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금융허브성공과 한국의 실패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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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싱가포르는 어떻게 성공했나?
1965년에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축출되다시피 분리독립했을 때 장차 싱가포르가 금융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예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싱가포르를 금융중심지로 만들겠다는 발상의 단초가 흥미롭다. 1968년에 이광요수상에게 보고서가 올라 갔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세계 금융계는 취리히에서 시작합니다. 취리히은행이 아침 9시에 문을 열고 다음에 프랑크푸르트, 런던의 순서로 국제금융거래가 시작됩니다. 이들이 문을 닫을 즈음에는 뉴욕은행이 문을 열고 샌프란시스코로 넘어 갑니다. 샌프란시스코은행이 오후에 문을 닫으면 세계는 베일에 덮입니다. 다음 날 아침 취리히은행이 문을 열 때 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일 싱가포르에 금융센터를 둔다면 샌프란시스코은행이 문을 닫기 전에 싱가포르가 인계받아서 취리히은행이 문을 열 때 까지 금융거래를 담당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세계는 화폐와 은행업무에서 24시간 전세계 순환서비스 체제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이광요 수상은 즉시 국제금융센터구축에 착수했다. 그 핵심은 제 3세계속의 제 1세계건설이었다. 즉 그 당시에 제 3세계(후진권)에 속해 있던 아시아에서 싱가포르를 마치 사막속의 오아시스처럼 제 1세계(선진권)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외국은행들이 올 수 있도록 안정된 사회, 쾌적한 작업환경과 생활환경, 능률적인 사회기반시설, 그리고 노련하고 융통성있는 전문요원을 구비하는 작업에 착수했던 것이다. 또한 싱가포르의 통화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이 금융산업을 선진적으로 감독할 수 있다는 점을 외국은행들에게 납득시키도록 노력했다.
싱가포르는 아시아 달러시장을 시작으로 소박하게 출발하였다. 처음에는 해외 금융기관으로부터 외화를 들여와 아시아 지역 은행들과의 거래를 주로 하였다. 그후 외국환 매매, 외국환 파생상품거래, 채권발행, 기금관리로 확장되었다. 아시아 달러시장은 동아시아의 무역과 투자가 전 세계로 확장되는 속도에 맞추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싱가포르는 거의 독점하다 시피 했다.
구체적인 유인책도 제공되었다. 비거주 해외 예금자들이 얻는 이자 수입에 대한 세금의 원천징수를 폐지하였고 아시아 달러 예금은 강제적인 유동성 확보와 지불준비금 강제규정에서 면제되었다.
1990년대에 이르러 싱가포르는 런던, 뉴욕, 도쿄에 이어서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외환시장을 보유하게 되었다. 싱가포르 금융센터의 성공요인은 법에 의한 지배, 독립적인 사법부, 안정되고 유능하고 깨끗한 정부이다. 이런 요인들이 건전한 거시 경제정책을 추구할 수 있게 하였고 인플레이션을 낮추어 안정된 환율과 함께 강력하고 안정된 싱가포르 달러를 만들어 주었다.
싱가포르 금융감독원은 엄격한 규칙과 철저한 감독으로 금융기관들이 금융거래의 원칙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이는 해외투자자들이 싱가포르 금융시장에 대해서 강력한 신뢰를 갖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싱가포르는 1987년의 주식대폭락(블랙먼데이)과 1997년의 아시아 외환위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위기를 비켜 갈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성공요인은 국적을 가리지 않는 인재등용이었다. 금융당국의 최고책임자와 핵심간부, 공적 금융기관의 최고경영자와 핵심간부들을 임명할 때 런던, 홍콩등에서 활약하는 최고의 인재들을 등용한 사례가 흔하였고 이광요수상이 직접 만나서 설득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광요 수상 자신도 국제금융계의 거물들을 직접 만나서 조언을 듣곤 하였다.
싱가포르는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이후에 금융규제를 포지티브에서 네거티브로 전환하였다. 싱가포르 금융기관들이 아시아 외환위기의 사정권밖에서 꿋꿋하게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고 건전하며 외국 투자자들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이후에 비로소 “할 수 없다고 명시된 것 이외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엄청난 자유를 금융기관에 부여하였다. 이는 싱가포르 정부가 금융의 안정성과 역동성을 어떻게 조화시키는 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2. 한국은 왜 금융중심지가 되지 못하는가?
지금으로부터 10 여년전에 노무현정부는 한국을 동북아 금융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싱가포르에 버금가는 국제금융센터로 키우겠다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동북아시대위원회가 그 진전사항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도록 하면서 기획재정부가 소외되었는데 손발이 없는 대통령자문위원회는 제데로 추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 후에 기획재정부로 업무가 이관되면서 속도가 붙기 시작했는데 가장 네세울 만한 성과는 자본시장통합법을 제정한 것이었다. 핵심내용은 규제개혁을 통해서 대형 투자은행이 출현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법 시행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권이 바뀌었고 세계 금융위기가 발생하였다. 선진국들이 위기 재발 방지를 위해서 대형 투자은행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가운데 이명박 정부도 오히려 규제를 강화하였고 노무현 정부의 국제금융센터육성은 용도폐기되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한국의 금융은 저축은행 부실, 일부 은행들의 지배구조 난맥상을 노출하면서 금융의 생명줄인 투자자와 예금자 신뢰는 추락하였고 우물안 개구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상해는 이미 한참 앞으로 가 버렸다.
금융수장들은 국내은행들이 해외로 진출해야 한다는 입발린 소리만 되풀이 한 채 국제금융센터로의 도약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젼을 내 놓고 있지 못하다. 이것이 우리가 아직 국제금융센터를 운운하기에는 준비가 안되어 있다는 정확한 현실인식에 바탕을 두고 차근 차근 힘을 기른 이후에 국제금융센터를 지향하겠다는 전략적 정책판단이면 다행이겠으나 현실은 그렇치 않다.
금융업계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과도한 규제 탓으로만 돌리고 자구노력은 소홀히 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무책임, 무능력을 그데로 두고 네거티브로 규제를 혁파하였다가 1997년 외환위기 이전에 종합금융회사에 대한 규제완화가 무분별한 외화차입으로 이어져서 위기를 자초한 불행이 되풀이 되지 않는다고 단언 할 수 없다. 론스타 사태시에 보여준 금융감독당국의 무원칙도 외국투자자들의 신뢰를 받기에는 우리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점을 각인시켜 줄 뿐이다.
싱가포르의 성공사례를 보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는 분명하다. 유능하고 깨끗하고 강력한 금융당국,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인력,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금융 CEO 없이는 한국의 금융은 국제중심지는 차치하고 영원한 우물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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