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률의 심쿵 인터뷰] “민주국가로 거듭난 한국 보면 우리가 흘렸던 피 헛되지 않아”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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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국가 간의 경계는 터키에 있다. 이스탄불 코앞에 있는 수많은 섬은 예외 없이 모두 그리스 땅이다. 불가사의한 이 같은 국가 간의 경계는 터키 건국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이 정했다. 눈앞 지중해와 에게해의 수많은 과거 영토를 포기하고서라도 이스탄불만은 지켜야 한다는 그의 판단이 오늘날 이스탄불을 존재케 한다.
6·25 때 두 번째 많은 전투병 파병
경제·군사 교류 어느 때보다 활발
K팝 한류 터키인에겐 하나의 일상
기독교·이슬람 문명 경계선에서
세속주의·EU 가입 등 난제 산적
최근엔 개헌 이슈에 국제적 관심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이란 낯익은 과거 이름과 함께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이 거대한 나라가 최근 들어 세계인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개헌 때문이다.
올해가 한·터키 수교 60주년이 되는 해, 아르슬란 하칸 옥찰 주한 터키 대사를 만났다.
- 최근 들어 터키 개헌 선거가 단연 세계인의 관심거리다.
“대사의 풀네임은 특명전권대사다. 이름 그대로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자리다. 따라서 나는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을 대표해 한국에 왔다. 당연히 에르도안 대통령의 개헌과 관련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나의 신분과 맞지 않다. 개헌 이슈는 이쯤 하자. 더 이상은 곤란하다. 그러나 개헌안이 찬성으로 통과됐다는 게 모든 것을 말해 준다. 지나치게 서방의 시각으로만 보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한·터키 수교 60주년이다. 에버랜드에 터키 정원도 만들어졌다.
“60년이란 참 의미 있는 숫자다. 한국도 예전에는 60이 되면 환갑이라고 해서 큰 잔치를 벌였다고 들었다. 터키도, 한국도 예전에는 가난한 농경국가였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가 아니라 인생육십고래희로 예순까지 살아내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래서 60이란 숫자가 의미 있는 게 아닌가.
터키는 한국의 네 번째 수교 국가다. 60년간 국가 간 큰 부침 없이 우정을 쌓아 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오늘날 한국인이 누리는 자유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엔 터키도 일조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다음으로 가장 많은 전투병(5500명)을 파병한 나라가 터키다. 훌륭한 민주국가로 거듭난 한국을 보면 우리가 한반도에 흘린 피가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조성된 에버랜드 터키 정원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에버랜드를 찾는 한국의 수많은 신세대가 터키 정원을 산책하면서 터키와 한국과의 따뜻한 우정을 느꼈으면 좋겠다. 터키와 한국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좋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04년 당시 총리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으며 이듬해에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1957년 수교 이래 처음으로 터키를 공식 방문했다. K팝·K드라마 등 한류는 이제 터키인에게 하나의 일상이 되고 있다. 경제·군사적 교류도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 한국의 기성세대는 교과서에 등장하는 케말 파샤에 관한 글과 동상을 보며 자랐다. 이스탄불 국제공항 이름도 아타튀르크 국제공항, 즉 케말에서 유래됐다고 들었다.
“그는 유럽과 아시아에 낀 터키를 오늘날과 같은 독립 강대국으로 만든 국부와 같은 존재다. 터키의 기틀을 다진 위대한 지도자다. 이른바 세속주의(secularism) 헌법을 제정하고 근대화의 터를 다졌다. 한국으로 치면 이승만과 박정희를 합친 인물쯤 된다. 알려진 대로 ‘아타’는 아버지, ‘튀르크’는 터키를 의미한다. 그래서 ‘터키의 아버지’ ‘국부’쯤으로 이해되는데 터키에서 ‘아타튀르크’는 존경의 언어다.”
-그러나 오랜 세월 어렵게 지켜왔던 세속주의가 최근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나친 우려다. 세속주의는 터키 헌법에 굳건히 새겨져 있다. 따라서 그 같은 지적은 기우다. 물론 도시의 가난한 노동자나 시골 오지의 경우 세속주의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 생활에 대한 불만의 한 모습이다. 세속주의가 바뀌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터키 지도자들은 세속주의를 터키에 어떻게 효율적으로 적용시킬까를 고민해 왔다. 그 뿌리에 아타튀르크가 있다. 그래서 그가 더욱 영웅시되고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유럽연합(EU) 가입을 꿈꿔 왔지만 최근 들어 요원해지는 느낌이다.
“정말 오랜 세월 노력해 왔다. 알려진 대로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가 차도르 등 이슬람 복장을 강제화한 것과는 반대로 터키는 한동안 차도르 착용 금지를 강제화해 왔다. 심할 때에는 잠잘 때 입는 파자마까지 서양식으로 입도록 법제화했다. 전통 이슬람 문화를 도외시하면서까지 EU 가입을 염원해 왔다. 여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천신만고 끝에 독립한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강박이 한몫했다. 결국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의 일원이 됨으로써 지난 냉전 시대에는 유럽의 일원으로 위치를 굳혔다.
그러나 EU 가입은 여전히 지지부진이다. 작고 가난하고, 그래서 우리가 보기엔 비교조차 안 되는 그리스마저도 보란 듯이 EU 일원으로 엄청난 지원을 받고 있다(터키와 그리스의 관계는 한·일 관계와 비슷하다고들 한다). 터키의 인권이 EU 기준에 미흡하다는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핑계에 불과하다. EU 회원국 대부분이 기독교권인 반면 이슬람 국가라고 해서 거절당하고 있다는 건 이제 누구나 안다. 실제로 터키보다 늦게 신청한 가난한 동구권 소국들조차 대부분 EU 회원국이 되지 않았나. 그런 점에서 오늘날 터키에 대한 EU의 태도는 배타적인 기독교 국가들의 이율배반과 다름없다.
그래서 지적한 대로 최근 들어 EU 가입 무용론이 부쩍 드세다. 일부 보수층과 여대생들은 오히려 차도르를 쓰고 서구화 과정에서 폐허가 됐던 이슬람 사원을 복원시키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무슬림 회귀정책과 부분적으로 맞아떨어지고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탄불에 가 보면 뉴욕 맨해튼이나 프랑스 파리 같은 느낌이 든다.
“이스탄불은 서울의 홍익대 입구와 다름없다고 보면 된다. 클럽을 한번 가보면 안다. 홍익대 입구와 강남역 네거리의 클럽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관광객 모두 놀란다. 과연 이슬람 국가인지 믿어지지 않는 곳이 이스탄불이다. 그만큼 서구화됐다. 그래서 최고의 관광국가로 급부상하고 있다. 터키는 문명과 문명이 만나는, 인류학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단층국가다. 이슬람권과 기독교권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경계로 터키에서 만난다. 특히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이스탄불 방문은 버킷 리스트로 단연 톱이다.”
- 오르한 파무크에 대해 얘기해 보자.
“그는 터키인으로선 처음 노벨상을 받았다. 파무크에 대한 시각은 터키인들 사이에서도 엇갈린다. 그러나 문학적인 성과는 대단하다. 저서 ‘이스탄불’은 세계사의 주역이 될 만한 역량을 지녔으면서도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서양사의 초라한 변방으로 밀려난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이 배경이다. 화려했던 제국의 비애와 함께 터키인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한국에 파무크의 독자가 워낙 많아 이스탄불의 이노센스 박물관을 찾는 한국인이 부쩍 늘었다. 그러나 그는 터키에서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귀족적인 삶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다. 보통 터키인과는 다른 삶의 궤적을 지니고 있다. 다소간의 코즈모폴리턴적 취향도 그래서 나온 게 아닌가 짐작된다.”
오스발트 슈펭글러나 아널드 조셉 토인비 등은 서구 문명이란 많은 문명 중 하나에 불과하고 따라서 모든 인류가 그것을 숭상하고 글로벌 스탠더드로 받들어야 할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미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대립이 자칫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지구촌을 공포에 떨게 하는 작금의 테러가 생생한 예가 된다. 장시간 옥찰 대사와 얘기를 나누면서 실제로 종교나 문화 차이에서 오는 갈등은 정치·경제적 이유보다 치유와 화합이 훨씬 어렵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관저에 울려 퍼지는, 국내에 널리 알려진 터키 민요 ‘위스퀴다르’가 오늘따라 유달리 크게 들린다.
<위 글은 중앙선데이 제532호 (2017.5.21)에 게재된 [김동률의 심쿵 인터뷰] ‘한국·터키 수교 60주년, 옥찰 주한 터키 대사’를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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