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35> 국토를 제대로 지켜라.(II) 새로운 땅(新地)을 찾아서② 본문듣기
작성시간
관련링크
본문
II.3 새로운 땅 대신 찾은 삼수군과 체천자민(體天字民)
새 땅을 찾고자 하는 세종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새 땅은 발견되지 않았다. 찾았다고 하는 사람을 따라 많은 물자와 인력을 제공해 찾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부임한지 반 년도 되지 않은 함길도 도관찰사 정갑손이 급히 보고를 올렸다. 왕명을 받들어 식량을 대어주고 사람을 붙여 주고 했지만 허사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명령하신 대로 여진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에게 중국옷을 입히고 중국인 모자를 씌워 찾았지만 소용없었다는 얘기였다.: “도내 담비를 포획하는 자로 길주갑산 지역의 심산유곡을 두루 모르는 데가 없는 자들 또한 새 땅을 한 번이라도 보았다는 자가 없으니 즉 새 땅이 있는 지 없는 지 참으로 알기가 어렵습니다(세종 25년 2월 15일).”
새 땅을 발견하기 위해 상당한 인력과 물자를 쏟아 부었지만 못 찾게 되자 새 땅에 대한 관심이 한동안 수그러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새 땅에 대한 관심을 재 점화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새 땅을 발견했다 해 놓고는 도망간 박정이 잡힌 것이다. 박정이라는 자는 엉뚱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자기가 도망 간 것이 아니라 정확한 길을 표시하기 위해 돌아갔다가 길 표시를 하고 오느라 도망간 것 같이 보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세종은 고민했다. 이 말을 믿어야 하는가.
“즉위한지 이십 칠년인데 새 땅을 보았다는 자가 하나만이 아니었으나
종내 찾지 못했으니 이것이 다 허망한 것이다. 이번에 박정의 말도
역시 망언이다. 그렇지만 듣고도 내버려 둘 수가 없다.
(予卽位今二十七年 人言見新地者非一 而竟未得焉 皆是妄也
今且朴丁之言亦妄言也 然不可聞而置之也 : 세종 27년 7월 2일)”
세종은 새 땅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곧바로 좌찬성 황보인과 예조판서 김종서를 불러 물었다.
“이번에 이선로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찾게 할 것인가 아니면 먼저
여러 사람을 보내 찾아 본 뒤 군대를 이끌고 다시 들어 갈 것인가.
(今使善老率軍求地乎 先遣數人尋覓 以後率軍更入乎
: 세종 27년 7월 2일)”
황보인은 먼저 7,8인을 보내 찾아 본 뒤에 군인을 보내자고 했다. 그러나 세종은 생각이 달랐다. 군사 25명을 예조좌랑 이선로와 함께 평안도로 보낸 뒤 거기서 군사 수백 명을 차출하여 찾도록 하였다. 세종은 평안도로 떠나는 이선로에게 지시사항을 적은 글을 손에 쥐어줬다. 그 지시문의 내용이다.
“새 땅에 사는 사람을 혹 발견하거든 본래 나라를 배반한 것이 아니고
부역을 피하고자 한 것에 불과하므로 그 죄가 용서할 만한 것이며 또
이미 여러 번 사면이 있었으므로 반드시 죄로 다루면 안 된다.
이번에 너와 수색자를 보내는 것은 다만 무뢰배들이 깊은 산골에 모여
살면서 비축해 둔 양식도 없어 가뭄이라도 만나면 반드시 굶어 죽을
사람이라 하늘을 본받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가대의를 모르므로 혹 놀라 도망가거나 요망하고 불순한 죄를
저지를 형세이므로 심히 불쌍하게 생각한다. 도착하는 날 내 뜻을 잘
알게 하여 예전과 같이 안도하게 하고 국가의 명으로 그 우두머리를
인솔하고 오도록 하라.
(新地居人 倘或有之 本非背國 不過逃避賦役 其罪可赦 且屢經赦宥
必無治罪之理 今遣爾尋之者 但慮無賴之徒聚居山谷 無倉庫糧餉之備
如遇水旱 必當餓莩 有違體天字民之意 彼人不知國家大義 驚惑逃竄
妄干不順之罪 勢所必至 予甚憐憫 爾到日 宜諭予意 安堵如舊
以大國家之命 率其渠魁以來 : 세종 27년 7월 2일)”
세종이 새 땅에 대해 그토록 관심을 갖게 된 진정한 이유가 여기서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체천자민(體天字民)’의 뜻이었다. 즉, 하늘을 본받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 깊은 산 속에서 굶어 죽을지 모르는 백성들에 대한 연민의 정, 그것이 세종으로 하여금 새로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찾으려 했던 진정한 이유였다.
박정이나 그 외에 새 땅이 있다고 떠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거짓으로 판명이 났다. 아니 새 땅을 찾지 못했으니 참말이었다 하더라도 거짓말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의금부에서는 이들이 상을 바라고 거짓으로 꾸며 천총을 기망했고 군사를 동원하여 원행까지 했으니 참람한 자들을 엄벌할 것을 요구했다. 율대로 하면 참형에 해당된다고 했다. 세종은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몇 단계 감형하여 장 1백 대로 마무리 했다(세종 27년 10월 25일).
그런데 파병되었던 예조좌랑 이선로가 새 소식을 보내왔다. 새 땅이라고 알려져 탐색한 지역은 강계의 화헌 동쪽과 북청의 벌상의 서쪽, 혜산의 압록의 이남 그리고 함흥의 아란 북쪽인데, 강계와 북청 사이의 동서 길이가 15,16일 노정이고 혜산에서 함흥까지 남북의 길이는 10일 노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 땅이 농사가 가능하고 또 산과 계곡으로 천연의 요새처럼 되어있어 이 곳으로 사람들이 숨어 들어가면 퇴치하기도 매우 어려운 형국의 지세라고 보고했다. 따라서 이곳에 새로이 군현을 설치하여 압록강을 방어하는 기지로 만드는 동시에 숨어 사는 사람들을 미리 예방하게 하자는 것이 선로의 건의였다. 의정부 대신들이 이 문제를 숙의한 결과 이선로가 건의한 땅은 기후가 차서 농사가 안 되는 땅이고 또 인접한 군이나 읍과 거리가 너무 멀어서 불가하다고 결론 내렸다. 대신 갑산군의 삼수에는 읍을 설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안을 내놓았다. 세종은 즉시 평안도 도관찰사와 절제사에게 지시하였다.
“삼수와 이선로가 보고한 땅에 읍 설치 가능성 여부를 찾아가 물어보고
보고하라.(三水及先老召啓之地 置邑便否 訪問啓達
: 세종 27년 11월 2일)”
결국 다음해인 세종 28년에 이 지역에 삼수군을 설치하였다.
II.4 요도(蓼島)를 찾아라.
신지와 함께 세종은 요도(蓼島)를 찾고 싶었다. 요도에 가 본적이 있다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세종은 함길도 감사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요도의 형세와 수로의 편하고 험함을 보고와서 보고하라. 만약 김남련과
같이 요도에 살다가 돌아온자나 해변에서 요도를 본 자가 있으면 그 섬
의 형세와 원근을 상세히 물어서 보고하라. (望見蓼島形勢及水路夷險以
啓 若有偕南連往還蓼島者 居海邊望見者 詳問本島形勢遠近以啓 : 세종 12년 4월 4일)”
요도는 경성의 무지곶(또는 길주의 무시곶)이나 홍원의 보청사(또는 포청사)에 올라가면 볼 수 있다고 했고 양양부의 청대나 통천현 당산에서도 보인다고 했다. 양양에서 보면 북쪽으로 보인다고 했고 경성이나 홍원에서 보면 남쪽에 있다고 했다. 동과 서로 두 봉우리가 있으며 하나는 약간 높고 하나는 약간 작으며 가운데에는 큰 봉우리가 있다고 했다. 한동안 요도에 관해서는 잠잠했다. 한참 새 땅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세종 27년 요도를 다시 찾으라고 세종이 지시했다.
“양양부 동쪽 해리로 백여리에 요도가 있다고 하니 다시 김연기로
하여금 상세히 물어서 결과를 보고하라.
(東距府海路百餘里之地 有蓼島
今更詳問延奇等 備悉以聞 : 세종 27년 6월 12일)”
세종은 여러 번 마음을 다하여 찾으라고 지시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계속>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