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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48> 국토를 제대로 지켜라 (V) 동북방 경략과 6진 설치③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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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12월02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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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V.6 6진 완성 : 김종서를 함길도로 보내다 

 

함길도, 경원, 경성 등 북방지역에 관해 세종이 확고한 국경방어 및 국경확장의지를 갖고 있음에 반해 대다수 대신들은 매우 소극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신하들과 함께 북방지역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고 나아가 공험진 옛날 국토를 다시 되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세종 본인만큼 적극적으로 함길도 북방영토 문제를 추진해 줄 사람을 찾아야 했다. 이것이 세종의 고민이었다. 그리고 그 답은 김종서였다. 승지 및 대언으로 가까이 있으면서 임금의 뜻을 잘 알고 있는 김종서가 그 역할을 잘할 수 있으리라 확신이 섰다. 세종은 파저강 전투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동맹가첩목아도 죽은 직후인  세종 15년 12월 김종서를 함길도 도관찰사로 임명했다. 이 때 김종서 나이는 꼭 쉰이었다. 세종이 최측근 김종서를 함경도로 배치시킨 이유는 함길도 주변의 북방영토 확보가 세종에게 가장 중요한 정책과제였기 때문이다. 

 

경원지역을 포함한 함길도 북쪽 지방에 대한 세종의 확고한 국토방어의지는 의정대신들에게 한 다음의 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자고로 중흥왕으로서 땅을 근본으로 하지 않은 적이 없음은 역사책에

    명백히 볼 수 있다. 우리나라가 두만강을 북쪽 경계로 하여 하늘이

    만들고 땅이 설치한 웅장한 울타리에 호위된 강토로 둘러싸여 태조가

    경원부를 공주(경흥)에 설치하고, 태종은 소다로로 옮겼으니 그 모두가

    그 곳이 중요하고 기초가 되는 기지(基地)이기 때문이었다. (중략)

    경원부를 소다로에 다시 복원하고 영북진을 알목하(회령)로 옮기겠다.

    이곳에 사람을 이주시켜 튼튼하게 하고자 한다. 이는 조종의 험지봉토를  

    근엄히 지키고 주변 백성들의 교대수비의 노고를 작게 나마 덜어주자는   

   것이지 영토를 개척하고 넓히는 큰 공을 즐겨서 하자는 것이 아니다.

    (自古帝王 莫不中興王地之 以爲根本 考諸史冊 班班可見 且我國家北界豆    

   滿江 天造地設 雄蕃衛而限封域 太祖始置慶源府于孔州 太宗移府治于蘇    

   多老 皆其所以重肇基地之(中略) 復還慶源府于蘇多老 移寧北鎭于斡木河   

   募民以實之 謹守祖宗天險地封彊 少寬邊民迭守之勞苦 非好大喜功 開斥   

   境土之比 : 세종 15년 11월 21일)“ 

 

함길도 관찰사로 부임한지 석 달 동안 이 지역을 전부 순찰한 김종서는 순찰결과를 바탕으로 다섯 가지 방어시책을 임금께 건의하였다(세종 16년 2월 14일).:

 

   (i) 알목하는 농지는 적지만 전략상 요충지이므로 3천 척 성을 건축할 것,

   (ii) 용성의 영북진을 백안수소로 북진시킬 것,

   (iii) 경원부를 더 북쪽인 소다로로 이전할 것,

   (iv) 공주성을 재수축할 것,

   (v) 경원부와 영북진을 모두 도호부로 승격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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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목하는 전략적 요충지이므로 반드시 성을 건설해야 한다고 김종서는 주장했다. 이 성이 6진의 하나인 회령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세종 14년 6월에 석막(지금의 부령부근)에 석성을 쌓아 구축한 영북진은 너무 남쪽에 있으므로 이를 약 40리 북쪽에 있는 백안수소(지금의 행영)으로 옮기자는 것이었다. 국토방위의 핵심거점인 영북진을 더 북쪽으로 올림으로서 장차 경원과 경흥을 뒷받침함은 물론 종성, 온성 등 육진으로 강역을 확산시키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성 북쪽에 있는 경원부를 옛 태종 때의 경원이던 소다로로 옮기자고 했다. 세종은 즉각적으로 김종서의 제안을 100% 받아들였다.


[육진(六鎭)의 기초 : 신설 사진(四鎭)]

 

태조는 목조의 근원지이던 공주(경흥)에 행정관청 부를 설치하고 경원부(慶源府)라 하였으나 영토를 북쪽으로 더 확장하고 싶었던 태종은 100여리 더 북쪽의 소다로로 경원부를 옮겼었다(태종 9년). 그 다음해 동맹가첩목아 등의 무리가 습격해와 경원부사 한흥보 등이 살해되는 경인년의 변이 일어났고 이후 주민들을 경성군으로 옮기고 경원부는 비워두었다. 중국이 옛 경원지역에 행정기관을 둘 거라는 첩보가 들어오자 태종은 서둘러 태종 17년에 경성 두롱이현 이북 부가참에 경원부를 다시 설치하고 경원도호부로 승격하였다. 세종은 김종서의 건의를 즉각 수용하여 옛 경원부 땅 소다로에 경원부(府)를 다시 세우고 사람을 옮겨 살게 했다. 이것이 세종 육진 중 제일 먼저 설립된 경원진이다(세종 16년 2월). 태종이 소다로에 경원부를 설치한 지 25년 만이었다.

 

경원 다음으로 설치된 진은 회령(알목하 또는 오음회)이다. 김종서가 이미 지적했듯이 알목하 주변은 농지는 그리 넓지도 않고 대부분 야인들이 소유하고 있어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기는 어렵지만 전략상의 요충지이므로 방어를 위해 대규모 성을 쌓을 필요가 있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알목하는 남쪽의 방어기지인 부거참 영북진과 거리가 너무 멀어 방어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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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한편으로는 영북진을 북쪽의 백안수소로 이동시킴과 동시에 알목하를 독립적인 진으로 만들고 그 이름을 회령진이라 하였다(세종 16년 5월). 종성(鐘城)은 야인들이 수주라고 불리던 땅이었다. 그러나 세종이 김종서 건의를 받아들여 영북진을 남쪽 용성에서 백안수소로 옮기고 알목하에 회령진을 설치한 이듬해 세종 17년에 여기에다 새 군을 설치하여 종성군이라 하였다. 종성이라고 부른 이유는 부근에 동건산이 있었는데 호인(胡人)들이 종을 동건이라고 하므로 종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세종 17년 7월). 

 

공주(孔州)땅은 태조 이성계의 선조들이 터를 잡고 흥성의 기반을 내린 조선의 발상지라 할 정도로 중요한 땅이다. 그러나 주민도 거의 없고 새로 설치된 회질가 경원이 너무 멀어 공주방어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함길도 도관찰사 정흠지와 도절제사 김종서는 이웃 땅과 주민들을 영입하여 공성현을 설치하기를 세종께 건의하여 설치되었다(세종 17년 6월 5일). 공성현은 세종 19년 4월에 경흥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세종 25년 6월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온성(穩城)은 국토 최북단의 지역으로서 옛 이름이 다온평이었으며 과거 종성과 마찬가지로 야인들의 주거지였다. 이 지역은 꼬불꼬불한 강과 깊은 계곡의 지형적인 장애 때문에 비록 주변에 방어기지가 있다 하더라도 신속하게 방어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므로 백성을 옮겨와 살게 하려면 이 지역을 행정구역으로 삼아 관리를 임명하고 사람을 영입하는 필요했다. 

 

함길도 도관찰사 이세형과 도절제사가 합의하여 다온에 신읍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고 병조와 의정부가 이를 추인하자 세종도 허락하였다(세종 22년 11월26일). 경원, 길주 이남으로부터 안변 이북에 사는 사람들을 대거 입거시켜 인구가 크게 늘자 다음해(세종 23년 5월 23일)에 온성도호부로 승격시켰다. 부령의 원래 이름은 석막상평(石幕上平)이었다. 북쪽 야인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이곳에 석성을 쌓고(세종 14년 6월 14일), 영북진이라 불렀다. 2년 뒤 영북진을 백안수소로 옮긴 이후 이 지역은 천호가 수비하는 작은 촌락으로 위축되었다. 세종 20년에 설치했던 부거현을 없애고 그 동쪽으로 약 60리 이동하여 경성군 북쪽 64리 지역에 마지막 6진인 부령도호부를 설치하였다.  

 

[육진 인재의 등용]

 

방어가 매우 취약한 변방 거점에 군과 진을 설치하여 성곽과 목책을 쌓고 군대를 배치하며 사람을 옮겨와 거주하게 한 세종은 그곳 주민들이 혹 법을 모르거나 혹 예절을 몰라 서로 다투고 고소하는 일이 빈번하여 걱정되었다. 세종은 그 이유 중 하나가 변방의 일이 너무 힘들어 벼슬을 하거나 문명사회를 경험하지 못한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 지방 자제를 서울로 보내 공부를 시키거나 혹 자질이 있는 자는 벼슬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종은 함길도 도관찰사와 도절제사에게 지시했다.

 

   “방어하는 일이 급하여 거주민들이 모두 머물러 수비하다보니 부득이

    서울로 올라와 벼슬할 수가 없고 따라서 법과 제도를 잘 모르고 일의

    큰 본질을 알지 못하여 혹 작은 일로 여러 번 수령을 고소하는 풍속이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영을 내려 그 자제를 서울로 보내 벼슬을 하게

    하려고 하니 경들은 서로 의논하여 벼슬종사가 가능한 자를 선택하여

    서울로 보내면 즉시 적절하게 채용하겠다.      

    (防禦事緊 其居民皆留防戍 不得上來從仕 故不習條章 不知大體 

     或以小事 屢訴守令 風俗如此 不可不慮 欲令其子弟從仕又京 

     卿等同議 擇可從仕者上送 則隨宜敍用矣 : 세종 19년 4월 2일)”

       

세종은 고을의 규모에 따라 피추천자의 수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경원보다는 회령이 작고, 회령보다는 종성과 공성이 작음을 참작하여 인원을 결정하라고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함길도 감사와 도절제사는 고을 규모에 따라 경원에서 네 명, 회령에서 세 명, 그리고 공성과 종성에서 각각 두 명을 천거해 올리는 것이 좋겠다고 보고했다. 의정부도 그 제안에 동의하자 세종도 그렇게 결정하고 감사와 절제사에게 그 뜻을 내려 보냈다.  

 

    “벼슬에 종사할 자제는 재능이 있고 또 서울에 머무를 수 있을 정도로

     재산이 있는 자를 택하여 영을 내리기 전에 추수를 기다려 서울로 

     보내되 모두 자원자에 한하여 임명하라. 

     (其從仕子弟 擇有才幹 且饒財   

    産可以留京者 預令治任 待秋成上送 悉從自願 : 세종 19년 4월 2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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