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률이 너무 높아서 탈이라는 국가연구개발 사업 본문듣기
작성시간
관련링크
본문
국가연구개발 사업의 과제 성공률이 지나치게 높은 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한다. 국가 연구개발 사업의 성공률이 파격적으로 높은 것은 사실이다. 최근 미래부가 밝힌 2011년의 연구개발 과제 성공률은 98.1%이었다고 한다. 중소기업청이 지원하는 기술개발 사업의 경우에도 2012년부터 3년 동안 성공률은 96% 수준을 기록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는 사업의 성공률이 높은 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 정부가 성공 가능성이 충분한 과제를 선정해서 지원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연구개발 사업의 경우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높은 성공률이 연구자들의 안이함에서 비롯된 매우 잘못된 결과로 인식되고 있다. 연구자들이 정부의 예산 지원을 받기 위해 성공 가능성이 높은 안정적인 과제에만 매달린 결과라는 것이다. 우리 연구자들이 추격형 연구의 낡은 관행에 빠져서 도전적·창의적·모험적 연구를 회피하고 있어서 생긴 결과라고 한다. 심지어 우리 연구자들이 예산 지원을 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부와 사회를 속여 왔다는 극단적인 지적도 있다. 높은 성공률이 연구자의 윤리 의식을 의심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높은 과제 성공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무작정 탓하기는 어렵다. 연구개발 사업의 성과가 사회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연구자들의 성과가 노벨상을 받을 만큼 학문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창출하지도 못했고, 우리 사회가 절박하게 요구하는 성장동력의 개발에 충분히 기여하지도 못했다. 실제로 중소기업청이 밝힌 기술사업화 성공률은 50%를 넘지 못한다고 한다. 연구자들 스스로 자성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서울대 공대는 자신들이 홈런을 외면하고 번트만 노려왔다는 통렬한 반성을 담은 ‘백서’를 내놓았고, 서울대 자연대도 외국 석학의 입을 빌어서 자신들이 ‘따라 하기 연구’(me-too science)의 유혹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연구자의 입장이 난처하다. 정부가 강조하는 ‘성공률’이 연구 과제의 진짜 성공 여부를 평가한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은 이렇다. 요즘 연구자들은 과제 신청 단계에서부터 과제의 ‘성과 목표치’를 연도별로 논문·특허·인력양성으로 구분해서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논문과 특허는 ‘국내’·‘국외’를 구분해야 하고, 논문은 ‘SCI’·‘비SCI’를 구분해야 한다. 결국 정부가 공개한 성공률은 연구자가 연구계획서에 제시했던 정량적 목표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지원과제의 번호가 표시되는 논문과 특허의 수가 당초 연구자가 제시한 목표치에 얼마나 근접했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평가가 과제의 실질적인 성공 여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연구 과제의 실질적인 목표 달성에 실패하더라도 논문을 발표하고, 특허를 출원·취득하고, 인력을 양성할 수 있다. 그렇다고 연구자를 비윤리적이라고 탓할 수는 없다. 특히 기술 개발의 경우에 그런 상황이 자주 발생할 수 있다. 과제 수행의 과정에서 학술지의 평가를 받아 발표한 논문이나 특허청의 심사를 받은 특허도 학술적·기술적으로는 충분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당초 목표했던 기술 개발에는 실패했더라도 그런 결과들은 ‘공공재’로 활용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정부가 그런 성과를 활용하기 위해 애써 추가적인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높은 과제 성공률은 연구자가 과제 신청서를 작성할 때 논문·특허·인력양성의 정량적인 목표치를 보수적으로 제시한 결과다. 그렇다고 연구자를 탓할 수는 없다. 정부가 관심을 갖는 과제의 ‘성공’이 연구자에게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심각한 의미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연구자의 입장에서 과제의 성과에 대한 ‘실패’ 판정은 국가 연구개발 사업에서의 영원한 퇴출을 뜻한다. 과도한 목표치를 제시했다가 ‘실패’의 판정을 받게 되면 더 이상 국가연구개발 사업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공연히 도전성과 모험성을 자랑하기 위해 허세를 부릴 형편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부도 연구개발 사업의 높은 과제 성공률을 ‘비정상’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에게 솔직하게 ‘실패’를 인정하게 해주고, ‘성실한 실패’를 과감하게 용납하는 제도를 만들겠다고 야단이다. 연구자들도 ‘정량적 평가’를 폐지하고, 연구자들의 동료 평가를 통한 성과의 ‘질적 평가’를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서울대를 비롯한 5개 대학의 연구부총장들이 그런 요구를 담은 ‘공동 선언문’을 내놓았다.
미래부도 기다렸다는 듯이 그런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당장 내년부터 원칙적으로 논문 건수를 평가지표에서 삭제하고, ‘질 중심의 관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평가의 지표를 개선하고, 자율성·책임성을 강화하고, 평가 정보의 공개와 평가위원의 전문성을 강화해서 투명성과 신뢰성을 제고하는 정도로 높은 과제 성공률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논문과 특허의 수를 대체할 새로운 지표가 제시될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정량평가에 의한 성공과 실패의 구분은 고스란히 남아서 연구자들을 짓누르게 될 것이다. 실패의 ‘성실성’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도 없다. 오히려 연구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게 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연구에 대한 근거 없는 엉터리 환상도 버려야 한다. 근본적으로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연구 과제가 따로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인류 문명은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질문’이 아니라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문제 해결 능력’에 의해 발전한 것이다. 현대 물리학의 핵심인 양자역학은 전구의 밝기를 정확하게 나타내는 합리적인 표준을 정하기 위한 노력에서 탄생했다. ‘질문’은 평범했지만 ‘양자화’와 ‘확률’의 개념을 문제 해결의 열쇠로 인식한 막스 플랑크, 닐스 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천재적 발상이 양자역학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세돌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을 만들겠다는 ‘질문’은 평범한 것이다. 이미 알려져 있던 ‘몬테카를로 방법’과 ‘심층학습’(deep learning)을 결합시킨 창조적 문제 해결 능력이 ‘알파고’를 만들어낸 핵심이었다.
우리 국가연구개발 사업의 성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연구자들이 무능하고, 추격형 사고방식에 빠져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연구자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가 놀라는 기술을 개발했고, 우리의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가능하게 만든 능력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전 세계 어느 나라의 연구자들도 해내지 못했던 엄청난 성과였다.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는 자책도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 사회가 당장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과학 지식의 증진을 위한 노력을 원하지 않았던 결과였을 뿐이다.
비정상적으로 높은 ‘성공률’에 대한 논란은 국가연구개발 사업을 토목공사나 자재구입 등의 일반 행정 사업과 같은 ‘관리’의 대상으로 여기는 관료와 정책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무의미한 것이다. 연구개발 사업을 ‘성공’과 ‘실패’로 재단하겠다는 발상부터 버려야 한다. 말 위에 높이 올라 앉아 남의 것을 어설프게 베낀 ‘짝퉁’ 정책으로 현장의 연구자들을 양떼 몰 듯 채찍질하는 관료와 정책 전문가들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우리 연구자들의 능력을 정확하게 인정해주고, 그런 연구자들이 연구개발 현장의 주인공으로 신명나게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만 한다. 스스로의 자정 능력은 관료들에게 완전히 빼앗겨버리고 양떼처럼 몰려다녀야 하는 연구자들에게 도전적·창의적·모험적인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