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 흥망의 교훈:#5B 졸지에 건국하고 망해버린 전조(2)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05월25일 17시47분
  • 최종수정 2017년05월25일 17시48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43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6> 유요와 진원달(AD304)

 

한왕 유요는 나면서부터 흰 눈썹을 가졌으며 눈동자는 붉은 빛이 났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으며 지혜와 담력을 모두 갖추었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유연에게서 길러졌는데 유연 또한 조카 유요를 매우 사랑했다. 이석에서 좌국성으로 수도를 옮긴 유연은 종조부 유선을 승상으로 삼고 최유를 어사대부, 종친이자 좌어육왕인 유굉을 태위로 삼았으며 진원달을 황문랑으로 임명하였다. 

 

진원달은 젊어서 지조가 굳었으며 실력이 깊어서 오래 전부터 유연이 초빙하려고 했으나 진원달이 거절했었다. 어떤 사람이 진원달에게 무서워서 그러냐고 묻자 진원달이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 내가 그 사람의 사람됨을 안지가 오래 되었고

  그 또한 나를 안지가 오래되었소.

  아마 며칠 있으면 와 달라는 그의 편지가 올 것이요.

 

정말 며칠 되지 않아 유연의 징소(초빙)하는 편지가 도달했다. 진원달은 유연을 섬기면서 여러 번 간언을 올렸지만 물러나서는 무슨 말을 올렸는지 모두 지워버렸으므로 그의 아들조차 진원달이 어떤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7> 유연의 황제 등극과 수도 이전(AD308년1월)

 

한왕 유연은 서진이 팔왕자의 난으로 지리멸렬한 틈을 타서 남하하기로 결단했다. 아들 무군장군 유총에게는 정남쪽으로 진격하게 하고 보한장군 석륵에게는 동쪽으로 나아가 옛날의 조나라와 위나라 지역을 공략하게 하였다.(AD308년 1월)

 

수도 좌국성(지금의 산서성 여양시)을 떠난 유총의 군대는 곧바로 남하하여 습현을 장악한 뒤 평양(산서성 임분현)까지 점령했다.(AD308년 7월2일) 유연이 점령지 주민을 극진히 우대하며 다독거리자 더 많은 주민들이 유연에게로 항복해 오면서 유연의 전조는 급격하게 영토가 확장되었다. 유연은 지금의 수도 좌국성이 너무 북쪽에 치우쳐있다고 판단하고 새로 점령한 포자(산서성 습현)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리고 주변의 강권을 못 이긴 유연은 황제자리에 올랐다.(AD308년 10월3일)   

 

다음 해 AD309년 정월 초하루 형혹성(화성)이 자미성(별자리)을 침범하는 일이 벌어지자 전조의 태사령(천문관측 책임자) 선우수지가 유연에게 말했다.

 

“ 3년을 넘지 않아서 반드시 낙양을 점령할 것입니다.

  포자(산서성 습현)은 너무 외지고 험준하니 오래 지내기 어려운 반면

  평양(산서성 임분)은 넓고도 풍요로우니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유연은 즉시 수도를 임분으로 옮겼다.(AD309년1월) 유연은 아들 유총, 왕미, 그리고 석륵을 보내 남쪽과 동쪽으로 줄기차게 국경을 확대해 나갔다. 물론 유연의 부하 왕미나 석륵이 반독립적인 자세를 보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서진에 대항하는 세력으로써 유연과 연합을 끊지는 않았다. 유연의 국토확장의 첫 고비는 서진과의 호관전투(AD309년 봄)였다. 호관은 지금의 산서성 장치시 동남쪽 지역으로써 회하지방 및 하남지역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이었다. 유연은 왕미와 석륵과 유총을 보내 호관을 공격했다. 서진의 실권자 사마월은 병주자사 유곤에게 방어를 명령했고 유곤은 황숙과 한술을 보내 막았으나 유총이 한술을 격파하고 석륵은 황숙을 전멸시켰다. 다급한 사마월이 추가로 왕광, 시융, 조초 등을 보내 방어하려고 했다. 왕광은 황하를 건너 유연군대를 습격하자고 했으나 시융은 수비에 치중하자고 했다. 왕광이 화를 내며 말했다.

 

“그대는 많은 군사들의 사기를 꺾으려하는가?”

 

시융이 물러가면서 말했다.

 

“  저들은 용병에 귀신같은 자들인데 

   아둔한 왕광이 섣불리 공격을 감행하다니

   우리들은 오늘 모두 전사하겠구나.“

 

왕광과 서진의 군사들이 태행산에서 유총의 군사를 만났고 호관 서남쪽 장평(산서성 고평현)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왕광이 대패했고 시융과 조초는 모두 전사했다.  

  

 

<8> 유연의 낙양 및 하내지역 공격(AD309-AD310)

 

장평에서 크게 이긴 유연은 남으로 여세를 몰아 낙양을 공격했다. 초왕으로 승진한 유총이 선봉에 나서 서진군대를 크게 이겼다. 서진에서는 조무를 보내 대항했으나 모두 패하고 말았다. 기세가 등등해진 유총은 의양(하남성 의양)까지 내려갔는데 방비를 게을리 한 탓에 서진의 홍농태수 원연의 함정에 빠져들어 야습을 받고 패퇴하였다. AD309년 9월, 화가 난 유연은 다시 유총과 왕미, 시안왕 유요, 그리고 여음왕 유경을 파견하여 정예기병 5만으로 남하했고 호연익은 보병을 이끌고 그 뒤를 이어 받쳐줬다.

 

10월 유총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가 낙양성을 거의 함락시키고 수비대장들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갑자기 황제 유연이 유총을 수도 임분으로 소환했다. 유총은 소환명령이 부당하다고 하면서 계속 공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왕미나 선우수지가 유연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면 항명으로 죄를 얻는 일이라고 설득하자 유총도 할 수 없이 군사를 돌려 돌아왔다. 유연의 부하장수 석륵은 종횡무진 지금의 하남성 중부지역을 휘돌며 노략질했고 정동대장군 왕미는 왕미대로 석륵과 연대하며 하내지역을 침범하면서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그러나 왕미의 세력이 강해지면 질수록 석륵과의 마찰은 불가피해졌다. 왕미의 책사 유돈이 그걸 알고 있었다. 유돈은 주군 왕미에게 청주의 조억과 연대하여 석륵을 제거하자고 했다.왕미도 찬동하여 서로 협조하자는 편지를 조억에게 보냈다. 왕미는 석륵에게도 자신과 함께 조억의 청주를 공략하자고 꾀었다. 왕미의 편지를 지니고 조억에게 가던 유돈이 도중에 석륵의 수비병에게 잡히는 바람에 왕미의 은밀한 석륵 타도의 계획이 탄로가 났다. 잡힌 유돈은 즉시 처형되었으나 석륵은 유돈처형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AD311년 10월)        

 

왕미는 자신의 석륵 타도의 계획이 탄로 난 줄을 모른 채 석륵에게 이런 저런 일로 축하하기도 하고 또 자신을 낮추어 보이며 석륵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러는 왕미의 태도를 본 석륵은 왕미가 마음속에 음흉한 생각을 지니고 있음을 더욱 확신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시간이 올 때 까지 왕미 제거작전의 결행을 미루었다. 마침 왕미가 석륵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자 석륵은 몸소 대군을 이끌고 지원했다. 왕미는 석륵이 자신을 믿고 있는 것을 더욱 확신했다. 왕미의 신뢰를 이용하여 다음 달 석륵은 왕미를 연회에 초청했다. 왕미로서는 도와 준 사람이 오히려 연회까지 베풀어 주다니 감사한 일이었다. 왕미의 책사 장숭이 참석하지 말라고 여러 차례 조심스럽게 말렸지만 왕미는 듣지 않고 연회에 참석했다. 왕미가 정신없이 술에 취했을 때 석륵이 다가가 왕미의 목을 베어버렸다.(AD311) 그리고는 유총에게 “왕미가 반역을 도모했다.”고 보고했다. 유총은 석륵의 조치에 크게 화를 내었으나 석륵의 군사력이 너무 강했으므로 어떤 징벌조치도 내리지 않았다.    

 

 

<9> 유연의 죽음과 유예(劉銳)의 쿠테타와 유총 등극(AD310년 7월)

 

AD310년 1월 유연은 애첩인 선징의 딸 선(單)씨를 황후로 삼고 동시에 가장 나이가 많은 유화(和)를 황태자로 책봉했었다. 6개월 뒤인 7월 9일 유연이 병석에 눕게 되자 미래가 걱정이 된 유연은 여러 종친들을 요직에 앉힘과 동시에 가장 능력이 뛰어난 유총에게 대사마, 대선우 및 상서령의 직책을 맡겼다. 그리고 임종에 가까워지자 종친 어른인 진류왕 태재 유환락과 이희라는 사람을 불러 특별히 미래를 부탁하고 곧 유연은 죽었다(AD310년7월18일) 태자 유화가 계승하여 황제가 되었다.

 

유화는 시기심과 의심이 많았고 욕심 또한 지나쳤다. 당연히 생각이 바른 아버지의 충신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권한이 유총에게 귀속된 것이 불만이었다. 호연유라는 사람은 과거 유연이 재능이 없다고 깔보면서 승진을 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에 유연의 옛 신하들에 대한 불만이 쌓여 있었다. 시중 유승 또한 유총과 사이가 나빴고 서창왕 유예(劉銳)는 자신이 고명대신에서 배제된 것에 대해 불만이 쌓여 있었다. 불만을 품은 황제 유화와 호연유와 유승과 유예는 당연히 한 통속이 되어 실권자 유총을 몰아 낼 계획을 세웠다. 먼저 유예가 황제 유화에게 다가갔다.

 

“ 선제께서는 모든 군권을 유유, 유릉, 유차 및 유총 등 네 장군에게 위임하시고

  수도 부근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으니   

  황제께서는 허수아비 더부살이를 살고 계신 것입니다.

  서둘러 계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유화는 외삼촌 호연유의 말을 굳게 믿고 유총을 몰아 낼 생각을 굳혔다.7월 20일 황제 유화는 종친 유성과 유흠을 은밀히 불러 유총 제거 계획을 알렸다. 깜짝 놀란 안창왕 유성이 말했다.

 

“ 아니 선제의 재궁(관)이 아직 빈소에 안치되어있고

  네 왕은 아무 반역의 낌새도 없는데

  별안간 그들을 어육으로 만들면 천하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대업이란 크고도 큰일인데 아첨꾼들의 참소를 믿고서

  형제간을 의심하면 되겠습니까?

  형지를 믿지 못하면 누구를 믿는 단 말씀이십니까? “ 

 

호연유와 유예가 유성을 크게 꾸짖고는 칼을 뽑아 유성을 베어버렸다. 유흠은 갑자기 생각을 바꾸어 유총 제거계획에 동참하겠다고 나섰다. 다음날(7월21일) 유예는 군사를 이끌고 유총을 공격했고 호안유는 유유를 맡았으며 유승은 유륭을 공략하면서 전밀과 유선을 보내 유차를 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전밀과 유선은 유총에게 항복하면서 전체 계획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예는 계획을 바꾸어 유승과 호연유와 합세하여 유총 대신 유륭과 유유를 공격하여 이들을 죽였다.(7월22일) 그러나 10만 군사를 거느리는 유총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총이 대군을 거느리고 황궁 안으로 들어오자 유예은 달아나다가 사로잡혔고 다음날인 7월 24일 황제 유화마저도 군대에 의해 피살되었다. 유총은 반란에 가담한 유예, 호연유와 유승을 효수했다. 신하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유총은 자신은 서자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황위를 사양한 채 아버지 유연이 죽기 직전까지 사랑한 선씨(單씨)가 낳은 유예(劉乂)에게 양보했다. 그러나 유예가 극구 자리를 맡지 않으려하자 유총이 황제자리를 수락하며 말했다.

 

“ 동생 유예와 여러 공경들이 나를 떠미는 것은

  내가 반란을 잘 수습한 때문이기는 하나

  그것은 나의 집안일이었으니 그것이 무엇이 큰 공이겠소.         

  다만 유예가 나이가 어리니 그가 크게 장성하기를 기다렸다가

  마땅히 그에게 자리를 물려준다는 조건으로 자리를 잠시 맡도록 할 것이오.“

 

유예를 황태제, 영대선우 및 대사도로 책봉하고 처 호연씨를 황후로 삼았다. 

 

 

<10> 서진 병주자사 유곤(劉琨)의 유총 토벌요청(AD310)

 

내부 분란으로 국가 존망이 흔들리던 서진의 병주(지금의 산서성 태원)자사 유곤은 주변의 흉노족을 소탕하기 위해 탁발의로에게 연대할 것으로 요청했다. 탁발의로 또한 자신의 통치에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흉노라고 판단했으므로 동생 탁발불과 조카 탁발울률에게 2만명이 기병을 붙여 유곤에게 보내어 흉노족을 소탕했다.

 

유곤은 탁발의로와 의형제를 맺고서 조정에 그를 대공(代公)이라는 작함과 대선우로 책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대(代)지역은 병주가 아니라 유주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유주자사 왕준이 강력하게 반대하면 탁발의로를 공격하는 군대를 일으켰다. 탁발의로가 왕준의 군사를 잘 막아내기는 했으나 유곤과 왕준의 사이는 결정적으로 틀어지고 말았다.    

 

탁발의로는 대라는 땅을 얻지도 못했고 또 왕준과도 사이가 멀어지게 되자 대신 군사와 주민들을 이끌고 형령지역(지금의 산서성 대현)으로 이동하면서 그 지역 땅에 대한 통치권을 요구하였다. 서진 정부는 탁발의로의 요구를 거절할 명분도 힘도 없었다. 결국 탁발의로는 이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120여년 뒤인 AD439년 북중국을 통일하는 북위라는 막강한 나라의 기초를 닦게 된다. 

 

 

<11> 유총의 형 유공 살해와 어머니 선씨 간통(AD310)

 

황제가 된 유총은 마음속에 한 가지 꺼림이 있었는데 손 위 형 유공을 제치고 황제가 된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유총은 여러 가지 방책을 고민하다가 자객을 보내 그를 죽였다. 아버지 유연의 첩 선씨는 나이도 어리고 미모도 매우 뛰어났다. 유총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선씨를 간통했는데 이 사실이 궁궐 내에 퍼졌고 그의 아들이자 자신의 이복동생인 유예가 형 유총의 잘못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나섰다. 부끄러움을 견디다 못한 선씨는 자살을 택했고 태제 유총과 유예의 사이도 크게 금이 갔다.   

 

유총의 적실부인 호연씨가 유총에게 말했다.

 

“ 아버지가 묵으면 아들이 계승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법칙입니다.

  폐하께서는 아버지 고조(유연)의 대통을 이어받으신 것인데

  태제 유예가 또 무엇이란 말입니까?

  만약 그에게 대통이 이어지는 날이면

  폐하의 적자인 유찬(호연씨의 아들이다)과 그의 형제는 씨도 안 남을 것입니다.“

 

유총이 생각해보겠다고 말하자 호연후가 다시 다그쳤다.

 

“ 일이란 내버려두면 변화가 생기는 법입니다.

  유찬 형제가 자라면 자랄수록 태제 유예는 불안한 생각은 가질 것입니다.

  만에 하나 소인배들이 선동이라도 한다면

   오늘 당장에라도 변고가 생기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유총도 수긍이 가는 말이었다. 황제의 생각이 유예에게서 자꾸 멀어지는 감을 잡은 광록대부 선충(유예의 외삼촌)이 눈물을 흘리며 조카 유예에게 말했다.

 

“ 소원한 사람은 가까운 사이에 끼어드는 법이 아닙니다. 

  지금 황제 유총은 아들 유찬에게 뜻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서둘러 태제 자리를 양보하시고 물러나셔서

  몸과 가족을 온전히 보전하시지 않으십니까?“  

 

태제 자리를 물려주고 화를 피하라는 말이었다. 아둔한 유예가 이렇게 대꾸했다.

 

“ 아니 애당초 금상께서 적통과 서통을 구분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소.

  나중에 제가 장성하면 반드시

  자리를 적통이 나에게 물려주기로 만인 앞에서 서약했지 않소.

  그 때 그 자리에 외숙께서도 계셨잖습니까?  

  부자 사이나 형제 사이가 가깝고 먼 차이가 있다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나는 형님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유총은 끝내 유예를 죽이지는 않았다. 장성하면 황위를 물려주겠다는 동생과의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위반한 것도 아니다. 유예의 태제 자리를 계속 유지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유예는 7년 뒤 조카이자 유총의 아들인 유찬의 조직적인 무고에 의해 죽음으로 몰리게 된다.(AD317년)  

                                                                    <다음 호에 계속>​ 

43
  • 기사입력 2017년05월25일 17시47분
  • 최종수정 2017년05월25일 17시48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