유유를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넌지시 당시 동진 황제 공제에게 선양을 귀띔했다.
공제는 전혀 놀라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 내가 바라던 바요.”
이렇게 해서 유유는 동진의 마지막 황제 공제 사마덕문의 양위를 받고 6월14일 황제자리에 올랐다. 영릉왕으로 깎아 내려진 사마덕문은 얼마 있지 않아 질식사 당했다. 이로써 사마염이 AD265년 창건한 서진은 AD310년 망했다가 AD317년 사마의의 증손자 사마예가 세운 동진이 건국한 지 103년 만에 마침내 멸망한 것이다. 역사에서는 유유를 유(남)송의 무제라고 부른다(재위: AD420-AD422)
(38) 북위 탁발사의 와병과 탁발도(AD422)
AD422년경 전 중국의 판도는 3강 2약의 구도였다. 3강이란 중원을 장악하고 있는 혁련발발의 하나라와 북경주변을 지배한 탁발사의 북위, 그리고 광대한 장강 이남지역을 관할하는 유송이다. 2약이란 AD420년 서량을 멸망시키고 장액과 주천에 웅거한 저거몽손의 북량과 AD414년 독발욕단의 남량을 멸망시키고 난주를 점령한 서진의 걸복치반이다.
하, 북위, 및 유송의 3강중에서 가장 무력이 강한 나라는 아무래도 북위였고 경제적 기반이 강한 나라는 유송이었다. 그런데 이 두 강국은 내부적으로 큰 혼란에 봉착해 있었다. 북위 주군 탁발사와 유송의 주군 유유가 모두 몸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유송이야 거의 육십 세였으므로 그렇다하더라도 탁발사(AD392년생)는 만 30세에 불과했다. 역사가들은 평소 복용하던 회춘약 한식산의 부작용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탁발사는 측근 최호에게 후계에 대해 물었다.
“ 여러 아들이 아직 어린데
나 죽은 후의 계책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최호가 이렇게 대답했다.
“ 지금 동궁(후계자)를 세우시고
현명한 신하를 좌우빈객과 친구로 삼으셔서
들어가서는 만기를 친람하게 하시고
나가서는 군사를 총괄하시게 하시면 됩니다.
장자를 세우는 것은 큰 도리이므로
성인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능력이 있는 자를 세우시기로 한다면
거꾸로 앞으로 큰 혼란이 있게 될 것입니다.“
다른 신하들도 대개 같은 의견이었다. 탁발사는 장자이자 태평왕이던 탁발도를 황태자로 삼고 측근대신 장손숭과 해근과 안동을 좌필, 최호와 목관과 구퇴를 우보로 임명하여 태자를 보필하게 하였다.
(39) 유송의 유유 사망(AD422년 5월)
이 때 유송의 주군 유유도 몸이 매우 불편했다. 그러나 당시 태자였던 장자 영양왕 유의부는 소인배와 가까이 하면서 놀이와 주색에만 탐닉할 뿐이었다. 걱정을 거듭하던 영군장군 사회가 유유에게 조용히 건의를 올렸다.
“ 폐하의 춘추가 높으셔서
만세를 보존하실 생각을 굳건히 하셔야 할텐데
신기(神器, 사직을 말함)는 매우 중요함으로
재주없는 사람에게 짊어지게 하시면 안 될 것입니다.“
황상도 공감하고 있던 차라 이렇게 물었다.
“ 여릉왕(유의진)은 어떤가?”
사회가 말을 거의 가로막다시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 제가 가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회가 여릉왕에게 가자 여릉왕은 의욕적으로 정치와 병무를 이야기하려 했지만 사회는 묵묵히 대꾸도 않고 응대하지 않고서 돌아와 보고했다.
“ 품덕이 가벼우니 군주의 재질이 아닙니다.”
유유도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유의진을 도독남예,예,옹,사,진,병육주제군사로 삼아 밖으로 내보냈다. 잠깐 유유의 병이 나아지는 듯 했으나 두 달도 안되어 유유는 깊은 병으로 눕게 되었다. 태자 유의부를 침전으로 불러 이렇게 당부했다.
“ 단도제 보다는 형 단소가 뛰어나다.
서선지와 부량은 충신이라서 결코 반역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는 여러 정벌을 성공시킨 사람이어서 임기응변에 능하고
또 정세판단이 뛰어나다.
만약 일을 일으킨다면 이 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후세에 만약 어린 군주가 있게 되거든
원숙한 재상에게 일을 맡길지언정
모후가 정치에 나서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하라.“
그런 뒤 사공 서선지, 중서령 부량, 영군장군 사회, 진북장군 단도제가 고명을 받게 하고 유유가 세상을 떠났다. 재위 2년 만 59세였다. 태자 유의부가 17세 나이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자치통감 기록에 유유는 청렴하고 간결했으며 욕심이 적었다고 했다. 엄정하며 법도가 있었고 검소하여 잔치를 여는 일이 거의 없었고 또 비빈에게 가까이 가는 일도 없다고 했다. 영남지역에서 거미 실로 짠 정교한 포 1단 8장을 보내오자 되돌려 보내면서 다시는 그런 포를 만들지 말도록 명령했다.
(40) 북위의 1차 유송 공격(AD422-AD423)
병상에 누워있던 탁발사는 남쪽의 유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가 번쩍 띄었다. 이 기회에 유송을 칠 생각이 생긴 것이다. 사실 유유가 장안을 점령했을 때(AD417)만 해도 여세를 몰아 북진할 것이 두려웠던 탁발사는 서둘러 유유와 화친을 맺고 공물을 바쳐왔었다. 그러나 유유가 죽은 마당에 더 이상 화친 따위는 불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유송과의 교빙을 끊고 장안, 낙양, 호뢰(하남성 형양), 활대를 공략할 준비를 갖추었다. 최호가 나서서 강력하게 말렸다. 최호는 약 40년 전 부견이 100만 대군으로 동진을 공격하다가 실패한 비수대전(AD383)의 패배를 상기시키면서 말했다.
“ 상사를 틈 타 공격을 하시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또 성공한다손 치더라도 결코 아름답지 못한 일입니다.
먼저 사람을 보내 정중히 조문하시고
나약한 고아(유의부 지칭)가
속발하는 재해를 감당 못하는 것을 보게 한 다음
천하를 구휼하셔서 의롭다는 명성을 얻으시면
강남은 저절로 굴러 들어오게 됩니다.
지금 정벌에 나서셔도 저들 사이에 틈이 벌어져 있지 않으므로
이긴 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강한 신하들끼리 권력을 서로 다투어 변란이 일어나게 한 다음
군사를 보내면 병사를 지치지 않게 하면서도 쉽게 거둘 수 있습니다.“
병상의 북위 주군 탁발사는 이렇게 반문했다.
“ 유유는 요흥의 죽음을 틈타 후진을 멸망시키지 않았소.
나는 왜 안 된다는 말이요?“
최호가 정곡을 찔러 말했다.
“ 그것은 요흥이 죽어서가 아니고
요흥의 아들이 무능하고 서로 다투어서 그런 것입니다.
지금 강남에는 그런 불화가 아직 없습니다“
탁발사는 듣지 않았다. 군사를 일으켜 해근과 주기와 공손표에게 공격을 맡겼다. 남정을 맡은 북위 장수들 사이에 의견대립이 생겼다. 해근은 먼저 요충지 성곽을 공격하자고 했으나 최호는 강남 군사들이 수성에 매우 능하므로 먼저 땅을 점령하자고 했다. 그런 다음에 곡식과 병기를 축적하고 그런 다음에 기회를 갖추어 성을 공격하자고 했다. 그러나 공손표도 성을 먼저 공격하자고 하는 바람에 탁발사도 그렇게 결정했다.
북위군의 공략방향은 크게 네 갈래였다. 가장 동쪽 산동성 평원방면군은 숙손건이 맡았고, 업성을 공격하는 중부군은 해근이 맡았으며 공손표는 호뢰관 방면, 그리고 우율제가 가장 서쪽에서 맹진과 낙양방면으로 공략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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