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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6D) : 최초의 5호16국 성한의 성쇠(끝)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07월20일 17시37분
  • 최종수정 2017년07월20일 14시46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32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⒃ 후조 석호가 이수에 연대 제의 (AD340) - 공장의 반대 

 

이웅이 죽기 일년 전인 AD333년 후조의 석륵은 병사했다. 뒤를 이은 석륵의 아들 석홍을  석륵의 양자 애꾸눈 석호가 쿠테타로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석호는 동진을 차지하기 위해 이수에게 연대할 것을 제의했다. 동진을 함락시킨 뒤 양분하여 나누어 가자는 것이었다. 이수는 기쁜 마음으로 수용했고 왕하와 왕광을 수락하는 사신으로 보냈다. 마당이라는 사람을 6군 도독을 삼아 7만 군사를 파병했다. 공장은 결연히 반대했다. 해사명도 극구 말렸다.

 

“ 우리 군데는 작고 약하며

  회계와 오나라는 정말로 먼 곳입니다.“

 

이수는 신하들에게 동진 토벌의 득실을 논하게 했다. 공장이 나섰다.

 

“ 흉노(후조)와 동진 중에서 어느 나라와 교류하는 것이 낫습니까?

  흉노는 승냥이와 같아서 동진이 멸망하게 되면 

  곧바로 얼굴을 이리로 돌릴 것 아닙니까.

  옛날 춘추시대 진 헌공의 우국과 괵국의 고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수는 결국 후조와 연대하려던 생각을 바꾸었다. 그러나 공장은 그 생각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여 거짓으로 귀가 먹었고 사지를 쓰지 못한다고 하면서 사직하여 성도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⒄ 이수의 교만함과 폭정 (AD340)

 

오래 전에 동진과 싸우다가 사로 잡혔으나 가까스로 후조로 도망친 이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굉은 이수의 가까운 인척이었으므로 이수는 조왕 석호에게 편지를 써서 이굉을 송환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편지에 이렇게 썼다.

 

“ 대 성한 황제가 조왕 석군에게”

 

석호가 기분이 매우 나빴다. 어떻게 이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지 의논하게 했다. 중서감 왕파가 이렇게 대답했다.

 

“ 지금 이굉이 말하기를 촉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마땅히 종족을 규합하고 인솔하여

  후조의 왕도를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일개 여단 병력도 없이

  양주(감숙성)와 익주(사천성) 일대를 평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그리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망친 한 사람을 잃을 뿐이니

  밑져도 남는 계산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수는 황제칭호를 참칭하고 있으며 

  황제조서를 써서 이굉을 돌려달라는 편지를 우리 조정에 보냈으니

  적당히 편지를 써서 돌려보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

 

석호는 왕파의 말을 듣고 이굉에게 후한 예물을 들려 돌려보냈다. 이굉이 성도에 도착하자 이수는 이렇게 조서를 내렸다. 

 

“ 갈족 오랑캐들이

  우리 조정에 훌륭한 활과 같은 예물을 바쳤다.“

 

석호가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밖으로 왕파를 내쫓고 평민이 입는 흰 옷을 입고 사무를 보게 하였다.(AD340) 

 

이웅은 치세(AD304-AD334)에는 검소하고 절약하고 관대하며 은혜를 널리 베풀었으므로 인구가 계속 늘었고 국력은 크게 신장되었다. 그러나 이굉이 후조에서 돌아온 AD340년 뒤로부터는 후조 수도 업성의 호화로움과 석륵과 석호의 잔인한 통제를 치켜세웠으므로 이수도 그것을 본받으려고 노력했다. 지방의 백성들을 강제로 성도로 이주시켰고 궁실을 크게 늘려 호화하게 장식했으며 조그마한 허물과 범법도 용납하지 않고 죽여서 권위를 세우려고 하였다. 간언하는 신하는 여지없이 죽었으며 백성들은 부세와 노역으로 곤궁한 생활을 면할 길이 없었다. 자연스레 반란을 생각하거나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⒅ 이수 사망과 이세 계승과 이어지는 폭정(AD343-AD345)

 

AD343년 가을 성한 황제 이수가 44세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아들 이세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 때 이세의 나이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이수의 나이가 44세였으니 20세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세에게는 아직 아들이 없었다. 이세의 동생 대장군이광이 태제자리를 요청했다. 이세는 허락하지 않았다. 아직 젊은데다가 장차 아들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마당과 해사명이 나서서 말했다.

 

“ 폐하께서는 형제가 많지 않습니다.

  만약에 다시 폐출 문제가 불거지면

  장차 외롭고 위태로워질 것이 분명합니다.

  미리 태제를 세워 두심이 옳습니다.“

 

종정대신들의 간청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던 이세는 일단 이광을 태제로 옹립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광과 이들이 짜고 일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그들을 옭아 매어 삼족을 멸해 버렸다. 동시에 이혁을 급히 이광이 있는 부성(사천성 삼태현)으로 보내 체포한 뒤 임공후로 깎아내렸다. 두려움에 쌓인 이광은 자살을 선택했다.

 

해사명이 잡혀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 그래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우리 같은 몇 사람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제 다 죽게 되었으니 나라의 운명도 다 했구나.“

 

해사명은 크게 웃으며 태연자약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해사명은 지략을 지니고 있었고 간쟁을 삼갔으며 언행이 무겁고 두터워 백성들의 깊은 신뢰를 얻었는데 죽게 되자 슬퍼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AD345)

 

 

⒆ 태보 이혁의 반란(AD346)과 동진 환온의 공격(AD347)

 

이세의 폭정을 참다못한 태보 이혁이 진수(사천성 광원)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촉나라 대부분의 백성들은 이혁을 따랐다고 되어있다. 이혁의 군사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혁은 홀로 말을 몰아 성문으로 돌진하다가 화살을 맞고 쓰러져 죽었다.(AD346) 이혁을 따르던 군사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놀란 이세는 연호를 바꾸고 환심을 사기 위한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우러졌다. 자치통감에는 이세가 교만하고 음난했으며 궁중에 살면서 공경을 만나기를 회피하고 아첨하거나 모함하는 주변의 소인배만을 가까이 했다가 기록되어있다. 백성들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고 자연히 마음이 이세에게서 떠난 것이다.   

 

동진 최고의 실권자이자 정복가인 환온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측근 장수들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말렸지만 환온의 생각은 흔들리지 않았다. 환옹에게는 촉, 즉 성한이 문제가 아니라 후조마저 정벌하여 전국을 통일하려는 야욕이 있었다. 원교도 먼저 성한을 정복하는 것이 옳은 수순이라고 추켜세웠다. 유담도 이렇게 논평했다.

 

 “ 환온은 씨름을 잘 하는 사람이다.

   질 것 같으면  

   아예 싸움을 걸지 않는 사람이다.“

 

AD346년 11월 11일 환온의 대군이 장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중경을 지나 의빈에서 민강을 따라 북진했다. 군사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성도를 협공했다. 원교, 주무, 사마무기가 이끄는 동진군사는 이잠견과 이복과 이권의 성한 저항군을 차례로 궤멸하고 수도인 성도를 포위했다. 이세는 동문을 열고 도망갔다가 산기상시 왕유로 하여금 항복하는 문서를 환온에게 보냈다. 

 

“ 약양사람 이세는 머리를 조아리고 죽을죄를 지었음을 자백합니다.”

 

이세는 면박여친(面縛輿櫬, 윗옷을 드러낸 채 몸을 묶고 관을 수레에 싣고) 환온의 군문 앞으로 나아갔다. 환온은 면발을 풀어주고 관을 불 태웠다. 사공 초헌지와 같은 성한의 훌륭한 신하들을 모두 받아들였으므로 성한 사람들이 환온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이세와 종친 10여명은 바로 건강으로 압송했다. 성안에 남아있던 성한의 군사들은 무기를 던지고 항복했다. (AD347)    

 

수고 성도가 함락되었지만 지방의 군사들은 아직 다 토벌하지 못했다. 환온이 군사를 이끌고 반항하는 등정을 공격했고 원교는 범문을 공격했다. 주무에게는 팽산을 점령하도록 지시했다. 비록 동진의 환온이 성한의 모든 영역을 장악하지는 못했지만 성한의 황실이 무너져 다시 회복되지 못했으므로 역사적으로 성한은 이 때 건국 41년 만에 멸망한 것이다.  

 

 

⒇ 성한 멸망의 원인 ; 지도자의 결정적인 리더십 부재 

 

성한은 지역적으로 고산지역이고 험산과 협곡으로 보호되는 천하의 요새와 같은 땅이다. 따라서 한 번 장악하면 좀체 공략할 수 없는 요지이다. 그랬기에 막강한 유총과 유요의 전조나 석륵과 석호의 후조도 쉽게 성한을 넘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천하 요새를 차지하고도 성한이 허무하게 동진에 멸망하게 된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이유는 무능하고 교만한 군주 때문이었다. 마지막 군주 이세는 훌륭한 신하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했고 아미구용(阿媚苟容,아부하는 눈썹과 개처럼 아양떠는 얼굴) 소인배들을 끼고서 폭정을 거듭했던 것이 백성의 마음을 돌이키게 만들었다. 이세의 아버지 이수도 성한 멸망에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초기에 이수는 매우 유능한 장군으로써 성한의 영토를 넓히는데 큰 공헌을 세웠다. 그러나 AD338년 황제가 된 후로부터는 장군일 때의 영명함과 정확한 판단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수는 뛰어난 군대 통솔력과 탁월한 국가지도력이 별개의 것임을 보여준 좋은 사례의 하나다. 이수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초대 황제 이웅이 세워놓았던 성한의 민심기반이 크게 흔들렸고 결국 그 아들 이세가 완전히 망쳐 버린 것이다. 성한의 창업자 태종 이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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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아쉬움도 있다. 이웅은 그의 탁월한 능력과 판단력으로 성한이라는 나라를 건국한 영웅이었다. 만년이 되어서 후계자를 세움에 있어서 어린 친아들 대신 뛰어난 능력의 조카 이반을 세우려고 한 것도 훌륭한 탁견이었다. 그러나 그 경우 친자식 이기와 이월이 일으킬 반발에 대해 깊이 대처하지 못한 것은 큰 실책이었다. 이반을 세우려고 했으면 친 아들 이기와 이월을 미리 제거하든지 아니면 철저한 이해와 설명을 곁들였으면 반란을 미리 막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많은 오호십육국 나라들이 짧은 기간에 붕괴되는 것도 대체로 리더십 결핍이 이유인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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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17년07월20일 14시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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