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61> 남기고 싶은 이야기-박목월 선생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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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월 선생 댁을 찾아간 까까머리 고등학생>
내가 박목월 선생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59년 고등학교 2학년 학생 때였다. 학교에서 문예작품 발표회를 하게 되었고 박목월 선생과 조지훈 선생 두 분을 초청 연사로 모시게 되었었다. 두 분 선생님을 댁으로 찾아뵙고 초청 수락을 받아오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내가 박목월 선생 댁을 찾아 나선 것은 1959년 9월 20일 경이었다. 전화가 귀한 때였고, 편지 연락은 또 며칠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어서 직접 선생 댁을 찾아 나섰던 것. 선생 댁이 원효로 전차 종점 부근이라는 말만 듣고 무조건 원효로 행 전차를 탔고 원효로 종점에서 내렸었다. 원효로 4가 종점. 부근 복덕방을 찾아가 ‘박목월 선생댁’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놀라워라, 복덕방 영감님께서 선생댁을 친절하게 일러주는 것이 아니던가.
<사진 : 서울시내 고등학교 문학소년들과.(1959 )이 무렵 . 박목월 선생댁을 찾아갔었다.>
9월 20일 밤 8시경, 달이 휘영청 밝았었다. 신창동 비탈길 적산가옥, 거기서 선생을 뵈올 수 있었다. 헤아려 보니 그때 선생 연세 44세. 지금 같으면 이제 시단 중진급에나 속하셨을 연세에, 또 40세에 겨우 접어들었을 지훈 선생도 한국 시의 원로 자리에 우뚝 정좌하고 계셨음을 알았다. 이날 밤 까까머리 고등학교 이건청과 목월 선생의 어설픈 만남이 내 생의 명운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었다. 문예작품 낭독회는 10월 1일, 남녀 학생 좌석을 분리해서 앉힌다는 조건으로 막을 올릴 수 있었고 이 모임은 그 후 해를 거듭하면서 한국문학을 이끌어 갈 역량있는 문사들을 배출한 명망있는 자리로 뜻매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때 제1회 문예작품 낭독회 준비로 동분서주하던 문학소년은 후에 박목월 선생의 평생 제자가 되었고, 10 여 년 선생의 시작 지도를 받아 시인의 반열에 설 수 있게 되었으며 선생 작고 후 한양대 시학교수 자리에 설 수 있게도 되었었다.
이 때의 에피소드 하나. 아마 이날 행사 후 학교측에서 두 분 선생께 약간의 거마비를 드렸던 모양이다. 한창 장년에 접어드시는 두 분 선생께서 의기투합, 명동 주점으로 직행하셨던 것. 후에 목월 선생께서 들려주신 얘기론 그 집 술값을 3년 동안이나 갚았다 하셨다. 첫 번째 술 값 외상, 다음에 술값 갚자고 만나 외상, 또 외상…. 그래서 술자리 3년이 이어졌다는 것. 두 분 선생의 거칠 것 없었던 장년 풍경이 한없이 멋져 보이는 것인데…. 지훈 선생 47세, 목월선생 63세 타계라니 이런 폭음들이 겹치면서 건강을 해치신 것은 아닌지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박목월 선생 출생연도, 1915년>
2015년은 선생의 탄생 100년이 되는 해였다. 그동안 선생의 출생연도가 1916년으로 알려져 왔고, 거의 모든 문단 관계 기록도 그렇게 통용되어 왔다. 그런데 선생의 출생 기록들을 세밀히 살피고, 선생의 장남 박동규(朴東奎) 서울대 명예교수와도 협의하여 선생의 출생연도를 1915년으로 확정하게 되었다. 내게는 목월 선생 조부(祖父)부터 기재된 선생 집안의 원적부(原籍簿) 복사본이 있다. 선생의 모교인 대구 계성학교에서 목월 선생 기념사업을 준비하면서 발부받은 호적관계 서류이다. 1914년(대정 3년) 8월 25일에 이 원적부가 작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적은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 571번지. 조부는 박훈식(朴勳植), 이분의 장남 박준필(朴準弼)이 목월 선생의 부친이다. 박준필은 1912년(대정 원년) 1월 2일 김석천(金石川)과 혼인하였고, 1915년(대정 4년) 1월 6일 목월 선생이 출생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1916년(대정 5년) 12월 31일 박준필은 목월 선생을 박영종(朴泳鍾)이란 본명으로 호적 관계 서류에 출생신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외에도 선생의 공식 인사 기록들-한양대학교의 인사기록부, 선생의 주민등록 모두가 1915년생으로 되어 있다. 박동규 교수 역시 선친의 출생연도를 1915년이라고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도 용인에 자리한 선생 묘지의 묘비명을 쓴 김동리 선생도 박목월 선생의 출생연도를 1915년 1월 6일로 기재하고 있다. 잘 아는 대로 목월 선생과 김동리 선생은 문청 시절을 경주에서 함께 보낸 막역지우이다.
이상이 선생의 출생연도를 1915년으로 바로잡고, 선생의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을 벌이기로 한 연유이다. 기왕의 기록들은 어찌할 수 없지만, 사후에 탄신 100주년 기념은 원(原) 출생연도에 맞추어 행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이고, 유족과 협의하여 선생의 출생연도를 1915년으로 바로잡기로 하였고,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을 2015년에 개최하기로 확정했다.
박목월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축제는 목월 선생 문하생 모임인 「목월문학 포럼」, 선생께서 20여 년 봉직하시며 교육 열정을 쏟아 후학들을 길러내신 「한양대학교」, 선생의 필생의 문학 열정이 담긴 시전문지 심상사, 선생 문학 업적의 보존 센터인 「동리목월 기념사업회」 그리고 「한국시인협회」 공동주관으로 기획되어 2015년 3월 24일부터 6월 17일까지 성대하게 치루어졌다.
1920년 12월 3일 출생인 지훈 선생과 1915년 1월 6일 생인 목월 선생은 5년 쯤의 나이차이가 난다. 그러나, 두 분은 이런 나이 차이를 전혀 개의치 않고 필생의 지친으로 허교하며 지내셨다. 지훈 선생은 선비 전통으로 다져진 가풍 속에서 한시를 깊게 수용하게 되었고, 육신 나이 20을 전후한 때에 「승무」, 「고풍의상」, 「봉황수」등 원숙한 시편들을 썼다. 반면, 목월 선생은 개신교 집안, 신식교육 속에서 성장하며 1934년부터 동시를 발표하였고, 1940년 『문장』지를 통해 등단하였다. 지훈, 목월 두 분이 같은 시기 같은 지면에 같은 선자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지만 지훈 선생의 경우 그의 시가 지니는 조선조 시가 전통의 형식미와 고풍스런 언어미가 5년 나이 차이를 뛰어넘고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겠다.
뿐만 아니라 뿌리 깊은 한학 가풍 속에서 몸에 밴 대가풍의 선비의식이 지훈에게서 나타나곤 했음도 알겠다. 해방 후 목월 선생이 지훈 선생께 ‘이제 우리도 못 배운 학교 공부를 해야 하겠네’라 말하니 지훈 선생이 ‘무슨 소리를…, 이제 우리가 가르쳐야 될 것 아닌가?’라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목월 선생께 내가 직접 들은 말이다. 목월 선생은 삶의 일상 속을 인식해내는 여실, 섬세한 존재의 시를 쓰셔서 한국현대시의 정점을 보여주셨고, 지훈 선생은 『지조론』 ,『시의 원리』 등을 썼고,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장 등을 역임하는 선비풍, 대가풍의 삶을 사셨다.
<1969년, 변방 내 집을 찾아오신 선생님 내외분>
1969년 어느 날 선생님 내외분이 내 집을 찾아오신 적이 있었다. 영등포구 개봉동 주택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한 어설픈 동네였다. 집 밖에서 선생님께서 나를 찾고 계셨던 것. 놀라워라. 아직도 논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시골 주택 단지, 서울 끝 동네 거길 선생께서 찾아오시다니, 그때 나는 중학교 국어 교사였고, 이제 막 시단에 발걸음을 걸친 풋내기 시인이었다. 선생님 내외분은 교회 누군가의 차편을 빌려 가난한 숙맥 제자를 찾아 나서신 것이었다.“자네 보러 안 왔나….” 선생님 말씀이셨다.
나는 고등학교 재학 중, 그리고 선생 강의실에 앉아서도 시 쓰는 기본은 견고한 정신이 근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저작들, 가령 「문학을 지망하는 청년에게」, 「로댕」, 「말테의 수기」 같은 책들, 그리고 구라다 하쿠조의 「사랑과 인식의 출발」, 「선의 일기」 같은 책들에 빠져 있었다.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감각이나 상상력보다는 문학에 대한, 시에 대한 엄격한 절제와 경건한 몰입을 강조한 글들이었다. 10여 년 원고를 써들고 선생댁을 드나들었지만 선생께서는 자유분방한 감각이나 활달한 상상을 강조하고 계셨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생각해온 시를 버리고 선생께서 강조하시는 활달, 분방한 시편들을 새로 세우는 어렵고도 힘든 문학수업을 해온 셈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심한 정신공황 장애를 앓고 있었다. 먹을 수도 잠잘 수도 없었다. 몸무게가 형편없이 줄어들고 있었다.
아마도, 선생께서는 시 앞에 좌절만 되풀이하고 있는 초라한 제자에게 격려라도 베풀어주실 요량이었을까? 그날 나는 선생님 내외분과 함께 내 집 근처의 가을녘 논둑길 밭둑길을 걸었었다. 내 삶의 질퍽한 티끌 길을 몸소 찾아오신 선생님, 논둑길 밭둑길을 걸으며 베풀어주신 몇 마디 격려 말씀이 느껍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었다. 선생께서 필생의 과업으로 시작하신 월간시지 「心象」 일을 맡겨주신 것, 선생 사후 한양대학교 강단에 설 수 있는 토대를 다져주신 것, 선생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도탑기 그지없다.
<사진 : 첫 시집 [이건청 시집] 출판기념회(1970.5. 호수그릴). 박목월 선생께서 축사말씀을 하고 계신다.>
<까다로왔던 제자 선택>
박목월 선생은 시에 엄격하셨고 인간에 대해서는 다감하셨던 스승이셨다. 특히, 제자를 선택하시는 기준이 대단히 엄격하였다. 시적 재질과 인간적 품성을 통해 지속적으로 시에 헌신할 수 있는 자질인가를 선택의 기준으로 삼으셨던 것으로 생각한다. 박목월 선생께서 직접 선정해서 문단에 불러낸 시인은 30여 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박목월 선생의 문하 시인들의 면면은 알토란처럼 빛난다. 상당수 시인들이 선생의 슬하에서 시적 성숙의 과정을 거쳐 시단에 등단한 이후 용맹정진의 길을 달려, 2000년대 한국 시단을 견인해가는 자리에 우뚝 서 있다.
허영자, 김종해, 오세영, 이건청, 신달자, 윤석산 등은 한국에서 가장 오랜 전통과 권위를 인정받는 시인단체인 한국시인협회 회장으로 한국 시단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신규호, 유승우 등은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의 중책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목월 문하의 시인 7명이 한국의 양대 시인단체의 수장으로 추대되어 한국시 발전에 기여하였고, 시업에 정진하여 높은 성취를 이룩한 것이다. 그리고 오세영, 유안진, 신달자 등은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되었다. 김종해, 박건한, 유재영, 이명수 등은 한국의 출판문화 창달에 신명을 다하고 있는 분들이다. 목철수, 조우성 등은 언론계에서 빛나는 활약을 보여준 시인들이다. 목월 문하의 시인들 중 상당수는 대학 강단에서 시학 교수로 후진 양성에 헌신해왔다. 이중, 허영자, 이승훈, 유안진, 오세영, 김제현, 권국명, 이건청, 유승우, 신달자, 신규호, 조정권, 윤석산, (고)권명옥, 김용범, 김명배, 신협, 한광구, 박상천, 이상호 등이 대학교수로, 시인으로 빛나는 업적들을 쌓은 분들이다. 김성춘, 추명희, 서종택, 한기팔 시인 등은 중등학교 관리 책임자로, 시인으로 빛나는 업적들을 남기고 있다.
<1970년대 한국시의 견인, 월간 시지 『심상』>
월간 시지 『심상』은 박목월 선생께서 1973년에 필생의 사업으로 창간하신 잡지였다. 선생께서는 이미 몇 번의 월간지 창간 경험이 있으셨다. 1949년 출판사 산아방을 열고 『여학생』을, 1950년엔 『시문학』을 간행하는 등 잡지 간행에 뜻을 두고 계셨던 것. 그러니까 1973년의 월간 시 전문지 『심상』의 간행은 오랜 열망이 담긴 큰 사업이었던 셈이었다.
『심상』은 1973년 10월호가 창간호로 발매되었지만 이 잡지의 실무팀이 만들어지고 바쁜 일정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5월부터였다. 목월 선생께서 “이군, 밤 시간을 비워 놓거래이”라는 말씀은 1973년 정초부터 있었다. ‘밤 시간’을 말씀하신 것은 『심상』이 전임 유급 직원을 채용할 수 없었던 잡지 형편 때문이었다. 박목월 선생께서 한양대 강의 끝나고 관철동 사무실로 퇴근해 오시고, 김광림 선생이 외한은행 본점에서, 김종해 시인이 정음사 퇴근 후, 내가 한양공고 교사 끝내고 밤 시간에 모여야 잡지 창간 실무팀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편집위원 박목월, 박남수, 김종길, 이형기, 김광림, 실무스텝에 김종해, 이건청이었다.
『심상』은 매호 편집회의를 거쳐 기획된 원고를 싣기 시작한 잡지였다. 박목월, 박남수, 김종길, 김광림, 이형기 선생들이 머리를 맞대고 편집 아이템을 짜내기에 골몰하였다. 그리고, 대학 강단 교수들이 대거 필자로 동원된 잡지였다. 김우창, 이상섭, 김현, 김주연, 손재준, 민희식, 전광진 교수 등이 집필에 참여해주었다. 서울대 차주환 교수는 동양 시론을 연재로 집필해주었다. 시의 경우 경향별로 묶일 수 있는 시인들의 작품을 싣고 수록시인들의 합동 좌담을 실어 문학사적 맥락을 밝히기로 했었다. 『심상』은 한국 시잡지 사상 최초로 상업광고를 게재한 잡지였다. 창간호에 코카콜라, 맥스웰 커피, 도서출판 삼중당, 계몽사, 보령제약 등의 별지 광고를 수록했었다. 『심상』 한 권 정가가 250원이었을 때 광고료는 큰돈이었다. 통권 2호부터 실린 OB 맥주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OB" - 이런 광고 캡션이 심상 편집진의 머리에서 나왔다. 맥심 커피 광고에 그린 담배 파이프 그림이 박목월 선생 그림이었다. 『심상』이 청탁원고와 원고료를 맞바꾸는 시도도 그런 광고료 등의 뒷받침으로 시도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상』은 원고의 질에 대해서도 엄격한 기준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청탁원고 중 어떤 경우 원고료를 지불하고, 게재를 보류한 경우도 있었다. 또, 이 시기 한 시인을 선정하고 시인의 산문과 작품론을 게재하는 특집 시 코너가 있었다. 허만하 시인께 청탁서가 갔고 작품이 도착하였다. 그런데, 편집위원 중 한 분인 김종길 시인이 청탁원고의 게재를 보류하자는 것이었다. 허만하 시인 정도면 더 나은 시를 쓸 수 있을 테니 다음 기회를 기다려 보자는 것이었다. 김종길 시인과 허만하 시인은 시단에서 알만한 사람은 아는 지친이고 선후배였다. 작품은 반송되었고 다음 호에 다른 작품이 게재되었다. 나는 내가 월간 시지 『심상』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직접 목격한 이 에피소드가 시 잡지가 지녀야 하는 절대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참으로 아끼는 선후배 시인 사이의 문학적 우정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 가를 목격한 것이었다고 믿는다. 박목월 선생께서 직접 잡지 편집을 관여하신 초창기 5년여의 『심상』이 한국시문학사의 모범적인 업적들은, 잡지 간행에 깃들여진 세세한 노고들이 값진 거름으로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심상』이 창간된 1973년으로부터 잡지 간행 실무를 맡기 시작해서 선생께서 작고하신 1978년 3월까지 나는 『심상』을 위해 일했다. 1978년 5월호 「추모 전권특집 박목월 선생」을 펴내고 나는 심상을 떠났다. 「목월문학 포럼」은 선생께 직접 시적 감화를 받고 성장한 문하 시인들의 모임이다. 나는 최근까지 이 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나는 좋은 스승에게서 시인으로 살아가는 바탕을 익혔고, 시인으로 바로 서는 덕목을 배울 수도 있었다. 홍복이라 생각한다.
<1978년 3월 24일 선생님 타계하시다>
선생께서 건강 이상을 겪는 날이 많아지고 있었다. 심상사 사무실 출입을 건너시는 날도 있었다. 한양대학 병원에 며칠씩 입원하시기도 하셨다. 선생께서는 고혈압 투병을 하고 계셨다. 혈압 강하제를 투약해서 혈압을 조절하면 신장에 무리가 온다는 것이었다. 입원실에 며칠씩 입원을 하시기도 하셨었다. 몸도 마음도 편히 쉬시라는 입원 - 그런데, 편히 쉬시기는커녕 밤새워 시를 5편이나 쓰신 적도 있었다. 의사도 사모님도 걱정이셨다. 이 무렵의 선생께서 쓰신 작품들은 인간 존재와 한계에 대한 깊은 자각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10여 년 동안 맡아오던 한국시인협회 회장의 직책을 내려놓으시겠다는 단안을 내리시고 계셨었다. 벌써 몇 차례씩 회장직 고사의 뜻을 밝히셨지만 벌이고, 추진해온 일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힘든 직책을 맡아오고 계셨었다.
‘1978년 3월 26일’로 그 해 한국시협 정기총회를 공지하고 있었으며 차기 회장을 선임. 책임을 넘기기로 하고 있었다. 선생께서 내게 전화를 걸어 한양대학교 문리대학장실을 들려가라는 말씀을 주고 계셨다. 3월 23일 오후 4시경이었다. 아마도 시협 회장 인수인계에 따르는 몇 가지 말씀을 주실 것이었다. 한양대 문리대 건물은 한강 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부딪는 곳에 있었다. 스산한 날씨였다.
이날 선생께서는 퍽 유감어린 음성이셨다. 시인협회장 인계에 따르는 사무적 지시 말씀을 주신 후 모처럼 여유롭게 선생과 마주 앉게 되었었다. 선생께서는 『심상』 편집 일로 공연한 입방아에 오르기도 하는 제자의 처지를 다독여주셨다. 그리고, “이제 내가 다시 한 번 시에 도전할 때가 되었다 ….” 결연한 음성의 말씀을 주셨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내가 선생의 육성으로 들은 마지막 음성이었다. 선생은 이 세상 떠나시기 15시간 쯤 전에도 “시를 향한 새로운 도전”을 다짐하고 계셨던 것이다.
24일 아침 7시 30분경 박동규 형의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 건청 형 빨리 빨리 좀 와 줘요. 아버님이…,아버님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께서 산책길에 낙상이라도 하신 줄 알았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어요….”
정신없이 달려 선생님 댁에 도착하니 오전 9시경. 선생님께서 이불을 덮고 누워계셨다. 한 생애의 노고를 벗고 편안하신 표정이었다. 우선 선생의 별세 소식을 언론 등에 알리는 일이 급선무였다. 정신없이 각 방송사와 일간 신문사의 다이얼을 돌렸다.
<한양대학교 캠퍼스에 목월시비 건립>
목월 선생 작고 후 선생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시비를 건립하기로 뜻이 모여져 심상사를 중심으로 일이 추진된 바 있었다. 그러나, 이 시비 건립 기념사업은 이런 저런 이유로 이뤄지지 못한 채 지지부진 오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선생께 송구스런 일이었다.
나는 선생 작고 후 1980년 3월부터 한양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선생의 체취어린 대학 캠퍼스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한양대학교는 1939년, 동아공과학원이라는 공업교육 기관으로 설립되어 대한민국 굴지의 공과대학으로 성장한 학교이다. 이 대학 설립자의 학교설립 목적이 ‘쟁이’를 길러내 부국을 이루겠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거의 모든 종합대학이 인문대가 첫 번째 순위에 기록되지만 한양대학교는 공과대학이 첫 번째 순위에 적힌다. 공과대학이 중심이 되다보니 한양대에서 인문정신, 인문전통은 미약하기 짝이 없는 형편이었다. 한양공과대학교는 1959년에야 문리과대학이 설립되었고 이때 국어국문학과가 설립되어 첫 입학생 20명을 선발하였다. 한양대학교와 박목월 선생은 이 무렵부터 인연을 갖게 되었으며 1961년 교수로 임용되어 후학을 기르기 시작하였다.
이제 한양대학교는 전 대학 전 학과가 장족의 발전을 이루고 있다. 초창기 미약하기만 하던 문학 전통도 큰 발전을 이루고 있다. 한양대학교의 인문 문학 전통은 박목월 선생께서 한양대학교에 부임하신 후 융성 발전을 이룬 것은 자타가 두루 아는 사실이다. 전국의 문학 인재들이 선생의 슬하를 찾아 모여들었으며, 시적 열정이 결집되면서 한국 문단을 견인해갈 인재들이 두루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65년 11월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제1회 문학작품 낭독회가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권명옥 이승훈 이건청 3인이 Dylan Thomas의 시 「Fern Hill」을 입체 낭독했었다. 이것이 한양대학교에서 치뤄진 첫 공식 문학행사였다.
1990년 경, 나는 한양대학교의 역사 기록 자료를 수집 정리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고, 대학 설립자 김연준 선생을 자주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김연준 선생을 독대하는 기회에 한양대학교 캠퍼스 내에 목월 시비가 건립되어야 할 필요성을 설명 드리니, 김연준 선생이 흔쾌히 납득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곧장 전화기를 들어 아드님이기도한 김종량 총장에게 ‘목월 시비’ 건립을 검토해보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한양대 국문학과 동문들과 대학출신 문인들을 중심으로 건립기금 모금이 시작되었으며, 건립 추진의 주체가 될 [박목월 선생 시비건립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일이 추진되었으며, 1993년 6월 7일 개막식을 맞게 되었다.
시비는 사범대 뒤 잔디광장에 건립되었으며 단양 산 형상오석(形象烏石). 무게 7t의 거석. 전면에 목월 선생의 시 「산도화」가 새겨졌으며, 뒷면에 시비기(詩碑記)가 새겨졌다. 글씨는 김양동. 건립비 중 5천 만 원이 한양대학교에서 지원되었다. 그 후 2011년 자연대 건축으로 시비는 인문대 187 계단길에 [목월시 정원]을 조성하면서 이전 재건립되었다. 시비가 옮겨와 재건립된 자리는 목월 선생이 강의를 위해 출퇴근 하실 때마다 오르내리시던 비탈길, 선생의 체취어린 장소이다.
<사진 : 목월시비(한양대학교 목월시동산) 앞에 선 문하생들. 좌로부터 김종해, 이건청, 오세영, 신달자(2008.3)>
이제, [목월시비(木月詩碑)]는 한양대학교 10대 명소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졸업식 등 행사 때 마다 기념사진을 찍는 랜드 마크로 자리 잡았다, 간혹, 한양대학 출신 동문들이 결혼식 기념사진을 찍을 때도 모교에 들러 목월 시비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단골 촬영장이 되었다고 한다. [목월시비(木月詩碑)]의 시비기(詩碑記)는 시인 박목월 선생의 문학사적 업적과 한양대학교가 교내에 [목월시비(木月詩碑)]를 세우는 의의와 바램을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내가 글을 썼고 [박목월 선생 시비건립 추진위원회] 이름으로 시비 뒷면에 새겨진 시비기(詩碑記)의 전문을 기록으로 여기에 남긴다.
“위난의 시대일수록 시는 밝은 빛이 되어 어둠을 밝힌다. 목월 박영종은(1916~1978) 1940년을 전후한 간난의 시대로부터 가장 탁월한 모국어로 한국인의 느낌과 생각을 노래해 보여준 대표적 민족시인이다. 목월은 한국시의 성장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시인이다. 평생을 시의 길에 매진하여 『청록집』, 『산도화』, 『난. 기타』, 『청담』, 『경상도의 가랑잎』, 『무순』 등의 시집으로 한국 순수시의 광활한 지평을 열었으며 한국시단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61년 한양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신 이후 후진 양성에 열과 성을 다하신 노력이 느껍기 그지없다. 이제, 시에 준업하셨고 인간에 다감하셨던 스승 목월의 체취 아로새겨진 행당동산에 한양대학교와 그의 가르침을 받은 후학들, 그리고 문학적 감화를 입은 대학출신 문인들이 그리움의 마음으로 돌을 세우니, 이곳에서 시대와 역사 밝혀줄 예지의 밝은 빛 타오르리라. 한양대학교의 전통 속에 새겨진 선생의 보람 날로 발전하는 대학의 숨결 속에 영원할 것이다.
1993년 6월 일 박목월 선생 기념사업회 짓고 근원 김양동 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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