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62> 정신의 황폐와 암담하던 날의 비망록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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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인용하는 내 시 「구시가의 밤」은 1969년의 작품. 시만이 유일의 가치였고, 구원의 방편이던 암담하던 시절의 비망록으로 읽힐 수도 있는 작품이다. 한양대학교 국문학과가 있는 예술관 3층에서 내다보면 을씨년스런 풍경이 내다보였다. 바로 앞 왕십리역엔 무개화차에 실려 온 무연탄이 쌓여 있었다. 왼켠으로 눈을 돌리면 한강이었다. 아직 환경오염이 진행되기 전이어서 제법 맑은 물이 굽이쳐 흘렀다. 압구정 쪽 모래밭이 유난히 하얗게 반짝였다. 몇 년 후 강남지역이 한강의 부도심으로 개발되면서 압구정 쪽 은모랫벌은 아파트 숲으로 채워졌다.
지금도 한양대학교 국문학과가 자리 잡고 있는 이 건물은 겨울바람이 거세기로 이름난 곳이다. 서울 시내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왕십리 쪽 너른 벌을 지나고 그대로 부딪는 곳이 행당산 바위 위에 우뚝 솟아 있는 6층짜리 시멘트 건물, 예술관이었다. 춥고 스산한 그곳으로 시를 만나러 가곤 했었다. 거기 박목월 선생이 계셨다. 그때엔 시창작론같은 교과목이 없었고, 시론과 문장론 같은 강좌를 박목월 선생이 열고 계셨다. 국문학과 동급생들은 모두 13명. 문학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친구들이었다. 어찌어찌 대학 졸업장이나 따볼까 해서 적을 걸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런 동급생들 중에서 공대 섬유공학과에서 전과해온 이승훈이 유일하게 말을 나눌 수 있는 친구였다.
내가 박목월 선생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59년.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고등학생으로 박목월 선생을 만나 습작 시를 들고 찾아뵙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엔 선생께서 강의하시는 대학 강의실을 찾아 한양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을 하였고, 거의 매주 글을 써들고 선생을 찾아뵈었다. 글 쓰는 일만이 생존의 이유였었다. 그런데, 내 시에 대한 선생의 말씀은 늘, 엄격하기만한 것이었고, 질책으로 시종한 것일 때가 많았다. 보드랍고 활달해야 할 젊은이의 시가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다는 말씀이셨다. 활달하게 움직이는 상상력을 따라가라는 말씀을 강조해 지적해주시곤 하였다. 나는 그동안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쌓아온 엄정한 정신, 준엄한 시적 위의의 문제를 덜어내고 감각과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힘들고 어수선한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시에 임하는 시인 정신의 고결성에 이르기 위해 매진하고 있는 내게 목월 선생은 보드랍고 활달한 상상의 말들을 요구하고 계셨던 것이니 내게 돌아오는 것은 질책의 말씀일 밖에 없었다. 나는 내 시적 능력에 대해 엄청난 좌절과 자책의 병을 앓게 되었고, 병은 의식의 심층에까지 깊이 박혀가고 있었다.
새벽길로 달려간다. 흔들리는 캄캄한 손들, 뼈가 보인다. 까마귀가 날아와, 가지가 휘어졌다. 기울어진 길로 말이 말을 싣고 뛰어간다. 신경은 짧게 울고 문은 열린다. 사면이 흰 방엔 독수리가 피를 흘린다. 죽은 숲이 흔들린다. 먼지를 쓴 채 놓여있는 귀, 메스와 바늘이 보인다. 눕혀진다.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많아진다.
목발을 짚고 병정이 돌아온다. 허리 부러진 비행기가 푸득이며 추락한다. 의식의 어느 암반에서 비명이 들린다. 바늘이 살에 꽂힌다. 모든 시각이 빠져나간다. 아득한 유년의 구릉 위를 달려가는 말은 다리가 세 개 뿐이다.
혼들이 덮인 비탈길에 탄피를 들고 서 있다. 고딕식 석조건물의 문들이 일제히 작아진다. 텅 빈 거리의 일각엔 처형된 사람들의 그림자가 내려진다. 그 위를 교회당의 그림자가 덮힌다. 침묵에 잠긴 마을로 아버지는 살아있다고 외치며 누나가 달려온다. 혼수에 싸인 이 우울한 세대의 복판으로, 고무장갑 낀 손이 마치를 내리친다. 고집이 박힌다.
깨어날 것인가. 좌절된 사상(事象)들이 캄캄하게 직조되는 휘장을 건너, 떨고 있는 육(肉)의 바다로 사람들이 걸어 나간다. 동화(銅貨)처럼 달빛이 빛나는 자유시장에 산적한 건어, 건어의 욕망. 메마른 비늘을 달고 이 질긴 어둠을 헤치며 새벽의 길을 달려간다. 모든 가지가 까마귀의 무게로 눌리고, 파괴된 구시가에 새로운 뜻이 되어 누워있다. 누가 와서 불러다오. 부러진 날(刀)들의 마멸된 야망이 달리는 새벽, 수선된 말이 되어 저 깊은 어둠을 헤치며 나는 달려온다. 깨어날 것인가, 깨어날 것인가. (1969)
1960년대 중반 이후 내가 혼신의 힘으로 이뤄내고자 했던 것은 그때까지 힘들여 쌓아올린 정신적 고매성의 문제, 염결성의 문제, 치열성의 문제와 같은 것들을 과감히 버리는 일이었다. 견고하게 침착된 정신가치를 감성적 가치로 치환하고자 했던 것인데 그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시를 향한 매진의 날들이 계속되고 그런 날들이 겹겹이 쌓이다 보니 정신의 피폐가 왔으며 차츰 내 육신이 비명을 지르게 되었다.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면 의식은 점점 명징해지면서 눈도 귀도 맑고 밝게 열리곤 하였다. 음식물을 넘길 수도 없었다. 잠을 못 자고 음식물을 넘길 수가 없었으니 체중이 하염없이 줄었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때론 불규칙하게 뛰기도 하였다. 꿈속에서도 시에 매달렸었다.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증상을 공황장애라 부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몇 년을 그런 상황 속에서 시를 안고 뒹구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위의 시 「구시가의 밤」은 이런 정신의 황폐 속에서 건져 올린 시이다. 「구시가의 밤」은 황폐화된 자의 내면을 토로하고 있는 시이며, 그런 황폐화 된 자아를 극복하고자 하는 자의 표현 욕구를 담고 있는 시이다.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수술대 위에 누워있다.
“새벽길로 달려간다. 흔들리는 캄캄한 손들, 뼈가 보인다. 까마귀가 날아와, 가지가 휘어졌다. 기울어진 길로 말이 말을 싣고 뛰어간다. 신경은 짧게 울고 문은 열린다. 사면이 흰 방엔 독수리가 피를 흘린다. 죽은 숲이 흔들린다. 먼지를 쓴 채 놓여있는 귀, 메스와 바늘이 보인다. 눕혀진다.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많아진다.”
몽혼(夢魂)되어 가는 자의 의식 풍경이 짧고 긴박한 이미저리로 중첩되어 있다. 20대 문청 시절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이런 몽혼 풍경 속으로 끌려 들어가곤 했었다. 이건 그야말로 황무(荒蕪) 그 자체였다. 난파되어가는 정신의 길은 흔들리는 손들과 까마귀와 피 흘리는 독수리들은 불운한 운명을 예시해 보여준다. 메스와 바늘, 그리고 많아지는 흰 가운의 사람들로 해서 수술의 진행 과정이 암시적으로 제시된다.
“목발을 짚고 병정이 돌아온다. 허리 부러진 비행기가 푸득이며 추락한다. 의식의 어느 암반에서 비명이 들린다. 바늘이 살에 꽂힌다. 모든 시각이 빠져나간다. 아득한 유년의 구릉 위를 달려가는 말은 다리가 세 개 뿐이다.”
‘목발을 짚은 병정’ , ‘허리 부러진 비행기’, ‘다리가 세 개뿐인 말’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의 불구성을 들어내 보여주는 구절들이다. 병정은 목발을 짚고 있으며, 비행기는 허리가 부러져 있다. 그리고 말은 다리 하나가 소실된 채 세 개만의 다리로 달려가고 있다. 이 시기에 느꼈던 이 ‘불구감’이 1960년대 후반의 내 정신의 위기를 단적으로 들어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수술대 위에 누운 자아가 간구하는 것은 다시 ‘새로운 몸’이 되어 새롭게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파괴된 구시가에 새로운 뜻”이 되어야 하는 것이며 누구에겐가 호명되어주었으면 하는 것이 내 유일한 바램이었다.
시 「구시가의 밤」이 발표되고 나서 시단에서 몇몇 시인들이 엽서를 보내오기도 했었다. 동인활동을 함께하자는 분들도 있었다.
위의 시 「구시가의 밤」을 다시 읽으며 나름의 감개에 젖는다. 시 속에 상식이나 타성에 젖지 않으려는 결기도 보인다. 시 때문에 죽음의 문턱을 기웃거리기도 했던 문청시절을 돌이켜보니 그것도 ‘그리움’인 것을 알겠다. 몇 밤씩을 초롱초롱 뜬 눈으로 지새우던 밤들과, 하염없이 야위어가던 몸과 절망과 낙담까지 이미 멀리 가버린 것들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걸 알겠다. 그리운 것들은 늘 먼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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