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18 : 작은 아버지의 유업을 못 지킨 남연의 모용초(S) 본문듣기
작성시간
관련링크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06) 모용초의 간신 공손오류(AD409)
후진왕 요흥은 동생 평북장군 요충과 정로장군 적백지 등에게 기병 5만명을 주어 혁련발발을 공격하도록 했다. 요충이 섬서성 예천 북쪽의 영북에 도달하자 오히려 군사를 돌려 장안을 공격할 생각을 가졌는데 적백지가 반대하는 바람에 추진하지 못하고 입을 막기 위해 적백지에게 독약을 먹여서 죽였다. 후진왕 요흥은 사신을 보내 초종에게 대도독, 상국, 촉왕을 내리고 더하여 구석을 하사하면서 마음대로 지방 관리들을 임용해도 된다고 허락하였다.
남연의 장수 모용흥종과 곡률제(斛谷提) 공손귀 등은 기병을 이끌고 지금의 강소성 숙천인 숙예를 침범한 뒤 한바탕 약탈을 하고 돌아갔다. 이 때 공손오류는 공손귀의 동생으로 시중, 상서 영좌위장군 으로 있으면서 남연 조정의 문무 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모용씨 종친들이 함께 요직을 나누어 가졌지만 공손오류는 그들을 전혀 꺼리지 않고 권력을 행사했다.
남연의 주군 모용초가 숙예의 공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의논했는데 곡륙제 등을 군공 혹은 현공으로 봉할 생각이었다. 계림왕 모용진이 간하는 말을 올렸다.
“ 저 여러 사람들은 둔병하면서 주민들의 원성을 깊이 샀는 데
무슨 공이 있어서 공으로 봉하려 하십니까?”
모용초는 분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지만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공손오류를 아첨으로 봉사하여 여러 번 승진한 상서도령사 왕엄이 좌승 자리까지 올랐는데 이를 본 사람들이 이런 말을 공공연히 내뱉었다.
“ 후작이 되고 싶거든 오류를 섬겨라”
모용초가 공손귀를 보내 제남지역을 침략하게 하고서 남녀 천 여명을 포로로 끌고 오게 하였다. 팽성 이남 지역에서는 남연의 침략을 막기 위해 보루를 쌓고 철저히 방벽을 세웠고 동진 조정에서는 병주자사 유도령을 보내 회음에 진을 치고서 남연의 침범을 방비하게 하였다.
서진의 걸복치반은 상규(섬서성 천수)에 들어와 후진의 태원공 요의를 만나 뵈었는데 그 사이 후진 장수 팽해념이 틈을 타서 서진의 땅을 침범하였다. 걸복치반이 대노하여 요의에게 고별도 하지 않고 돌아가 팽해념을 격파하고 포한(감숙성 영정, 임하)을 포위하였다. 걸복치반의 아버지 걸복건귀는 후진왕 요흥을 따라 평량으로 갔고 걸복치반은 마침내 포한을 함락시킨 뒤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알리자 걸복건귀는 몰래 빠져나와 우너천으로 돌아왔다.
후진의 태자 요홍은 진군장군 팽백랑에게 동궁의 금병을 붙여서 반란 주모자를 토멸하고 나머지 잔당들은 사면해 주었다. 휘하 여러 장수들이 반역군들의 목을 자른 뒤 그 명단을 널리 자랑하자고 조르자 요홍이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주상께서 나한테 후사를 맡기지 않았는가.
미리 알아서 반란을 예측하여 막지 못한 죄를 책망받아야 할 판인데
어찌 감히 자랑을 늘어놓으며 공을 달라고 보챌 것인가 ?”
요흥은 반란을 꾀한다는 소문이 돈 요충에게 사약을 내렸다. 나중에 동진을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세우게 되는 유유가 남연을 정벌하자고 표문을 올렸으나 동진 조정에서는 다들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으나 오직 좌복야 맹창과 거기장군 사마 사유, 그리고 참군 장희는 이길수 있다고 보고 유유에게 강행하기를 권했다. 유유는 맹창을 감중군유부사로 임명하였다. 사유는 비수대전을 승리로 이끈 유명한 정치가 사안의 형님의 손자다.
(107) 유유의 남연 공격과 남연 모용초의 대응(AD409)
동진 유유는 수도 건강을 출발했다. 수군을 통솔하며 회수를 통해 사수로 들어갔다. 사수는 지금의 산동성 사현을 가로질러 연주(지금의 제녕)로 흘러 들어오는 강으로 동진군대가 남연 수도 광고를 공략하는 핵심 루트다.
5월 유유의 군대는 하비에 도달했다. 유유는 함선을 하비에 두고 육로를 따라 북상하여 낭야에 도달했다. 도착하는 곳마다 성곽을 쌓고 군사를 주둔시켰다. 어떤 사람이 유유에게 말했다.
“ 남연 사람들이 만약 험한 고개 위에다 요새를 쌓고 방어하거나
혹은 견고한 성벽을 근거로 들판의 곡식을 싹 쓸어버리면
군대가 깊이 들어갔을 때
공을 못 세울 뿐만 아니라
제대로 돌아오지도 못할 것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유유가 이렇게 대답했다.
“ 나도 그것을 깊이 생각한 바요.
하나 선비족들은 오로지 탐할 줄만 알아서
멀리보고 깊이 생각할 줄 모르고 있소.
진격하여 포로를 획득할 생각만 할 뿐
후퇴하면서는 곡식을 아까워 할 뿐이요.
그들은 우리가 깊이 들어가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으로 보고
길목인 임구에서 방어하거나 아니면 수도 광고를 견고하게 지킬 뿐이요.
험한 요새를 구축하지도 않을 것이고
들판을 청소하지도 않을 것이요.
감히 선언하건대 제군들에게 보증할 수 있소.”
난연의 주군 모용초는 동진 군대가 북상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군신회의를 개최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정노장군 공손오류는 이렇게 말했다.
“ 오병(동진 군대를 폄하하는 말)는 가볍기 짝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속전속결에 유리할 뿐이므로 예리한 무력을 다틀 수 없습니다.
큰 고개를 거점으로 삼고 못 들어오게 방어하며
날을 늦추고 질질 끌어서 날카로운 예기를 꺾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정예기병 이천 명을 뽑아서 바다를 건너
배후 양곡로를 끊어버리고
장수 단휘에게 연주군사를 이끌고 동쪽 산자락을 타고 내려와
등 뒤를 공격하게 하면 그것이 상책입니다.
모든 장수들에게 험지요로를 거점으로 삼고
거점 바깥에 잇는 모든 자재와 비축물자를 태워 없애도록 하여
적군들이 물자를 구하지도 못하고 교전해 와도 응전하지 않고 버티면
가만히 앉아서 통제할 수 있으니 이것은 중책입니다.
들어오는 적을 마주하며 성을 나아가서 교전하는 것은 하책입니다.”
모용초가 이렇게 대꾸했다.
“ 지금 세성이 제나라에 있으니 이 별자리로 추측해 보면
전쟁을 하지 않고도 극복할 상이요.
저쪽 세력이 비록 특별히 강하다고 해도 사람의 일이란 게
멀리서 오느라고 피폐해 있을 것이어서 오래 버티기 어려울 것이요.
내가 다섯 개 주의 땅을 가지고서
부요한 백성들을 움직이고 있으면서
철갑을 두른 기병이 수도 없고 곡식이 들판에 덮여있는데
어찌 곡식을 다 잘라버리고 백성을 이사시켜서
스스로 약하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야 한단 말인가?
적군이 모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정병으로 짓누른다면 어찌 못 이길 것을 걱정하겠소?”
보국장군 광녕왕 하뢰노가 간절하게 간하여 따를 수 없다고 말하고 나오면서 공손오류에게 말했다.
“ 꼭 저렇게 하시겠다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일세.”
태위 계림왕 모용진도 말했다.
“ 폐하께서는 기병의 이점 평지에 있음을 아십니다.
반드시 고개를 나가 먼저 전쟁을 일으키셔야 합니다.
혹시 패전하는 경우에는 들어와 지켜도 늦지 않습니다.
적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험지를 버리고 나가서 전투하시면 안 됩니다. ”
모용초는 모용진의 말을 듣지 않았다. 모용진이 나와서 한도에게 말했다.
“ 주상께서 이미 먼저 선공해서 공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고
또 들판 곡식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을 반대하셨소.
적이 뱃속 깊이 들어오기를 앉아서 기다렸다가
포위한다는 계략은 유장의 전략과 매우 흡사하오.
금년 나라가 망하고 나도 분명히 죽을 것이오.
경들은 중화의 지사들이니
문신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오.”
모용초가 그 말을 듣고 대노하여 모용진을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거와 양부(산동 태안)의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성곽을 다시 수리하고 유유의 동진 군대를 기다리게 했다. 유유가 큰 고개를 지나는 동안 남연 병사들이 나오지 않았다. 유유가 하늘을 가리키면서 얼굴에 희색이 넘쳤다. 좌우 장군들이 적군을 만나기도 전에 웃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 우리 군사가 이미 험한 곳을 지나왔고
군사들이 이미 죽기를 각오하고 있는데다가
들판에는 곡식들이 쌓여있으니
사람들이 양식이 떨어질 걱정을 하지 않고 있소.
적군은 이미 내 손아귀에 들어온 셈이오.”
(108) 광고를 포위하는 유유
유유는 6월에 동완에 다다랐다.
모용초는 먼저 공손오류와 하뢰노와 단휘를 내보냈고 본인은 보병과 기병 오만 명을 이끌고 임구에 주둔하면서 동진 병사들이 고개를 넘었다고 보고를 들었다. 모용초는 군사 보기 사만 명을 데리고 동진과 맡 붙을 생각으로 공손오류에게 기병을 주어 먼저 거멸수로 보냈다.
동진 전봉 맹룡부가 공손오류와 전투를 벌여서 이기자 공손오류는 패주하여 뒤로 물러나 도망갔다.
유유는 수레 사천기를 좌우로 거느리고 네모진 진형을 갖추고 서서히 진격하여 들어와 임구 남쪽에서 남연 병사들과 전투를 벌였다. 해가 기울고 아직 나지 않았을 때 동진군 참군호번이 유유에게 말했다.
“ 남연 병들이 모두 나와서 싸우고 있으니
임구 성 중에는 필히 군사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발빠른 병사를 조금 주시면 잽싸게 지름길로 치고
성을 탈취하면 이것이야말로 한신이 조나라를 격파한 전략입니다.”
유유는 호번과 자의참군 단소와 건위장군 향미를 몰래 보내 남연병력의 뒤로 보내 임구성을 공격하게 하면서 겉으로는 경기병이 바다를 둘러 도달했다고 떠들었다. 향미가 갑옷을 갖춰입고 먼저 성을 올라가 임구성을 함락시켰다.
모용초가 깜짝 놀라 단기로 성남에 있는 단휘에게로 도망갔다. 유유가 군사를 재촉하여 격전을 벌여 남연군을 대패시켰다. 단휘 등 대장들도 사로잡혀 참수당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모용초는 수도 광고로 돌아갔다. 유유는 모용초의 옥새와 수레와 모피를 획득했다. 유유는 승리 기세를 타고 수도 광로로 치고 들어갔다. 며칠 뒤 광고의 외곽 대성을 함락시키자 모용초는 광고 내성으로 숨어 들어갔다. 유유는 세 길 담장을 높이 쌓고 또 삼중으로 참호를 파고 방어했다. 투항해 들어오는 사람들을 위로하여 받아들이고 뛰어난 현재와 준재들을 받아들이니 화족이든 이족이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부터 장강이나 회하를 통한 남연의 곡식비축은 중단되고 말았다. <계속>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