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33> 국토를 제대로 지켜라.(Ⅰ)국토의 북방한계 : 공험진은 어디인가?②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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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4 세종실록 지리지의 공험진 기록
세종 14년 1월에 새로 편찬된 <팔도지리지> 함길도 편에는 함길도 북계 공험진과 남계 철령 사이의 거리가 천 칠백 여리(약 680km)라고 되어 있다. 이 정도 거리라면 공험진은 두만강(혹은 압록강) 부근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어야한다. <세종실록 지리지> 길주목의 경원도호부지에도 그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경원도호부(府)에 두만강과 수빈강의 두 강이 있다고 했다.
“두만강은 부의 동쪽에 있다. 그 근원이 백두산에서 나오는데 동쪽으로 흘러서 동량북으로부터 사지, 오음회, 수주, 동건, 다온, 미전 등지를 지나 회질가에 이르고 남쪽으로 흘러서 소다로, 동림, 오롱초, 아오지 등지를 거쳐 공주를 지나고 동쪽으로 23리를 흘러서 사차마도에 이르러 갈라져 5리 정도쯤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수빈강은 두만강 북쪽에 있다. 그 근원은 백두산 아래에서 나오는데 북쪽으로 흘러서 소하강이 되어 공험진 선춘령을 지나 거양성에 이르고, 동쪽으로 120리 흘러 수빈강이 되어 아민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 되어있다 (아래 [그림.2-1] 참조).
또 경원도호부(당시 공주, 지금의 경흥)의 네 경계를 정하기를 동쪽으로 바다까지 20리, 서쪽으로 경성 두롱이현까지 40리, 남쪽으로 연해 굴포까지 12리, 그리고 북쪽으로 공험진과 선춘현까지 똑같이 700리라 하였으며 오음회(회령진)의 석성기까지는 150리라고 상세히 적혀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공험진은 두만강 너머 한 참 더 북쪽으로 들어가 있다. 두만강 가에 있는 오음회는 회령이며 경흥에서 약 150리 떨어져 있으므로 공험진은 두만강보다 500리 이상 훨씬 더 만주 깊숙이 들어가 있다는 설명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경원진(소다로 회질가 지역)에서 공험진으로 가는 경로에 관해 매우 상세한 지명과 거리를 기록하고 있다(아래 [그림.2-2] 참조). 먼저 소다로(경원진의 남쪽)에서 북으로 30리를 가면 어두하현이 있고 그 곳에서 60리 북쪽으로 가면 동건리라는 두만강변의 마을이 있다. 거기서 3리를 북쪽으로 가 두만강탄을 건너면 90리 북쪽에 오동사오리참이 있고 60리 더 북쪽에 하이두은이 있다. 하이두은에서 북쪽으로 100리 가면 영가사오리참이 있는데 그 북쪽방면에 소하강가에 공험진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소다로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약 90리 거리에 동건이 있고 동건에서 두만강탄을 건너 북쪽으로 약 250리 거리에 공험진이 있다는 것이다. 소다로에서 공험진까지는 총 340리로 약 136km의 거리가 된다.
경원도호부의 동쪽 두만강을 끼고 있는 동림성을 출발하여 북쪽으로 5리를 가면 소다로 영기가 나오고 거기서 30리를 북쪽으로 향하면 두만강 하류인 회질가탄이 나온다. 강을 건너 10리를 가면 현성이 있고 그 북쪽 90리에 어라손참이 있다. 여기서 다시 북쪽으로 30리 거리에 허을손참이 나오고 북쪽으로 60리를 더 가면 유선참이 나온다. 여기서 동북쪽 방면으로 70리 지점에 토성기가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거양성이다. 거양성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윤관장군이 비를 세웠다는 선춘현이 나온다. 소다로 영기에서 선춘령까지 총 거리가 350리, 약 140km가 된다. 세종실록과 지리지 함길도편 및 경원도호부지 기록을 종합해 보면 공험진의 위치는,
(i) 두만강 중류 동건 북쪽 약 250리(100km),
(ii) 두만강 하류 경흥 북쪽 약 700리(280km),
(iii) 두만강 하류 회질가탄 북쪽 약 320리(128km),
(iv) 철령 북쪽 약 1700리(약 680km)에 있다는 것이다.
이 기록에 입각해보면 공험진은 지금의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연길시, 도문시, 용정시, 왕청현, 화룡시 및 안도현 일대의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이런 기록대로라면 우리나라 국토는 만주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것이며 바로 이런 가능성 때문에 세종이 이 지역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I.5 과거시험 출제문제(策問)
세종은 국사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과제에 대해서는 그 해법을 과거시험 문제, 즉 책문(策問)으로 출제했다. 즉위초기에 밝힌 8대 국정방향의 맨 마지막에 있듯이 숨어 있는 인재의 국사현안에 관한 높은 식견을 듣기 위해서였다. 세종은 국토의 범위를 명확히 하고 그 강토를 온전히 지켜내는 것은 국왕의 책임이기도 하고 또 모든 백성의 의무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는 관리들에게 더 깊은 국토인식과 국방의지가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생각때문에 과거시험의 최종시험 문제, 즉 책문을 국토와 국방관련 문제를 출제한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이다.
“혹 말하기를 공험진 이남은 나라의 옛 봉토이니 군대와 백성을 두어서
강역을 지켜야 한다고 하고 혹자는 경원군이 삼면으로부터 적의 공격
을 받아 사람이 매우 적고 적의 내습을 격퇴하기 어려우며 또 생각해
보니 그 땅이 협소하고 장애가 많아 사람이 모여 살지 않으므로 경원
의 수비를 없애고 경성으로 옮기자고 하고 또 혹자는 경원에 군대를
두는 것은 태종이 만든 법(성헌,成憲)이므로 변경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이 세 설에 관해서 과연 무엇이 득이고 무엇이 손실인가를 논하라.
(惑謂公嶮鎭以南 國之舊封 宜置軍民 以守疆域 惑謂慶源郡 三面受敵
以人民鮮少 艱於禦侮 顧其土狹隘 民不衆居 宜罷慶源之守 移於鏡城
惑謂慶源置兵 太宗成憲 不可更改 是三說者 果孰得而孰失乎
: 세종 8년 4월 11일)”
공험진 이남의 땅을 지킨다면 종주국의 봉토이니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태종의 성헌이므로 지켜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포기하는 것이 옳은가. 명분과 실리 속에서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두 번째 질문은 보다 현실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다.
“여연과 강계 등지는 야인 땅과 가까워 야인들이 오가며 양식을 찾지
않는 달이 없고 장차 구하는 대로 주고자 하여도 관에는 저축해둔 것이
없으니 깊고 끝없는 욕구를 들어 줄 방법이 없다. 만약 그들 소원을 들어
주지 않으면 반드시 원한이 생겨 변경의 피부림을 저지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위엄을 두렵게 생각하고 은혜를 고맙게 생각하게 하여 변방 사람을
안도하게 할 수 있을지 제안해 보라.
(閭延江界等地 隣於野人之境 往來索糧 胎無虛月 將欲隨索隨與 官無所儲 無以應其溪壑之慾 彼若不遂所欲 必生怨恨 以構邊境之釁 何以使之畏威懷惠 而邊民按堵歟 : 세종 8년 4월 11일)”
경원이전문제와 북방지역의 방어 문제는 핵심 국방과제였다. 경원을 남쪽이 아니라 더 북쪽으로 옮기고 6진 4군을 구축하는 것이 세종의 목표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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