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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동의 문화시평 <40> 추락하는 우상들의 날개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4년09월02일 16시30분
  • 최종수정 2024년09월02일 09시18분

작성자

  • 김찬동
  • 전시기획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초빙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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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최근 만난 한 지인으로부터 젊은 날 자신이 우상으로 여겼던 인물들이 하나둘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한탄의 소리를 들었다. 이는 고매한 인품과 학식을 갖추고 사회적 명망가로 존경받던 인물들이 비리에 연루되어 언론에 오르내리거나, 민주화와 사회정의를 부르짖던 인물들이 표리부동한 민낯을 드러내는 경우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 대부분은 각자 한두 명의 개인적 우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존재는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롤 모델이 되기로 하고, 그들이 있으므로 세상이 밝아지고 살맛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모두가 썩고 부패한 절망스러운 현실이라 하더라도 각자의 우상들은 희망이며 위로이다. 그런 존재로서의 우상이 빛을 잃고 무너져 내린다면, 우상 소유자들의 실의는 그들의 존재 자체를 무너뜨릴 정도로 심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우상이 존재할 수 있는가? 성경은 하나님 이외의 신을 섬기지 말라 했다. 그것들은 돈과 명예와 권력, 그리고 쾌락과 같이 허망하고 신뢰할 수 없는 우상들로서 그를 의지하고 신뢰할 때, 파탄과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상은 다른 한편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여 대리 만족을 느끼고자 하는 대상이다. 이 때문에 욕망의 끝은 늘 허망한 열패감으로 마감되는지도 모르겠다. 팬덤의 메커니즘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우리 시대 우상은 어떤가? 대중문화의 스타, 정치지도자, 전문 경영인, 학자와 예술가 등등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우상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추락하는 모습들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경험한다. 근대엔 이광수나 최남선 등이 그랬고, 멀지 않은 과거엔 황우석 씨와 같은 인물도 떠오른다. 한때 시대의 우상들로 인기와 존경을 한 몸에 받았지만, 변절과 허위로 삽시간에 나락으로 추락했다. 

 

  최근 전남 강진군이 문화재청장을 지낸 미술사학자 유홍준 씨의 기념관을 짓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생존 인물을 대상으로 한 기념관 건립의 타당성 여부는 물론 당사자인 유 씨의 수용 태도가 문화계 내에 회자하였다. 강진군은 기존의 다산기념관 일부에 공간을 조성하고 유 씨의 두상도 설치할 계획이라 한다. 여론이 시끄러워지자 강진군은 그저 계획을 검토 중이고 아직 결정된 바는 없다고 슬쩍 발뺌하는 모양이다. 강진군은 기념관 조성을 통해 지역의 관광 활성화를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유 씨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993-,창비) 시리즈의 출간을 통해 전 국민에게 문화유산에 대한 중요성과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자신도 일약 스타가 되었다. 강진군의 스타마케팅을 유 씨는 거절치 못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논리라면 책에서 다룬 유적을 가진 지방자치단체들은 앞다투어 유 씨의 기념관을 조성해야 할 것이다. 

 

  생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미술관을 건립하는 작가들이 종종 있다. 자기 작품으로 사립미술관을 조성하는 경우가 그것인데, 이는 별로 명예로운 일이 아니어서 대개는 업계로부터 많은 빈축을 산다. 하물며 공적 공간에 생존자 명의의 기념관을 짓는 일은 결코 명예롭지 못한 처사이다. 자신이 명예와 공을 스스로 자랑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유 씨는 강진군의 이러한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어야 옳다. 학자나 예술가의 진정한 명예는 타인들에 의해 사후에 연구 결과나 예술적 성취로 말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유 씨는 오래전 추사 김정희 연구서인 『완당평전』(2002. 학고재) 을 출간한 바 있다. 하지만 소장 학자로부터 200여 곳의 오류를 지적받으면서, 이를 겸허히 받아들여 평전의 출간을 중단하였다. 학계는 이를 학자다운 양심의 발로로 평가했다. 하지만 이후 이를 수정 보완하여 증보판 『추사 김정희』(2018, 창비)를 출간하였지만, 이번엔 표지의 제목으로 사용한 글씨부터 추사의 위작 글씨가 다량 수록되어 전문가들로부터 따가운 지적을 받았다. 이로 인해 그의 전문성과 권위가 두 번째의 굴욕을 겪은 셈이다. 이 저작물에 대한 후속 조치에 대해 아직 들은 바 없다. 이 외에도 해남 대흥사의 대웅전에 걸려 있는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의 현판 ‘대웅보전(大雄寶殿)’에 얽힌 유명한 ‘전설’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산사 순례』(2018.창비)에서 아무런 사료적 근거 없이 ‘사실’로 만들어 버렸다. 한 연구자가 이에 이의를 제기하자 그는 “모든 사람이 전설을 인정하게 되면, 전설도 사실이 되는 것이다. 굳이 ‘전설에 따르면’이라고 할 이유가 없다.” 라고 답했다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무책임한 발언은 학자로서의 그의 도덕성을 의심케 하는 처사이다. 사실 세간의 존경을 받는 전문가로서의 위상을 지켜내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그리고 인간인 이상 오류를 낳는 일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권위자의 영향력을 생각할 때, 오류를 정확히 인정하는 태도는 그를 더 존중받게 할 것이다. 유 씨가 강진에 자신의 기념관을 조성하여 오명을 남기는 일은 없길 바란다.

 

  최근 근.현대사에 대한 논쟁이 심각하다. 광복의 의미나 건국절의 시기를 둘러싼 논쟁들로 국론이 분열될 지경이다. 물론 역사는 지속해서 현재 상황에 맞게 재해석될 수 있는 대상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 자체가 왜곡되는 일은 곤란하다. 역사 연구는 사료를 근거로 하며 새로운 사료가 발견되면 사실 자체도 바로잡혀야 한다. 사료에 근거하지 않거나 사료를 임의로 해석하는 문제는 역사 연구의 가장 치명적 오류를 불러오기도 한다. 최근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학술원 회원)가 20여 년간의 안중근 연구 성과를 『지식인 안중근』(2024.7.24.)에 담았다. 그는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바 있고, 대한제국과 고종에 관한 전문가이다. 도쿄대학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의 근대사를 강의하기도 했던, 한때 젊은 역사학도들의 우상이었다.

 

최근의 저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안중근을 국제적인 지식인의 반열에 올리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안중근의 공판에 당시 일본에 망명 중인 중국의 학자 양계초(梁啓超)가 참가했을 정도로 안중근은 양계초와 대등한 수준의 지식인이었음을 밝히고자 했다. 하지만 한 중견 학자 겸 언론사 기자가 그 연구가 오류투성이이며,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의 연구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물론 저자인 이 교수는 아직 이에 대한 답이 없다. 중견 학자는 이 교수의 책에서 그가 양계초라고 제시한 법정의 사진이나 양계초가 남긴 해당 날짜의 일기를 보면 그날 그가 법정에 가지 않았다는 명백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망상적 기술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권위를 가진 노학자가 20년 동안 어떤 연구를 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참고문헌인 해당 사료를 보지 않았거나 보았더라도 이를 임의로 날조한 결과이다. 이것은 그의 권위를 신뢰하는 후학들을 기만함은 물론 역사를 왜곡하는 처사이다.

 

  2019년 미술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우환 화백의 위작 사건 역시 우리 시대 우상이던 그의 명예를 추락시켰다. 재일작가인 그는 1960년대 말 일본 화단에 ‘모노하(物派)’라는 미술운동을 일으킨 핵심 작가이며, 미술평론가로 등단하여 시대를 풍미하던 미술계의 우상이었다. 최근까지도 그의 명성과 대내외적 위상을 앞지를 국내 작가는 별반 없다. 하지만 위작 사건을 접하면서 많은 이들은 크게 실망했다. 위작을 제작한 범인들이 검거되어 해당 작품의 제작 과정을 실토했고, 작품의 과학적 감정의 결과까지 위작임이 드러났음에도 작가 본인만 그것이 자신의 호흡을 담고 있어 진작임이 틀림없다고 강변했던 촌극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물론 전속 화랑과의 관계에서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추론하지만, 많은 이들은 그의 태도에서 위선을 보았다. 진정한 우리 시대의 우상으로서 그에게 기대했던 바는, 마치 일반 혐의자처럼 “내 작품엔 위작이 한 점도 없다.”라는 신경질적 강변이 아니라, 당당하게 “ 내 작품은 위작이 유통될 개연성이 있으니, 좀 더 철저히 수사해 달라”고 점잖게 수사당국에 요구하는 대가의 의연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우리 시대 우상은 과연 존재하는 걸까? 짧은 기간 인기를 구가하다 사라지는 대중적 우상이나 선동과 선전으로 만들어진 허위로 가득한 우상이 아닌, 권위와 양심을 갖춘 진정한 우상을 기대해도 될까? 빠르게 변모하는 세태에 영합하는 우리의 거짓 우상들은 진실을 견디지 못하고 여기저기 우수수 추락하고 무너져 내리고 있다. 세태로부터 자유로우며, 당당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어둡고 황무한 시대에 빛을 밝힐 진정한 큰 사람들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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