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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6A) 최초의 5호16국 성한의 성쇠(1)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06월29일 17시0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35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⑴ 팔 왕자의 난의 혼란한 틈을 탄 익주(지금의 사천성)의 조흠(趙廞)(AD300)

 

AD300년 당시 통일 대국 서진(西晉)은 이미 10여년 지속된 팔왕자의 난(AD291-AD306)으로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었다. 서진 조정은 희대의 어리석은 혼군 사마충을 등에 업은 가황후와 가황후 외가인 곽창이 정권을 농단하면서 태자 사마휼 마저 타살시키는 혼란상황이었다. 가황후 세력을 타도하려는 황가 종실은 결집했고 조왕 사마륜의 힘으로 가후가 독살되고 태자 사마휼이 복권되었으나 스스로 황제가 되려는 야욕을 지닌 사마륜의 치하에서 정권이 혼란하기는 가황후 집권 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당시 익주(지금의 사천성 지역)자사는 조흠이었는데 가황후의 인척이었다. 집권 실세 사마륜은 조흠을 대장추로 승신시켜 징소, 즉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의 후임으로 성도내사 경등을 승진시켜 익주자사로 임명하였다. 조흠은 겁이 났다. 이미 가황후가 독살된 터라 자기에게 어떤 형벌이 내려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징소되어 경사로 들어가 개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외진 익주를 장악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징소에 응하는 대신 창고를 풀어 민심을 사고 유민들을 불러 모아 진휼하면서 환심을 샀다.

 

이 당시 이상, 이특, 이류, 이양 형제들은 재주도 있었으며 무예 또한 갖추고서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익주자사 조흠이 특별히 우대하였다. 이특 무리들은 조흠의 배경을 믿고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약탈을 자행하면서 주민들의 원성을 높이 샀다. 성도내사 경등은 이특 무리들이 장차 혼란의 뿌리가 될 것이므로 이들을 서둘러 숙청을 하든지 아니면 외지로 쫓아내어야 한다는 보고를 조정에 올렸다. 조흠이 자신과 상의하지도 않고 조정에 보고를 올린 경등을 속으로 경멸하였다.   

  

새로운 익주자사 발령의 황제 조서를 받은 경등이 익주로 들어가려하자 부하 진순이 말렸다. 분위기로 볼 때 조흠이 공격해 올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경등은 진순의 권고를 무시하고 익주의 치소로 들어갔다. 조흠의 군사들은 은밀히 숨어 있다가 경등을 습격하여 죽였다. 그 소식을 들은 진순이 면박(윗옷을 벗어 항복을 표함)하고 조흠을 찾아와 주군 경등의 주검을 요청했고 조흠은 그를 의롭다 생각하여 경등의 시체를 돌려 주었다. 

 

경등을 처형하여 익주자사를 지킨 조흠은 사실상 서진 조정에 반란을 일으킨 셈이었다. 이제 자신의 세력을 넓혀 스스로 생존하는 일 이외에 다른 방법은 따로 없었다. 당시 서진 조정의 서이교위, 즉 서쪽의 오랑캐를 진압하는 총사령관 진총이 성도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조흠은 진총을 자신의 군영으로 초대했다. 진총의 부관 조모가 위험하므로 가지 말라고 말렸다. 그러나 진총은 조흠을 의심하지 않았다. 경등을 죽인 이유는 서진 조정에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소 개인적으로 원한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했다. 자신을 해칠 이유가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것은 심각한 오판이었다. 조흠에게 기습을 당한 진총 군대는 멸절되었다. 풀숲으로 도망가던 진총은 조흠의 병사에게 발각되어 죽었다. 조흠은 스스로 대도독, 대장군, 익주목이라고 자칭하면서 이 지역 군웅으로 할거하였다. 그 지역 많은 이민족들이 조흠에게 귀부하였다. 그 중에 이상(李庠)은 매부 이함과 4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흠에게 귀순하였다. 이제 조흠의 익주는 서진에서 분리된 독립 세력이나 마찬가지였다.

 

 

⑵ 이특(李特)의 조흠 타도와 익주 장악(AD301)

 

그러나 조흠에게 귀순한 이상 무리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고 무예도 뛰어났으므로 모두 경계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 조흠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숙청할 틈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이상이 조흠에게 칭호를 더 높여서 대도독 대장군 대신 황제라고 불러야 한다고 건의했다. 조흠의 측근들은 이 건의를 핑계삼아 이상을 대역부도하다고 몰고서 그의 아들과 조카 10여명을 함께 죽였다. 당시 이상의 동생 이특과 이류 형제는 군사를 이끌고 바깥에 있었는데 조흠은 이들을 다독거렸다.

 

“ 이상이 마땅하지 않은 말(황제가 되라는 말)을 해서 그렇게 된 것이니

  너희 형제들은 죄가 없다.“

 

조흠은 이특과 이류를 독장으로 삼아 환심을 끌려고 했으나 이특은 이미 조흠의 속내를 꿰뚫고 있었다. 조흠을 깊이 원망하면서 군사를 이끌고 고향 면죽(사천성 덕양)돌아갔다.  

 

조흠의 아문장 허엄은 끈질기게 파동감군을 시켜달라고 졸랐으나 조흠의 측근 두숙과 장찬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화가 난 허엄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두숙과 장찬을 찾아가 조흠의 면전에서 때려 죽여 버렸다. 놀란 두숙과 장찬의 수하들은 군대를 풀어 허엄을 죽였다.조흠의 핵심 측근 삼인방이 눈 깜짝할 사이 사라지면서 조흠의 위세는 빠르게 쇠퇴하였다.

 

이특은 이 틈을 타 7천 군사를 풀어서 조흠의 군영과 성도를 공격했다. 조흠에게 붙어있던 불원 등 부하들은 뿔뿔이 도망갔고 조흠은 처와 단둘이 배를 타고 달아나다가 시종에게 타살되었다. 이특의 무리들은 성도를 크게 약탈함과 동시에 서진 수도 낙양에 사람을 보내어 조흠의 죄상을 낱낱이 고해 올렸다. 서진 조정은 양주자사 나상을 익주자사로 임명했다. 나상은 이미 오래전에 조흠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예견했던 사람이었다. 재능이 뛰어난 나상이 익주자사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특 형제들은 두려워하며 나상을 극진히 영접했다. 나상의 측근 보좌인 왕돈과 신염은 이 기회에 이특 무리들을 죽여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들은 한갓 도적무리일 뿐이라는 이유였다. 자신만만한 나상은 왕돈과 신염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망한 신염은 옛 친구 이특에게로 가서 이렇게 경고하며 말했다.

 

“ 옛날에 아는 사람이 오랜만에 만나면 좋은 일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있게 될 것이오.“

 

이특에게 넌지시 자신의 경계하는 속내를 알려 준 셈이다.

 

서진 조정은 진주(秦州, 감숙성 동부 천수)와 옹주(雍州, 섬서성 중남부 한중)에 명령을 내려서 서쪽 촉지역으로 달아난 유민들을 모두 돌아오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특의 형 이보는 거꾸로 촉으로 들어가 나라가 혼란하니 돌아가지 말라고 권유하고 돌아다녔다. 이특도 형과 같은 생각이어서 익주자사 나상에게 사람과 뇌물을 보내 가을(7월)까지만 미루어달라고 요청했다. 나상이 허락했다. 

 

서진 조정에서는 조흠을 토벌한 공로를 높이 사서 이특에게 선위장군을 주는 등 그의 무리들에게 높은 관작과 상을 내리는 조서를 보냈다. 그러나 광한태수 신염은 그것이 못마땅하여 조정의 조서를 자신이 묵혀두었다. 조흠 토벌에 공을 세우고도 상을 받지 못한 이특의 장수와 군사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가을이 되자 나상은 약속대로 유민들에게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이특은 석 달만 더 미루어달라고 요청했다. 신염의 주장에 따라 나상은 이특의 요청을 거절했다. 더 나아가 신염은 이특이 지난 번 조흠 토벌 때 많은 재물을 훔쳤으니 그것을 다시 환수해야 한다고 재촉했다. 나상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유민들을 수색하게 했다. 수색을 당하며 재물이 빼앗기게 되자 유민들은 이특에게 몰려들어 보호를 요청했다. 삽시간에 이특은 큰 무리의 지도자가 되었다. 신염은 이특 형제의 머리에 현상금을 걸었다. 이특은 자신의 머리에 현상금을 건 종이를 걷어 이렇게 고쳐 걸었다.

 

“ 진주 여섯 군의 이민족 우두머리 이, 임, 염, 조, 상관, 저 및 수 족의 

  족장 머리를 가져오면 포 100필을 줄 것이다.“

 

유민이던 이민족들은 자신들의 목에 걸린 현상금을 보고 까무러치게 두려워했다. 모두들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은 이특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속속 귀순했다. 이특에게 몰린 군사는 2만을 넘었고 동생 이류에게도 수천 명이 귀순하였다. 이특 무리는 막강한 군사세력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⑶ 익주자사 나상의 반격과 이특 피살(AD303)

 

AD303년 정월 이특 무리는 넘보지 못할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익주자사 나상이 있는 성도를 공격했다. 당시 성도에는 성이 두 개 있었는데 익주자사 나상은 큰 성 대성에 있었고 촉군태수 서검은 작은 성 소성에 있었는데 서검은 싸우지도 않고서 이특에게 항복했다. 소성을 점거한 이특은 군사들에게 절대로 백성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고 당부했다. 몇 백 미터 떨어져 있는 대성의 나상이 화해를 요청했으나 이특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정을 베푼다는 이특의 소문이 퍼져나가자 촉지방의 여러 이민족들이 이특에게 귀부해 왔다. 동생 이류가 이특에게 말렸다.

 

“ 저들의 마음은 종잡을 수가 없으니

  그 자제를 인질로 잡고

  군사를 보내 감시를 높여야만 장차 일어날 일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이특의 보좌관 사마 상관돈도 같은 뜻으로 이렇게 경고했다.

 

“ 항복하는 사람을 맞이하는 것은 적을 맞이하는 것과 같습니다.

  쉽게 받아들일 것이 아닙니다.“

 

다른 동생 전장군 이웅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특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

 

“ 큰 일은 이미 확정되었다.

  너희들은 다만 백성들을 편안하게만 하면 될 것인데

  어찌 자꾸 의심하고 꺼려서 그들로 하여금 배반하게 만드느냐?“

 

익주수도 성도가 이특에게 공격받아 위태롭게 되자 서진 조정은 멀지않은 곳에 있는 형주자사 종대와 건평태수 손부에게 3만 군사를 보내 나상을 지원하도록 했다. 이특은 이탕과 촉군태수 이황을 보내 종대와 손부의 서진군사를 막았다. 종대와 손부의 군사가 강성하였으므로 이특의 휘하 각 보루에서는 두 마음을 품고서 어느 쪽을 지지해야 할지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나상의 장수 임예가 나상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 이특의 무리들은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게으르고 교만하여 방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주는 기회입니다.

  서둘러 여러 곳에서 동시습격을 감행하면      

  격파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나상은 임예를 몰래 성 밖으로 보내 이특에게 귀부한 여러 이민족에게 동시공격을 감행할 시간(2월 10일)을 알려 주었다. 더 나아가 임예는 이특에게 거짓으로 항복하면서 대성 안에는 먹을 것이 거의 떨어졌고 비단 밖에 남은 것이 없으므로 기다리면 저절로 무너질 것이 서둘러 공격하여 피를 흘릴 이유가 없다고 자문해 주었다. 이특은 임예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격을 중지시키는 한편 방비를 철저히 하지 않았다. 임예는 이특에게 집안일을 핑계 대며 빠져나와 나상에게로 돌아와 모든 것을 나상에게 보고했다.       

 

나상은 약속된 2월 10일을 기하여 여러 이민족들과 함께 소성을 공략했다. 이특은 대패했고 이보와 이원과 함께 목이 날아갔다. 시체는 태워졌고 목은 낙양 조정으로 보냈다. 다행이 살아남은 이특의 동생 이류와 이특 아들 이탕과 이웅 형제는 남은 무리를 이끌고 성도 북쪽 100KM 적조(사천성 면죽현)로 도망가서 그곳을 지켰다.  

 

이특이 죽자 동생 이류는 스스로 형의 지위였던 대장군 대도독 익주목이라 하면서 동쪽지역을 맡았고 이탕과 이웅 형제는 적조의 북쪽을 맡아 방어하였다. 3월 나상은 이류에 대해 총공격을 감행했으나 실패하였고 승세를 탄 이류는 군사를 끌고 다시 성도로 진격했다. 이 전투에서 이특의 부인이자 이웅의 생모인 나씨는 갑옷을 입고 전투에 나서서 눈까지 다쳤으나 더욱 장렬하게 싸워서 무리의 사기를 높였다. 이웅의 형 이탕은 전사했다.  

 

서진 조정은 시중 유침을 보내 나상의 지휘아래 대대적으로 이류를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이류는 형 이특, 조카 이탕이 연이어 죽었으므로 겁이 났다. 동생 이함(李含)도 인질을 몇 명 보내고 항복하자고 권했다. 이웅이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이류는 듣지 않았다. 5월에 이류는 아들 이세와 이함의 아들 이호를 인질로 보냈다. 이함의 다른 아들 이리가 서둘러 달려와 말리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웅이 사촌형 이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 오늘은 할 수 없이 이렇게 해야 합니다.

  때를 보았다가 저들을 습격합시다.“

 

이리도 동의했다. 이웅과 이리는 돌아와 유민들을 규합하고서 서진 군영을 습격했다. 종대와 손부가 이끌고 있던 서진 군영에서는 마침 종대가 죽었으므로 크게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다. 이웅의 습격으로 서진군대는 크게 패배하여 동북쪽으로 물러났다. 이웅의 삼촌 이류는 서둘러 항복한 것을 매우 부끄러웠다. 무리들은 이웅의 능력과 리더십에 감탄했으므로 군권은 자연히 이류에게서 이웅으로 돌아갔다.(AD303)   

 

  

⑷ 범장생과 서여의 도움과 이웅의 성도왕 즉위(AD304)

 

서진 조정은 확대되는 이웅 세력을 견제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여러 차례 군사를 보내 이웅 세력을 토벌하려 했으나 매번 성공하지 못했다. 서진 군사가 이웅 토벌에 실패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호북성 양양을 중심으로 장창이라는 거대한 반란 세력이 활약하고 있었고 또 다른 이유는 지역을 나누어 맡고 있는 여러 황실(사마씨)의 왕들이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며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AD303년 당시 조정의 실력자는 사마예였지만 이에 대항하는 하북지역의 사마영, 관중(서안)지역의 사마옹, 그리고 산동성 지역의 사마월 등이 서로 견제하며 할거하고 있었으므로 반란세력들을 통합하여 토벌하지 못했다.     

이웅의 주도하에 적조지역에서부터 세력을 계속 넓혀가는 동안 어려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주민들은 계속되는 전쟁을 피해 장강을 따라 남쪽지역으로 도망가 버렸으므로 군대를 먹일 식량이 매우 부족했다. 이류와 이웅의 무리들은 노략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또한 고산지역이 대부분이 지역 특성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군사들은 주리고 궁핍했고 사기는 떨어졌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던 나상의 부하 평서참군 서여가 나상에게 문산태수를 시켜주면 이류를 즉각 토벌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서여의 생각은 자신의 고향 부릉(사천성 중경)출신인 범장생의 도움을 얻어서 식량을 공급받으면 쉽게 이류를 토벌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나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화가 난 서여는 이웅에게로 가서 항복하고 범장생을 강력하게 추천했다.

 

이웅은 범장생이 촉지역에서 명성은 물론 덕망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그를 초빙하여 군주로 삼고 자신이 스스로 신하가 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범장생은 극구 거절했다. 제장들이 굳게 존위에 나아가기를 권하였으므로 이웅은 할 수없이 받아들여 성도왕이 되었다.(AD304)     

 

왕이 된 이웅은 일단 서진의 형법체제를 폐기하고 일곱 조목으로 줄였다. 돌아가신 아버지 이특을 성도경왕으로 추존하고 생모 나씨를 왕태후로 올렸다. 숙부 이양을 태부로 삼고 사촌 이리를 태위, 이국을 태재로 임명했으며 이운은 사도, 이황은 사공, 염식은 상서령, 그리고 양포를 복야로 삼았다. 이웅은 사촌동생(즉 숙부 이함의 아들) 이국과 이리의 재능을 매우 높이 사서 항상 그의 의견을 들어 결정을 내렸고 이국과 이리 또한 이웅을 대하는 것이 깍듯하고 엄중했다. 

 

   

⑸ 범장생 초빙과 이웅의 황제 등극(AD306)

 

팔 왕자의 난 한 가운데 있었던 AD303-AD306년 저간에 서진 조정의 실력자는 사마예에서 사마영을 거쳐 사마옹과 사마월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냥 순차적으로 옮겨 간 것이 아니라 연대하여 동지였던 사이가 적으로 바뀌기를 반복하며 쿠테타가 일어난 것이다. 정권 수뇌세력들이 한 해가 멀다하고 교체되는 상황에서 이웅을 포함한 지방 토호세력들은 자신의 영역을 착실히 확장해 나갈 수가 있었고 그 시초가 이웅의 성한(成漢)과 유연의 전조(前趙)인 셈이었다. 성도에서 성한을 건국한 이웅은 부릉(중경)에 있는 범장생을 정중히 초빙했다. 범장생이 성도에 도착하자 이웅은 성문 밖까지 나아와 영접했고 손수 홀판을 주면서 승상이라는 벼슬을 내리면서 범현(范賢)이라고 불렀다.  

 

이웅은 신하들의 권고를 받아 곧바로 황제에 등극하고 국호를 대성(大成)으로 정했다. 대사면령을 내리고 범장생에게는 천지태사(天地太師)라는 직책을 하사했으며 상서령 염식의 권고에 따라 한나라와 진나라의 예에 따라 백관을 설치했다.(AD306년6월)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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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7년06월29일 17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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