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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14 : 모래처럼 섰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하(夏)나라 혁련창<B>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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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03월19일 16시5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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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6) 탁발십익건의 유위진 추격(AD367) 

 

대왕 탁발십익건은 반란을 일으킨 사위 흉노 좌현왕 유위진에 대해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다. 직접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황하를 건너 유위진을 공격했다. 당시 황하는 얼음이 덜 얼은 상태였다. 탁발십익건은 굵은 끈과 풀을 엮어서 제방처럼 만들어 얼음을 흐르는 것을 막은 뒤 부교처럼 만들어서 강을 건넜다. 유위진은 남쪽 전진으로 도망칠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탁발십익건은 유위진의 부락민 60%를 포획한 뒤 철수했다. 유위진이 전진으로 도망해 오자 부견은 유위진을 삭방(하투)으로 유배 보내고 군사로 하여금 감시하도록 했다. 이 해(AD367) 부견의 동생 부쌍과 여러 친척 조카 부류, 부무, 부수 등이 부견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부견은 이들을 진압하는데 온 힘을 다 쏟았다. 

 

 

(7) 부류 등 부생 형제들의 반란과 성공적인 진압(AD367)

 

3년 전인 AD364년에 부생의 친동생 여남공 부등(騰)이 다른 네 명의 동생들과 함께 반란을 꾀하다가 잡혀 죽은 적이 있었다. 왕맹은 예전부터 부생의 자식들을 모두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부견은 주모자 부등만 처리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다 살려 주었다. 그 때 살아남은 정북장군 회남공 부유는 다음해인 AD365년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이끌고 장안을 습격했는데 이위가 잘 방어하여 부유를 체포하고 죽였다.(AD365년10월) 이 때 부건의 아끼는 아들 정동대장군 진공 부류(부생의 동생)와 부견의 친형 정서대장군 조공 부쌍도 가담을 했지만 부견은 부유만 처단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다 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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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견이 두 번이나 목숨을 살려 주었던 부류가 부생의 다른 동생 진동장군 위공 부수와 안서장군 연공 부무와 함께 또 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을 모의했다.(AD367년) 진동장군부 주부 요조가 주군 부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 공께서는 주공과 소공처럼 주군(부견)과 친한 사이인데      

    국가가 어려울 때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어찌 난을 일으키려 하십니까?“

 

부수는 요조의 조언을 듣지 않고 반란 군사를 일으켰다. 부견이 그 소식을 듣고 즉각 난에 동참했던 부류 형제를 장안으로 긴급 소환했다. 부류 형제들은 소환령을 거부하고 군사를 몰아 남쪽으로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부견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군대를 물리고 소환에 응하면 용서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그 신표로 배를 깨물어 보이는 「설리의 신표(齧梨爲信,설리위신)」를 보냈다. 그러나 아무도 부견의 호소에 응답하지 않았다. 다음해 정월 부견은 양성세와 모숭을 보내 진주(秦州) 방향 반란군 부무를 토벌하게 하고 왕맹과 등강은 옹주 포판(산서성 영제)의 부류를 공격하였으며 양안과 장자를 보내 섬성(삼문협)의 부수를 토멸시켰다. 

 

섬성을 지키던 부수는 두려운 나머지 전연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전연의황제는 용렬한 모용위였고 훌륭하게 정치를 이끌어가던 모용위의 삼촌 모용각은 지난해(AD367) 사망한 직후였다. 모용각은 죽기 직전 조카이자 황제인 모용위에게 친동생인 오왕 모용수를 등용하여 모든 정사를 자문할 것을 신신당부했었지만 모용위는 듣지 않았다. 모용위는 뛰어난 모용수(나중에 후연 창업) 대신 시기심이 많고 편벽한 작은 할아버지 모용평을 태부 및 대사마로 등용시켰다. 사실 전연 조정에서는 부씨 형제간 내전으로 혼란한 지금이야말로 전진을 토벌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태부 모용평은 옹졸하고 그릇이 형편없이 작았다.   

 

  “ 전진은 대국이라 쉽게 도모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닫아걸고 국경을 보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전진을 평정하는 것이 어찌 나의 소관이란 말이냐!“

 

이런 전연 조정의 내막 형편을 알게 된 부수는 모용수에게 서신을 보내 상의했다.

 

  “ 지금 이 기회를 타서 빼앗지 않으면 

    과거 오의 부차가 월왕 구천을 죽이지 않음에 따라

    나중에 월왕 구천의 공격을 받아 용동에서 방축되어 자살하게 만든 

    용동의 한(甬東之恨)이 될까 걱정됩니다.“

 

모용수가 측근 황보진에게 이렇게 걱정했다.

 

  “ 주군(모용위)이 어리고

    태부 모용평은 용렬하기만 하니

    어떻게 부견과 왕맹을 당해 내겠소?“ 

 

황보진이 이렇게 대꾸했다.

 

  “ 우리가 그것(이 기회에 부견을 공격하자는 것)을 말한 들

    듣지 않을 것이니

    말할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전연의 모용위와 모용평 조정은 소중한 기회를 이렇게 놓치고 말았다. 이로부터 2년 뒤인 AD370년 전연은 부견의 공격을 받고 허무하게 멸망했다.    

 

양성세와 모숭이 이끄는 부견의 진주토벌군은 전쟁 초기 부무에게 패배하여 쫓겨 왔다. 부견은 다시 왕감과 여광과 적녹에게 3만 대군을 붙여 진주(감숙성 경천)를 재차 공격했다. 이 때 흥분한 왕감이 전투를 서두르려 하자 여광은 적군 식량이 고갈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러날 때 공격하자고 타일렀다. 여광의 생각은 적중했다. 먹을 것이 다한 부무의 군대가 뒤로 물러나려 할 때 3만 전진군대가 부무를 습격했다. 부무의 진주방면 반란군은 이 일격으로 격파되었다. 부무는 부쌍이 웅거하고 있는 서쪽 상규(감숙성 천수)로 도망갔다. 왕감은 군대를 이끌고 상규로 진격하여 부쌍과 부무를 체포하고 참수했다.(AD368년7월) 

 

진주방면 반란군을 토벌하는 사이 부류가 이끄는 옹주방면 반란군 2만이 장안을 공격했다. 등강은 7천의 군사로 이들을 격파했다. 장안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부류는 잔당을 이끌고 퇴각했는데 왕맹이 추격하여 그들의 근거지 포판(산서성 영제현)마저 함락시키고 말았다. 부류도 이 때 목이 날아갔다(AD368년9월).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섬성이다. 부견은 왕맹휘하 전군을 보내 섬성을 포위했다. 왕맹은 부수를 생포하여 장안으로 돌아왔다.

부견이 물었다.

 

  “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

 

부수가 대답했다.

  “ 신은 본래 반란의 의사가 없었습니다만

    형과 동생들이 여러 번 모의하고 종용하니

    죽을 것이 두려워 참여했을 뿐입니다.

 

부견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 너는 평소에 어른다운 사람이었으니

    진실로 너의 마음이 그러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번 사안은 사적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님을 네가 잘 알 것이다.

    다만 고조(부건. 부견의 큰 아버지이고 부수의 아버지)의

    후사가 끊어져서야 되겠느냐.“

 

부견은 마침내 부수에게 죽음을 내렸지만 그의 일곱 아들은 모두 살려 주었다. 그리고 그 장자에게는 부수의 후사를 잇게 하였고 나머지 아들들은 후사가 없이 이번에 죽은 부씨들의 대통을 잇도록 배려해주었다. (AD367년) 

 

 

(8) 동진 환온의 북진(AD369)

 

동진의 대사마 환온(AD310-AD372)은 북벌이 평생의 소원이었다. 환온의 첫 번째 목표는 전연이었다. 당시 전연의 황제는 유제(幽帝) 모용위였지만 군사와 정치의 실권은 용렬하기 짝이 없는 그의 작은 할아버지 모용평이 쥐고 있었다. 환온은 AD369년 수륙 양군의 대군을 이끌고 고숙(안휘성 당도)을 출발하여 북쪽으로 나아갔다. 다급한 전연은 전진의 부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다른 신하들이 다 반대했지만 부견은 왕맹의 권유를 받아들여 지원군을 보내기로 했다. 왕맹의 생각은 모용평이 허약한데다 환온마저 병들어 있으므로 전연을 지원하면서 전연과 동진을 동시에 아우르자는 생각이었다. 부견은 구지와 등광에게 2만 군사를 붙여 지원요청에 응답했다. 전연의 모용수와 전진의 구지 군사의 활약으로 환온군은 크게 패하여 물러갔다.(AD369)  

 

환온이 퇴각하자 모용수는 양읍(하남성 수현)을 거쳐 전연의 수도 업(하남성 임장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연 조정에 승전에 따른 포상 문제를 상주했다. 태부 모용평은 날로 위엄과 명성이 떨치는 조카 모용수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태후 가족혼(황제 모용위의 죽은 아버지 모용준의 처)씨 또한 시동생 모용수를 싫어했다. 당연히 모용평과 가족혼태후는 모용수를 살해할 음모를 진행시켰다.  

 

죽은 모용각의 아들 모용해와 모용수의 장인 난건이 살해음모를 모용수에게 알려 주었다. 

 

  “ 먼저 일어나야 이긴다.

    모용평과 모용장(황제 모용위의 형)만 처리하면 

    나머지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모용수는 거절했다.

 

  “ 피붙이 간의 다툼이야말로 나라의 혼란입니다.

    내가 조용히 죽을지언정

    차마 형제를 죽이면서까지 정권을 찬탈할 수는 없습니다.“

 

모용해와 난건이 거듭 재촉하자 모용수는 이렇게 말했다.

 

  “ 차라리 제가 피하겠습니다.”

   

모용수는 근심에 싸여 아들 모용령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물었다. 모용령은 일단 전연 모용씨의 근거지인 용성(요녕성 조양)으로 돌아간 뒤 조정의 적개심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주변을 흡수하여 스스로 힘을 기르는 것이 다음의 계책이라고 말했다. 모용수는 그것이 훌륭한 생각이라고 판단하여 몰래 빠져나가 북으로 달아났다. 모용수가 출발한 지 하루도 안 되었을 무렵 모용수의 다른 아들 모용린은 평소 아버지로부터 홀대받은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그 계획을 조정 밀고해 버렸다. 모용수의 측근들도 모두 모용수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 계획이 틀어지자 모용령이 아버지에게 마지막 수단은 전진에 투항하는 것이라고 건의했다. 모용수도 동의했다. 모용수와 모용령 부자는 그 길로 말머리를 돌려 서쪽으로 장안을 향해 달려갔다. 전진의 부견은 모용수 부자를 크게 환영했다. 모용수에게 관군장군, 모용해에게 적노장군의 직을 주었다. 모용수는 전진이 전연을 AD370년 멸망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리고 14년 뒤인 AD384년 비수대전의 패배(AD383년)로 뿌리째 흔들리는 전진으로부터 독립하여 후연이라는 나라를 세운다.     

 

 

(9) 모용수를 제거하려는 왕맹(AD369)

 

부견이 모용수 부자를 크게 후대하는 것을 왕맹은 경계했다.

 

  “ 모용수 부자는 용과 호랑이 같은 부자이니

    지금 제거하셔야 합니다.“

 

부견의 생각은 달랐다.

 

  “ 영웅호걸을 거둬들여 사해를 깨끗이 평정하는 것은

    군자의 소망인데 내 어찌 그들을 죽이겠소.

    또 서로 이미 정성스럽고 충성스런 말을 나누었는데 

    필부도 허툰 말을 하지 않을 터인 바에 

    만승인 내가 어찌 약속한 말을 거두어 그를 죽이겠소.“

 

당시 전진과 전연의 외교관계는 우호적이었다. 서로 신하들의 교류가 활발했다. 전진에 들어 갔던 양침은 돌아와서 전진의 전쟁준비와 민심수습 등을 보고하면서 장차 있을 변란에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황제 모용위와 태부 모용평은 부견이 모용수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먼저 우호관계를 깰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부견이 전쟁을 생각하고 있었으면 분명히 적개심 때문에 오왕 모용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단순논리였다. 

 

 

(10) 전연 조정의 분토 같은 붕괴(AD369)

 

전연의 태위 황보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 오원의 화(伍員之禍)를 대비하셔야 합니다.

    낙양과 태원과 호관(산서성 장치)에 병력을 증강시켜

    장차 전진의 침입에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오원의 화‘는 BC 6세기경 춘추시대 초나라 오원(오자서)의 아버지 오사가 간신 비무기에게 모함을 받아 죽자 오원이 피란을 거듭하다가 결국 오왕 합려에게 등용되어 아버지 원수 초나라를 멸망시킨 고사를 말한다. 태부 모용평이 황제 모용위에게 말했다.

 

  “ 전진은 힘이 적고 약하기 때문에 우리를 도왔던 것입니다.

    또 부견은 항상 정도(正道)만 따라 가는 사람이므로

    반란을 일으킨 오왕 모용수의 말을 듣고 

    우리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볍게 놀라서 경계심을 일으키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침략의 빌미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득하면서 한편으로 전진에서 온 사신에게 얼마나 전연이 풍요롭고 잘 사는 지를 보여 주었다. 고태와 하간과 같은 강직한 전연 신하들은 오히려 강한 병기와 조직된 군사들의 힘을 보여줘야 할 것이라고 간청했지만 무력긴장을 원하지 않는 모용평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정권은 문란한 가족혼태후가 쥐고 있었고 모용평은 옹졸하고 편협하며 질투와 탐욕에 가득 찬 사람이었다. 뇌물로 자리를 사는 것이 유행이 되어 유능한 관리는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전연의 멸망은 시간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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