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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14 : 모래처럼 섰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하(夏)나라 혁련창(E)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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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04월09일 16시5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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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21) 북위의 서쪽 정벌과 유발발의 부상(AD407)

 

AD395년 참합피에서 대승하고 또 AD397년 호타하(하북성 석가장 부근 하천)전투에서도 후연 군사를 크게 깨뜨린 북위는 후연을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은 다음 서쪽 방면으로 눈을 돌렸다. AD401년 12월 탁발규는 탁발준과 화발을 5만 군사와 함께 보내 고평(영하성 고원)의 몰혁간을 습격하도록 했다.

 

원래 북위 탁발규와 후진의 요흥은 나쁜 사이가 아니었다. 탁발규가 말 1천 필을 후진에게 보내면서 딸을 달라고 했는데 이미 탁발규에게는 후연 모용수의 손녀딸 아내가 있었다. 요흥은 자신을 속인 탁발규에 대해 내심 불쾌했는데 게다가 군대를 보내 자신의 속국인 몰혁간 영토를 공격하게 되자 양국관계가 급속하게 냉각되었다.   

 

북위 대군이 들이닥치자 몰혁간과 유발발은 일단 진주(감숙성경천)로 몸을 피했다.(AD401) 이 때 나이가 갓 스무 살을 넘게 된 유발발은 체격이 장대하고 몸가짐이 수려했으며 총명하고 언변이 매우 뛰어났다고 기록되었다. 그런 유발발을 후진 군주 요흥은 매우 아끼고 중용했다. 유발발은 요흥의 지원에 힘입어 강력한 세력을 지니게 되었다. 요흥의 아우 요옹이 믿을 수 없는 간교한 유발발을 경계하라고 귀띔했지만 요홍은 듣지 않았다.

 

       “ 세상을 구제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내가 그와 더불어 천하를 평정하려고 하는데

         어찌 그를 꺼리는가?“

 

오히려 유발발을 안원장군으로 삼아 몰혁간을 도와 고평(영하 고원)에 진수시켰다. 그리고 유발발의 아버지 유위진에게 속했던 부락민 3만을 배속시켜 북위의 침입에 대비하도록 했다. 요옹이 형님 요흥에게 한사코 유발발 등용을 반대했다.

요흥이 반문했다.

 

 “ 네가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를 어떻게 아느냐?”

 

요옹이 대답했다.

 

  “ 윗사람 받드는 것이 게으르고 

    사람을 잔혹하게 다루며

    욕심이 많고 교활하여 어질지 않습니다. 

    거취를 가볍게 여겨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을 보면

    믿을 사람이 못됩니다.

    그런 인간을 너무 총애하시니 장차 변경에서 

    걱정거리를 만들까 심히 걱정됩니다.“

 

동생이 극렬하게 반대하자 요흥은 마침내 유발발을 등용시키는 것을 멈추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유발발을 끝내 안북장군 오원공에 임명하고 여러 선비족을 통솔시켜 삭방(내몽고 항금기)에 진수시켰다.(AD407)

 

 

(22) 후진과 북위의 화해와 유발발의 대하 건국(AD407)  

 

북위 탁발규는 6년 전인 AD401년 겨울 고평을 공격할 때 사로잡힌 후진 장수 당소방을 돌려주었다. 적대관계를 풀자는 신호였다. 후진 요흥 또한 북위와 적대관계를 풀고 싶었기 때문에 좋은 말 1천 필 탁발규에게 보내면서 포로가 된 후진 장수 적백지도 돌려 줄 것을 요청했다. 탁발규가 허락했다. 요흥의 후진과 탁발규의 북위가 우호관계를 맺는 것을 절대로 용납 못할 사람이 유발발이었다. 왜냐하면 북위는 AD391년 아버지 유위진을 죽인 원수였기 때문이다. 

 

때마침 유연부락의 욱구려사륜이 종주국 북위에게 보내는 말 8천 필을 보냈는데 유발발은 가운데에서 말들을 약탈하고 욱구려사륜의 무리 3만명 마저 탈취하여 무리를 몰고 고평(고원)으로 갔다. 장인 몰혁간에게는 사냥한다고 거짓말 한 뒤 몰혁간을 죽이고 그의 무리마저도 병합해버렸다. 유발발은 마침내 후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대하(大夏)라는 나라를 건국했다. 스스로 대하천왕 및 대선우라고 하면서 도읍을 대성, 즉 통만(지금의 산서성 유림)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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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대하 유발발의 남침(AD407)

 

통만에서 대하를 건국한 유발발은 근방의 선비족 설천 등 3개 부락 함락하여 포로 약 만여명을 흡수한 뒤 곧바로 후진의 북쪽 북경인 삼성을 침범해 들어갔다. 그 전투에서 후진 장군 양비와 요석생을 사로잡고 참수했다. 유발발의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 폐하께서 관중을 장악하시려면 의당 먼저 근본을 단단하게 한 다음

    사람들의 신임을 얻으셔야 합니다.

    고평(영하성 고원)은 땅이 넓고 산천이 함하며 견고하고 또 비옥하므로

    도읍으로 정할 만합니다. “

 

유발발이 말했다.

 

   “ 경등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소.

     나의 대업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어서 병사가 많지 않고

     또 요흥이 한 시대 영웅으로 굳게 버티고 있으니

     아직은 관중을 예기할 때가 아니오.

     내가 지금 한 성만을 지킨다면

     그는 반드시 대군을 몰아서 공략해 올 것인데

     그것은 수적으로 불리한 우리가 앉아서 멸망하는 길일뿐이요.

     용맹스런 기병을 날려서 그들이 예기치 않은 곳으로 나아가서

     앞으로 오면 뒤를 공격하고

     뒤로 오면 앞을 공격하여 

     그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한다면 

     적이 몇 백만 대군이라도 감당할 수가 있소.      

     10년이 되지 않아 영북(섬서성 예천 이북)과 하동(산서성 서남부)은

     모두 우리 소유가 될 것이요.

     요흥이 죽기를 기다리면

     못 난 그 아들(요홍)은 어리석고 나약하니  

     장안은 힘들이지 않고 내가 차지할 수가 있는 것이요.“

 

 유발발은 영북지역을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요흥이 탄식하며 말했다.

 

“ 내가 황아(요옹)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이 되었구나!”

 

유발발은 남량의 독발녹단에게 혼인을 요청했다. 독발녹단이 거절하자 유발발은 기병 2만 군사를 이끌고 지양(감숙성 난주시 북서쪽 영등)을 공격하여 1만여 명을 사상하고 3만여 가축을 약탈하고 돌아왔다. 독발녹단은 유발발을 반격할 계획을 세웠다. 부하 장수 초랑이 반대하고 나섰다.

 

  “ 유발발의 군대가 엄격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읍니다.

    결코 아직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장수 하련이 반발했다.

 

  “ 유발발 잔당은 유위진 패잔병의 무리일 뿐입니다.    

    어찌 그들을 피하여 약함을 드러냅니까?“

 

독발녹단은 하련의 말을 좇아 공격에 나섰다. 유발발은 독발녹단 군사의 움직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양무(감숙성 정원현) 골짜기에 병사 매복시켜 놓고 얼음 깨고 수레를 묻어 독발녹단 군사의길을 막았다. 추격해 오는 독발녹단의 군사가 막힌 강 앞에서 허둥대는 틈을 타고 습격하여 크게 대패시켰다. 독발녹단의 장수 10 중  6-7명이 전사했고 독발녹단 홀로 도주했을 뿐 근위병은 거의 모두 체포되거나 잡혀 죽었다. 유발발은 죽은 시체를 쌓아 올려 촉루대라고 이름 붙였다. 유발발은 또 독발녹단을 지원해 온 후진 장군 장불생도 격파하고 군사 5천을 참수해버렸다. 독발녹단은 남은 주민을 몰아서 고장(감숙성 무위)으로 도망가 버렸다.(AD407)      

 

(24) 요흥의 무리한 독발녹단 공략(AD408)

 

요흥은 안팎으로 어려운 독발녹단의 남량을 흡수할 생각을 품고서 상서령 위종(韋宗)을 무위에 보내 염탐을 시켰다. 무위에서 독발녹단과 오랫동안 예기를 나누었던 위종이 나오면서 이렇게 한탄했다.

 

  “ 기이한 영재와 영특한 인물이 

    화하(華夏,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밝은 지혜와 명석한 지식이 

    반드시 책을 읽는 것만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님을 알았다.

    나는 지금에 와서야 구주(구주) 바깥과 오경 밖에도

    또 인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독발녹단의 재주에 놀란 위종이 돌아와 요흥에게 이렇게 간단하게 보고했다. 

 

  “ 남량왕국이 비록 피폐하긴 했어도 아직 도모할 수 없겠습니다.”

  

요흥이 이렇게 되물었다.

 

  “ 아니 유발발은 그 까마귀 떼 같은 무리들로도 

    독발녹단을 궁지에 몰수 있었는데

    나와 같은 천하 대군을 가진 사람이 그를 처단하지 못한단 말인가?“

 

위종이 말했다.

 

   “ 형세가 변하고 뒤집어지는 경우는

     천만가지가 넘습니다.

     남을 깔보는 자는 반드시 패하고

     남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자는 공격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독발녹단이 유발발에게 패한 것은 

     그를 가볍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독발녹단이 그 잘못을 철저히 반성하고 있기 때문에 

     주군의 천만대군을 가지고도 이기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요흥은 위종의 충간을 듣지 않았다. 아들 요필과 염성 걸복건귀 등의 장수와 함께 3만 군사를 보내 독발녹단을 공격하고 동시에 좌복야 제난을 시켜 2만 기병으로 유발발을 공격했다. 

이부상서 윤소가 요흥을 막아섰다.

 

  “ 차라리 북량의 저거몽손과 서량의 이고에게 명하여 남량의 배후를 공격함만 못합니다.”

 

요흥은 이 또한 듣지 않고 독발녹단에게 기만하는 편지를 썼다.

 

   “ 제난을 보내 유발발을 토벌시켰다.

     유발발이 서쪽으로 달아날 것을 대비하여 

     요필에게 군사를 붙여서 하서회랑(난주-무위-장액-주천을 잇는 길)

     그쪽으로 보내니 그대는 그렇게 알아라.“

 

독발녹단은 요흥의 편지를 곧이곧대로 믿고서 대비하지 않았다. 요필의 부하 강기가 군사 5천을 요구하면서 급습하자고 건의했지만 요필은 듣지 않고 정상 속도로 무위로 다가갔다. 요필의 군대가 무위로 들이닥치자 독발녹단은 성문을 닫고 수비태세를 갖추었다. 전투가 지루하게 계속되자 무위 성안에서 내부반란의 기미가 있었으나 독발녹단은 반란무리 5천명을 전원 매몰시켜 수습하는데 성공했다. 독발녹단은 성안에 있는 양과 소를 모두 성 밖으로 풀어 내 보냈다. 후진 장군 염성이 병사를 풀어 양소무리를 잡게 했는데 이 틈을 타고 독발녹단의 군사들이 뒤를 공격하여 요필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7천명의 후진 병사의 목이 이 때 달아났다. 요흥은 요현에게 2만 기병을 붙여서 패전한 요필에게 지원군을 보냈으나 요현 또한 독발녹단에게 패했다. 요현은 패전의 책임을 염성에게 묻고 독발녹단에게 사과하고 철군했다. 독발녹단 또한 사자를 종주국 후진에 보내 사죄했다. 후진과 남량이 다시 화친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다음해 AD409년에 독발녹단은 독립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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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후진 요흥의 하나라 유발발 공격실패(AD409-AD411)

 

서쪽으로 독발녹단, 그리고 남쪽으로 동진 유유와 화친한 요흥은 이제 마음 놓고 북쪽의 유발발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동생 요충과 장수 적백지에게 4만 기병을 주어 유발발 공격을 지시했다. 하루 길을 북쪽으로 가다가 영북(섬서성 예천)에 도착한 요충은 거꾸로 장안의 형 요흥을 공격할 생각을 부하 장수들과의 논했다. 적백지가 반대하자 그 자리에서 독을 먹여 죽였다. 요충이 반란을 모의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요흥은 요충에게 죽음을 내렸다.

 

하의 유발발은 기병 2만으로 후진의 평양(감숙성 화정)을 공격하고 주민 7천을 약탈한 뒤 의역천(감숙성 화정현 남쪽)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후진 요흥은 유발발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북쪽 이성(섬서성 황릉)으로 나아갔다. 유발발은 기병을 거느리고 요흥을 먼저 공격했다. 요흥의 군사가 대패하여 장안으로 급히 후퇴하였다. 요흥이 유유의 공격을 받는 남연의 모용초를 돕기 위해 보낸 한범과 요소도 유유에게 패하였다. 요흥의 후진군은 북쪽, 서쪽 그리고 동쪽에서 모두 패한 셈이다. 끝까지 항전하던 모용초의 남연은 그 다음해(AD410)에 유유에게 정복되어 멸망하였다. 

 

요흥이 패퇴하자 유발발은 강력한 기병을 바탕으로 줄기차게 후진의 북쪽 변경인 평량(감숙성 화정)과 정양(섬서성 의천현)을 노략질해 들어왔다. 요흥은 군사를 이끌고 직접 유발발을 맞아 싸웠지만 기병으로만 이루어진 유발발의 치고 빠지는 전략을 감당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관중 북부 지역에서 후진의 요흥 세력을 격파한 유발발은 거침없이 군사를 몰아 지배영역을 넓혀 나갔다. 황릉을 관할하던 후진의 왕매덕은 유발발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유발발이 후진을 어떻게 토벌해야 하냐고 왕매덕에게 묻자 기다리면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고 대답했다. 후진의 영역이 장안부근으로 쪼그라든 반면 유발발의 하나라 영역은 감숙성 동남부와 섬서성 중부와 남부는 물론 산서성 서부까지 세력을 넓혔다.(AD411) 그러나 유발발의 군대는 한 지역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유목민족의 특성상 옮겨 다니는 군대였으므로 세력영역이라고 해서 정착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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