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성과 인간성을 고려한 통일비용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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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에 대한 학술회의에서 가끔 나는 통일비용을 처음으로 추산하여 발표한 사람으로 소개되곤 한다. 물론 나의 학문적 기여를 칭찬하기 위한 소개이다. 나 자신 정말 최초로 통일비용을 추산했는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통일비용이 거론되지 않을 때 이에 대해 연구하여 몇 차례에 걸쳐 발표한 것은 사실이다. (“Economic Integr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A Scenario Approach to the Cost of Reunification" in "The Korean Economy At a Crossroad" edited by Sung Yeung Kwack, 1994)
그런데 최근 통일 대박론이 거론되면서 통일의 비용만 거론하고 통일이 가져올 막대한 이득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물론 옳은 비판이다. 경제적으로 엄격히 말한다면 통일의 이득과 비용을 모두 계산하고 그 차이가 양수로 나타날 때 통일이 경제적으로 추진할 가치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통일의 이득을 계산하기가 몹시 어렵다는 데 있다. 사실 통일의 이득은 경제적 개념으로 추산하기 어려운 많은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예컨대 통일이 되면 한국의 위상이 국제정치적으로 크게 신장될 터인데 이를 계량화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통일은 우리 경제의 규모를 크게 함으로써 규모의 경제성을 가져다 줄 터인데 이를 계량화하는 일조차 쉽지는 않다. 더욱이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고 또 북한의 주민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등의 비경제적 이득은 계량화가 아예 불가능하다. 그렇게 어려운 통일이득의 계량화를 피해가는 길의 하나는 통일의 비경제적 이득이 몹시 클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 통일 이득을 강조할 필요는 있으나 구태여 계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통일의 이득은 내버려둔 채 비용만 추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 통일 이득이 무조건 크다고 가정한다면 통일을 그냥 추진하면 될 것이지 통일 비용을 추산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여기서 비용의 개념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에서 비용이라 함은 기회비용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함에 따라 다른 선택지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데 이 때 포기하게 되는 여러 선택지 중에 가장 높은 가치가 기회비용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통일이 어떤 하나의 과정 또는 경로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예컨대 급진적 통일 혹은 점진적 통일, 흡수통일 혹은 합의통일 등등 통일의 형태를 여러 가지로 상정해 볼 수 있다. 이런 통일의 다른 형태에 따라 비용이 달라질 뿐 아니라 남한이 북한을 경제적으로 얼마큼 지원해 줄 것인가에 따라서도 비용은 달라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높은 이득을 가져다주는 통일은 추진하되 되도록 낮은 비용이 드는 통일의 형태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바로 통일에 합리성을 고려하자는 것이다.
사실 내가 통일비용을 추산할 당시 남북한 사람들이 만나기만하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눈물을 흘리면 열창하고 있었다. 경제학도인 나는 그런 감격 속에서도 합리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통일비용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통일비용에는 북한에 낙후된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비용과 북한주민의 생활보장비, 북한의 교육 및 의료, 보건 인프라 건설비, 북한사회의 체제구축비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비용들은 결국 우리가 어떤 수준의 복지를 북한주민들에게 허용할 것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통일이 된다할지라도 휴전선을 유지하면서 북한 주민이 남쪽으로 넘어 오지 못하게 한 채 북한에 아주 적은 수준의 복지수준만을 유지시키는 경우를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보다 나은 생활수준을 찾아 남하하려는 북한 주민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가? 그들을 잡아 가두거나 총부리를 겨누어야 할까? 그런 경우는 엄밀히 말해서 통일이 아니다. 즉 우리는 어느 정도의 북한주민에 대한 지원을 통해 북한 주민이 북한에 거주하게끔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하여야 한다. 어느 정도의 생활 수준이 보장된다면 북한주민들이 대량으로 남하하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독일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졌었다. “돈을 보내라, 아니면 우리가 건너간다.” 통일 후 동독 사람들의 외침이다. 여기서 우리는 통일이 목표로 하는 ‘인간성’의 추구를 어떤 수준으로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통일 직후 서독 정부는 동독 주민들이 지니고 있었던 거의 가치 없던 동독 마르크를 일정한 량까지 서독 마르크와 일대일의 환율로 교환해 주었다. 동독 주민들의 생활을 보장해 주기 위한 조치였다.
우리 경우는 어떠해야 하나? 현재의 남북한의 생활수준 격차는 너무 커서 북한의 생활수준을 남한의 80%가 되게 하기는 너무 벅차다. 학계에서는 대략 60%를 보장한다면 북한주민들의 이동을 막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이때 우리는 남한의 GDP의 4 내지 5 %를 약 20년간 북한지원에 쓸 필요가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적지 않은 비용이다. 그러나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통일 후 국방비를 약 1% 정도 절약하고 국민의 조세 부담을 약 2% 증가시키고, 지금의 정부세출예산을 절약하거나 해외로부터 기채하여 나머지 1% 내지 2%를 충당할 수 있다. 아울러 통일이 이루어져 남북한 경제가 결합되면서 경제성장이 활성화 된다면 이런 정도의 비용은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북한의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와 시장경제 체제구축은 남북한의 경제활동을 활성화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여태껏 학계에 보고된 통일 비용에 대한 추정은 그 수준이 천차만별이다. 큰 추정치는 작은 추정치의 10배 이상이 되기도 한다. 이는 결국 각 추정치가 어떤 통일, 어떤 수준의 북한 주민 생활을 보장할 것인가에 대한 서로 다른 가정에 의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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