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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14: 모래처럼 섰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하(夏)나라 혁련창(D)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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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04월02일 16시5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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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16) 유현 형제의 내분과 유현 세력 멸망(AD387)

 

산서성 북단 끝자락 우옥현을 거점으로 한 유현의 세력은 동쪽으로는 탁발규와 대치하고 서쪽으로는 유위진과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영토가 넓고 비교적 비옥하여 강력한 군대를 가질 수가 있었다. 아버지 유고인이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의 민심 또한 얻고 있었다. 그러나 유현과 동생 유가니 사이의 다툼으로 내분이 일어났다. 북위 장곤이 탁발규에게 후연과 연대하여 내분에 빠진 유현 세력을 토벌하자고 종용했다. 혼자서는 힘이 달렸던 탁발규는 장수 안동을 후연 모용수에게 보내 또 다시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않은 탁발규가 반란을 피해 전전긍긍하는 동안 북중국의 패권은 후연의 모용수가 잡고 있었다. 유위진은 환심을 얻기 위해 모용수에게 말 몇 천 필을 보냈다. 그러나 도중에서 유현이 그 말을 약탈했다. 격노한 모용수가 모용해를 보내 유현을 공격하여 대파시켰다. 유현은 남쪽 마읍, 즉 산서성 삭주 서쪽 산으로 도망갔다. 탁발규와 모용린이 그치지 않고 유현을 쫓아와 공격하자 유현은 마침내 후연과 사이가 좋지 않은 모용영의 서연으로 도망갔다. 모용린은 유현의 모든 군사와 가축을 거두었다. 빼앗은 가축이 천만 마리가 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로써 유현의 세력은 사실상 끝이 난 셈이다. 모용수는 유현이 다스리던 지역의 통치를 그의 동생 유가니에게 위탁했다. 

 

 

(17) 하란의 내부 분열과 막강한 후연 부상(AD390) 

 

후연의 모용수가 북경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는 AD390년 경후연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북위 탁발규나 그 너머 후진 요장은 후연과 우호관계를 유지했으며 멸망(AD394)하기 직전인 전진의 부등 또한 감히 후연에게 대적할 세력은 되지 못했다. 그러니 내몽고 오르도스 이금곽락기에 웅거하던 유위진에게 북위와 후진과 전진은 후연의 예봉을 막아주는 방패와 같은 역할을 했던 셈이다.

   

교활한 유위진은 그 틈을 타고 아들 유직력제를 보내 내몽고 너머 북쪽에 자리 잡은 하란부하눌을 공격했다. 다급해진 하눌은 조카 탁발규의 북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탁발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지원에 나섰다. 그리고 하눌의 요청에 따라 하란 부족을 모두 흡수하여 북위의 근거지인 지금의 산서성 대동지역으로 이주시켰다.(AD390) 

 

하눌의 동생 하염간은 형이 나라를 통째로 탁발규에게 넘겨준 것이 못 마땅했다. 과거에도 여러 번 탁발규를 시해하려다가 실패한 것도 형님 하눌 때문이지만 나라를 그런 조카에게 그냥 넘겨주는 것이 못마땅했다. 하염간은 형 하눌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AD391) 그러나 평소 신망이 두터운 하눌이었으므로 하염간의 밀모를 전해준 사람이 있었다. 하염간과 하눌 사이에 무력다툼이 일어났다. 북위 탁발규는 종주국 후연에게 하염간 토벌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AD390년 2월 모용수는 양쪽을 다 공격하기로 했다. 모용린을 보내 하눌을 공격하게 하고 난한은 하염간을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 6월에는 모용린이 하눌과 하염간을 모두 포로로 잡았다. 모용수는 하눌과 그의 부족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나 하염간은 중산(하북성 정주)으로 강제 이주시켜 자신의 관할구역 안에 잡아 두었다.

 

모용수의 넷째 아들이자 영리한 모용린은 탁발규의 잠재력을 간파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기회에 탁발규마저 잡아들여 후환을 끊어버리자고 아버지 모용수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모용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특한 탁발규 또한 후연 조정 내부에서의 자신을 해하려는 움직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마침 사신으로 보낸 탁발규 동생 탁발고를 후연이 인질로 잡고 더 많은 조공을 무리하게 요구하자 후연과의 우호관계를 끊고 서연 모용영과 선린관계를 맺었다.

 

 

(18) 유연부족 욱구려씨와 유위진 피살(AD391)

 

부견이 대를 멸망시킬 때(AD376) 유연부락의 욱구려씨는 유위진에게 복속하고 있었다. 15년 지난 AD391년 탁발규가 일어나자 대부분의 유목민족들은 북위를 섬겼으나 유연부락 욱구려씨만은 북위를 섬기지 않았다. 욱구려씨는 종족으로 볼 때 흉노족이어서 오히려 유위진에 더 가까웠다. 탁발규가 그런 유연부락을 공격했다. 유연부락의 욱구려씨족 두목 욱구려필후발과 욱구려온흘제 형제는 탁발규에게 항복했다. 탁발규는 그들을 운중(내몽고 탁극탁)으로 모두 이주시켰다. 탁발규가 쳐들어와 자신의 수하세력 욱구려씨를 빼앗아가자 유위진은 아들 유직력제 보내 8-9만 병력으로 북위의 남부지역을 침범했다.(AD391년 11월) 탁발규가 8천 기병으로 반격에 나서서 유직력제를 대파시켰다. 여세를 몰아 탁발규는 황하를 건너 유위진의 나라 중심부 오르도스를 공격했다. 유위진 부자는 서쪽으로 도주했다. 탁발규의 장수 이위가 끝까지 쫓아가 악극탁전기에서 유직력제를 사로잡았고 유위진은 부하에게 피살되었다.(AD391년 11월)

 

 

(19) 열살짜리 유발발의 도주(AD391)

 

 

탁발규는 유위진 종족 5천명을 참수하고 그 시체를 황하에 버렸다. 탁발규로써는 간사하게 붙었다 배반하기를 밥 먹듯 해온 유위진을 절대로 살려 둘 수 없었다. 그리고 유위진이 가지고 있던 말 30만 필과 소양 4백여만 마리를 획득했다. 이번 토벌로 탁발규 북위는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매우 강성한 국가가 되는 기초를 닦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때 유위진의 열 살짜리 막내아들 유발발은 가까스로 선비족의 일족인 설간부락으로 도주할 수 있었다. 탁발규는 후환을 아예 뽑아버리기 위해 사람을 설간부락에 보내 유발발을 색출했다. 설간부락 두목 태실장은 유발발을 세워놓고 이렇게 말했다.

  

  “ 나라가 망하고 집안이 무너져 

    내게 귀의한 유발발을 

    같이 망하면 망했지

    어찌 그를 붙잡아 북위에게 넘기겠는가?“  

 

태실장은 유발발을 영하성 고원에 주둔하고 있던 후진의 선비족 족장 몰혁간으로 보냈다. 유발발의 생김새와 언사가 범상치 않음을 본 몰혁간은 딸을 줘 처로 삼게 하였다.(AD391)

 

 

(20) 북위와 후연의 대결 : 참합피 대전(AD395) 

 

AD391년 유위진을 멸망시키면서 국력이 강해진 북위 탁발규는 그 여세를 몰아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해갔다. 당시 최강국 후연은 영역을 확장해오는 북위를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AD393년-AD394년에 걸쳐 후연의 모용수는 7만 보기병을 붙여서 북위와 우호관계에 있는 모용영의 서연을 멸망시키는 한편 장안의 후진과 연대를 모색했다. 서쪽이 든든해진 후연은 오로지 북쪽의 북위만 해결하면 되게 되었다. 팽창하는 북위와 후연의 대결은 불가피해졌다. 선제공격은 북위가 일으켰다. AD395년 5월 탁발규가 후연의 국경을 침범한 것이다. 모용수는 즉각 태자 모용보와 아들 모용농, 모용린에게 8만 기병을 주어 반격하도록 했다. 그리고 모용덕에게 1만 8천 군사를 주어 그 뒤를 이어 받쳐 주도록 했다. 이것이 북위-후연의 참합피 대전(AD395년) 발단이다. 이 전쟁에서 후연은 크게 패했다. 이미 70세가 넘어 노쇠한 주군 모용수의 판단력과 리더십이 흔들린 것이 패인이기도 하겠지만 북위 탁발규의 능력이 더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북위 탁발규는 참합피 승전의 기세를 몰아 맹렬한 속도로 동쪽 후연의 영토를 침범해 나갔다.    

 

북위가 북중국 전역에서 영토를 확장해 가는 동안 후진의 보호 아래에 있는 유위진 아들 유문진은 북위 탁발규에게 투항했다. 탁발규는 종실의 여자를 그에게 주고 숙씨라는 성을 내려 주었다.(AD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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