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개혁의 결단은 대통령 몫이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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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는 ‘감춰진 조세’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보자기에 싸여 길러지다가 커가면서 몸에 맞는 옷을 입고 맵시를 자랑하게 된다. 그런데 성장과정에서 몸에 맞지 않는 옷은 보기에도 흉하거니와 성장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우리 사회의 규범을 정하는 규제 역시 마찬가지다. 시대는 엄청난 변화와 진보를 거듭하는데 규제는 그대로라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국력을 신장시키는데 저해요인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일상생활을 힘들게 하는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기업들에게는 비능률을 초래하고 비용 상승의 원인을 제공해 상품이나 서비스의 값을 올리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규제는 ‘감춰진 조세’라고 한다. 규제의 비효율로 나타나는 부담은 국민들의 몫이고, 없어도 될 규제를 집행하느라 들어가는 비용 역시 모두 국민세금으로 충당되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 2년차를 맞아 올해 초부터 좀처럼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혁신성장’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 실천 수단으로 규제혁신을 내세웠다. 근래 들어 실질적인 행보로 인터넷전문은행의 은산분리 완화를 천명했다. 지난 8월7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규제혁신 현장방문 행사에 참석해 “은산분리는 우리 금융의 기본 원칙이지만 지금의 제도가 신산업의 성장을 억제한다면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정부, 혁신성장 위한 “규제개혁 속도감 있게 추진” 천명
뿐만 아니라 정부는 원격의료추진, 산악케이블카 허용, 수도권 규제완화 등 20개 과제를 추려 집중적으로 규제개혁을 추진키로 했다고 한다.<한국경제신문 8월13일자 1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과연 잘 추진될 수 있을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은산분리 완화 발표가 나오자마자 문대통령의 핵심지지층이라 할 수 있는 진보시민단체들이 규제완화에 대한 조직적 반발 움직임을 노골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여연대는 9일 “문 대통령은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심화시킬 수 있는 은산분리 완화 정책을 당장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경실련은 “인터넷전문은행이 재벌과 거대 자본의 사금고(私金庫)로 전락할 것”이라고 했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은 다음 달 총파업을 예고하는가 하면 민주노총은 “규제완화는 친 재벌 정책‘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규제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긍정과 부정의 효과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큰가? 또 국민생활에 보탬이 되는가?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어떤가?… 등등을 따져 종합적으로 판단해 볼 문제다. 규제개혁은 시민단체나 이익단체들의 이해에 얽매이거나 이념적 정체성을 앞세워서는 곤란하다. 유일한 판단기준은 국민생활의 질적 향상과 함께 급변하는 국제환경에 부응하면서 국가경쟁력을 제고시킬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고려하는 것이다.
‘이념적 가치관’ 앞세운 규제는 시대착오적…언제까지 ‘재벌개혁’ 타령만 할 것인가?
예컨대 “은산분리 완화는 은행을 재벌과 거대자본의 사금고(私金庫)로 전락시킨다”는 것이 은산분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핵심 내용이다. 과연 맞는 말인가? 순수 금융자본이 부족한 우리는 오히려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참여를 통해 금융 산업의 발전을 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산업자본의 참여를 허용하되 차단벽을 만들어 재벌(시민단체의 표현을 빌리면)들의 자금운용에 대한 간섭을 철저히 막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 아닌가? 금융감독원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금융기관들이 불법대출이나 부당편법대출을 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국민들의 이익침해를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다. 금융감독 기능이 제대로 역할을 하게 되면 문제될 게 없다.
폐 일언하고 이념적 가치관에 입각한 규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국제경제 질서는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는데 우리는 수십 년 전부터 읊조려온 “재벌 개혁 타령”만 해서야 되겠는가? 선진국들은 물론 이웃 경제대국 중국까지도 내일의 먹거리를 찾아 기술혁신을 통한 성장에 골몰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말로만 혁신을 부르짖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김대중정부 출범초기에 정부가 시행했던 “규제 50% 폐지”를 떠올려 보면서 그 같은 ‘규제 대청소’ 프로젝트를 지금 재현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규제50% 철폐’와 ‘작은 정부 실현’에 대한 의지는 참으로 확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필자가 민간규제개혁위원(1998.4~2002.3)으로 참여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확고했던 김대중 대통령의 “규제50% 철폐와 작은 정부 실현” 의지, 되새겨볼 때
당시 규제 철폐는 우선 각 부처가 자율적으로 폐지안을 만들고, 이를 규제개혁위원회가 심의해 확정하는 절차를 밟았다. 1998년 4월18일 규제개혁위원회가 출범하고 규제개혁 작업을 시작한지 6개월이 지난 그해 10월 초 규제철폐 대상 35개 중앙행정기관 가운데 21개 기관이 규제심사를 마쳤다. 그런데 폐지율은 22%에 불과했었다. 이 같은 내용을 김태동 정책기획수석으로부터 보고받은 김대중대통령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국무회의 석상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규제 폐지율은 50%를 넘겨라, 개선과제는 50%에 포함시키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재지시를 내렸다. 여유 있게 넘기는가 싶었던 각 부처가 혼비백산한 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
일부 부처는 법률 자체를 통째로 폐지하는 등 다소 무리한 실적 채우기에 나서 결국 총 등록된 11,125개 규제 가운데 5,430개(48.8%)를 폐지하고 2,411개 (21.7%)를 개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규제 존치는 3,284개(29.5%)에 불과했다. 물론 이 같은 결과에 대해 훗날 숫자에 집착한 무리한 규제철폐였다는 비판도 나왔지만 규제개혁은 그 정도의 비상적(非常的) 조치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성과는 높이 평가할만하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규제개혁에 있어서 대통령의 역할이 절대적이라는 점이다. 규제문제는 정부의 각 부처 간에도 이해가 상반(相反)된다. 이해가 상충되는 장관들에게 합의안을 내라고 하면 불가능에 가깝다. 똑같은 규제를 놓고도 시민단체는 물론 이익집단들 간의 이해상충은 천지(天地)차이다. 밥그릇 싸움인 경우가 태반이어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덤벼든다. 심지어 우리사회의 상류 지도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의사와 약사들까지도 의료보험 확대나 원격의료, 그리고 편의점에서의 일반의약품 판매확대 등을 놓고 치열한 밥그릇 싸움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타협에 의한 자율적 개선이나 문제해결을 기대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와 다르지 않다.
20년간 쌓인 ‘규제의 적폐 청산’ 추진해 보면 어떨지…
따라서 결단을 내리는 것은 대통령의 몫이다. 물론 최종적으로 실행되는 것은 국회의 입법을 통해 이뤄지지만 지금의 권력구조로는 대통령이 중심축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지금 규제대청소를 해보자는 것도 과거와 같은 ‘폐지율 50%’를 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등록된 모든 규제에 대한 일제점검을 해보자는 얘기다. 이를 위해서는 국무총리와 민간인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규제개혁위원회를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규제개혁위원회를 국무총리실 산하기관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행정규제기본법 23조에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정부의 규제정책을 심의·조정하고 규제의 심사·정비 등에 관한 사항을 종합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대통령 소속으로 규제개혁위원회를 둔다.”
대통령 직속기관이라는 얘기다.
올해가 규제개혁의 근거법률인 행정규제기본법의 시행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98년2월에 발효됐으니 20년하고도 반년이 더 지난 셈이다. 20년간 쌓인 ‘규제의 적폐 청산’도 해볼 때가 됐다. ‘우리가 지킬 수도 없는 규제’, ‘기대효과에 비해 사회적 비용이 막대한 규제’, ‘ 특정 집단에게 특혜를 제공하거나 국민의 경제적 자유와 기회를 제한하는 규제’, ‘규제 집행자에게 과다한 재량권을 부여해 비리의 소지를 발생시키는 규제’ 등을 소탕하는 일도 매우 시급한 일이다. 특히 지금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기업환경이 펼쳐지고 있는 만큼 그에 걸맞은 기업환경을 조성해주는 일도 규제개혁의 화급을 다투는 사안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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