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보수가 만나야 할 미래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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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지방선거에서 여당은 전례 없는 압승을 했다.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민주당은 17곳 중 14곳(82.4%),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도 12곳 중 11곳(91.7%)에서 승리했다. 기초단체장 226명 중 151명(66.8%), 광역의원 824명 중 648명(78.5%)을 차지했다. 기초의원 2,926명중 중 1,638명(56.0%)을 차지했다, 지난 2014년 지방선거와 비교해 민주당은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5석,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71석, 광역의회 선거에서 303석, 기초의회 선거에서 481석 증가했다.
그동안 ‘지방선거=여당의 무덤’이라는 등식이 있었는데 집권 여당이 이렇게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은 전무후무한 대기록이다. 반면, 야당은 궤멸적 참패를 당했다. 자유한국당은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대구와 경북 지역 2곳에서만 승리했고, 바른미래당은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단 한 석도 얻지 못했다. 한마디로, 6․13 지방선거는 ‘보수의 슬픈 장례식’과도 같았다.
그렇다면 보수는 왜 참패했을까? 심층적으로 분석해보면 크게 세 가지 요인으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시대정신에 졌다. 일반적으로 시대정신이란 “한 시대에 지배적인 지적·정치적·사회적 동향을 나타내는 정신적 경향이다”. 그런데 현실 정치에서는 우리 사회가 한 번도 실현하지 못했지만 반드시 이뤄내야할 미래가치다. 현재가 우리 사회가 처한 상황을 진단하고 미래 방향을 전망하는 가치의 집약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통일, 공정, 양성평등, 지방 분권 등이다. 민주당은 이런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정책과 메시지를 선점한 반면, 보수 야당은 효율, 성장, 경쟁, 안보 등과 같은 과거의 가치에만 몰입하면서 여권과의 담론 싸움에서 졌다. 이런 조사 결과가 주는 함의는 국민들은 야당을 심판하기 위해 투표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여당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투표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거 패배의 원인을 홍준표 대표 개인에게서만 찾으면 안 된다. 단순히 정당과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근본 기류가 바뀌고 있다. 국민들은 촛불 시민 혁명을 거치면서 과거 보수가 지향했던 가치 대신에 평화, 공존, 분권, 균형 등 진보가 추구하는 가치를 시대정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당은 이런 가치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유권자 지형도 크게 변했다. 과거 2040(진보)대 5060(보수)의 대립구도가 이제는 2050 대 6070으로 전환됐다. 지난 2012년 대선에서 50대의 투표율은 82.0%로 가장 높았고, 박근혜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른바 86세대(1960년-1969년생)가 50대를 차지하면서 한국당 지지층은 60대와 70대로 밀려났다. 요약하면, 야당 참패의 핵심 이유는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민은 야당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를 얻기 위해 투표장으로 간 것이다. 분명, 민심은 대결보다 평화를, 심판보다 기대를 선택했다.
둘째, 전략에서 졌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한국당은 합의 쟁점을 대립 쟁점화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스토크스(Stokes)는 정책 쟁점의 유형으로 합의 쟁점(valence issue)과 대립 쟁점(position issue)을 제시했다. 합의 쟁점은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어느 한편으로 평가되는 조건으로서 유권자의 거의 모두가 이 쟁점에 있어서 동일한 선호를 갖는다. 따라서 특정 정당 및 후보자의 능력이나 이미지와 밀접히 관련이 되는 논쟁의 대상이 된다. 지역주의 타파, 정체 개혁 등이 이애 해당된다. 대립 쟁점은 유권자의 선호가 찬성과 반대의 상반되는 입장으로 나누어져 분표하는 것이다. 복지 이슈가 전형적인 대립쟁점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현 시점에서 합의 쟁점이다.
그런데 홍준표 대표는 남북 정상회담을 ‘위장 평화 쇼‘로 폄훼했다. 지난 7일 홍 대표는 외신기자클럽 간담회에서 “북한이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폐기)를 거부한다면 회담을 중단·파기하는 게 차라리 옳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원하는 민심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갤럽 조사(5월 1주 조사) 결과가 이를 입증한다. 국민 88%가 남북정상회담이 잘됐다고 평가했다. 60대 이상 고연령층(86%), 보수층(77%), 대구․경북 거주자(76%) 등 핵심 보수 지지층에서 조차 긍정 평가가 70%이상이었다.
통상 합의 쟁점을 대립 쟁점화하면 득보다 실이 많은 법이다. 절대적으로 불리했던 야권은 후보단일화 등 연대에도 실패했다. 한국 보수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작년 대선을 거치면서 전통적 보수 가치를 지지하는 자유 한국당과 보수의 개혁과 보수 가치의 변화를 요구하는 바른미래당으로 분열되었다. 이런 분열은 결국 진보로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보수 정당은 선거 승리가 목적이 아니라 2위, 3위 싸움을 하는 데 집중하는 전략적 미숙함을 보였다.
셋째, 문재인 대통령에게 졌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는 이례적인 70%대 고공행진을 했다. 그런데, 한국당은 대안 없이 반대를 위한 반대에 매몰되었고 심지어 반공 보수로 회귀했다. 개혁 보수와 새 정치를 표방한 바른미래당은 공천 파동에서 보여주듯 바르지도 못했고, 미래도 없었다. 방송3사 심층 출구조사 결과, 이번 지방선거에서 유권자들은 후보 선택 이유로 가장 많은 40.4%가 ‘소속 정당’을 지적했다. 그 다음으로 인물 28.9%, 공약․정책은 26.1%였다. 문재인 대통령 후광효과로 정당 지지도에서 민주당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지속되고 있는데, 한국당이 ‘문재인-홍준표 대결구도’로 몰고 간 것은 큰 패착이었다.
더구나, 방송3사의 심층 출구조사에 따르면, 이번 지방선거의 성격으로 64.2%가 ‘정부․여당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응답했다. 반면 ’정부․여당 견제해야”는 25.8%에 불과했다. 집권 1년 후에 치러지는 선거는 통상 중간평가의 성격이 강한데,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민심이 정반대 방향으로 흘렀는데도 야당은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참회와 책임은 없고 극한 대여 투쟁만 했기 때문에 참패한 것이다. 지방선거 다음날 홍준표 대표는 "우리는 참패했고 나라는 통째로 넘어갔다"며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으므로 오늘부터 당대표직을 내려놓겠다"고 밝혔다.
유승민 바른미래당 공동대표도 "국민의 선택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고 밝혔다. 유 전 대표는 "대한민국이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 새로운 비전과 정책을 고민하겠다"며 "그 속에서 철저하게 무너진 보수 정치를 어떻게 살려 낼지 보수의 가치와 보수 정치 혁신의 길을 찾겠다"고 덧붙였다. 대선에 이어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3위(19.5%)를 차지한 안철수 전 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겠다”고 했다.
야당 지도부가 모두 동반 퇴진하면서 정치지형은 새롭게 재편될 수밖에 없다. 보수 재편은 크게 3가지 방향으로 흐를 전망이다.
첫째, 각자도생 방식이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과거처럼 선거 패배 이후 ‘지도부 사퇴→ 비대위 구성→ 전당대회를 통한 새 지도부 구성’과 같은 구태의연한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다. 당권경쟁을 통해 무너진 보수 정당을 재건하겠다는 복안이다.
둘째, 소(小)통합 방식이다. 유승민 전 대표를 비롯한 옛 바른정당 출신 의원들이 혁신과 통합을 명분으로 자유한국당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유 전대표와 안철수 후보의 선택이 관건이다. 바른미래당이 자유한국당과의 통합을 선택하면 박주선, 김동철, 등 호남 지역구 출신 의원들은 민주평화당으로 회군할 것이다.
셋째, 대통합 방식이다. 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을 해체한 후 보수 정치세력과 시민단체가 대거 참여하는 ‘빅 텐트 방식’의 대통합이다. 어떤 방식을 택하든 한국 보수는 죽지 않으면 살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문제는 소통합이든 대통합이든 이런 하드웨어식 보수 재편은 보수의 미래를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선거 패배후 한국당처럼 '저희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무릎 한번 꿇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보수의 가치를 재정립하는 보수의 철학화가 없으면 백약이 무효다. 이를 위해 과거의 ‘보수 우파’에서 ‘진보 우파’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1982년 토니 블레어가 이끈 영국 노동당은 대처 수상이 이끄는 영국 보수당의 장기 집권을 막기 위해 ‘신 노동당’(New Labour)을 기치로 ‘책임 좌파’의 길을 걸었다.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의 조언을 받아들여 중도를 강화하는 제3의 길을 택한 것이다.
보수 성향의 스웨덴 온건당(moderate party)은 2006년 총선에서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며, 역사적으로 성공한 사민당을 물리치고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사민당이 구축한 복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복지’를 내세웠고 “진짜 노동자를 위한 정당은 온건당”이라는 캐치 프레이즈로 민심을 파고 들었다.
진보와 보수의 사고방식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이다. 보수는 선이고 진보는 악이라는 배타적이고 이분법적 사고로는 갈등을 확대 재상산할 뿐이다. 향후 한국 보수는 진보가 지향하는 가치를 배격하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의 시각에서 포용하고 배려하는 전략적 전환을 해야 한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내세운 경제 민주화와 맞춤형 복지도 같은 맥락이다. 향후 보수가 지향할 가치로는 ‘책임 우파’, ‘포용적 성장’, ‘건강한 복지’, ‘똑똑한 평화’, ‘서민적 보수’를 내세워야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번 선거 결과는 진보로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었지만 유권자 이념 지형은 아직 변화되지 않았다. 지난 2017년 대선 당시 방송3사 출구조사 결과, 진보(27.7%)와 보수(27.1%)가 거의 기울어짐 없이 균형을 맞췄고 중도(38.4%)가 가장 많았다. 그런데 이번 지방선거후 방송3사 심층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진보 29.2%, 중도 39.8%, 보수 24.9%였다. 2017년 대선과 비교해 진보는 1.5% 포인트, 중도는 1.4% 포인트 상승한 반면, 보수는 2.2% 포인트 하락하는데 그쳤다.
이런 조사 결과는 이번 선거가 보수의 궤멸이 아니라 자유한국당의 궤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또한, 향후 보수에게는 실낱같은 희망이 될 수 있다. 향후 보수 정당들이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이탈했던 보수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 한국 보수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남을 탓하기 보다는 부패, 인권탄압, 정경유착 등 과거 잘못에 대해 끊임없이 참회하고 반성해야 한다. 이런 참회를 통해 도덕적 고지를 확보할 수 있고, 비로소 보수의 상징인 자유주의를 논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될 것이다.
국민들로부터 보수가 부패한 적폐 청산의 대상이고 능력마저 없다고 인식되었기 때문에 어둠 속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노동당이 `복지 정책`과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으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자 보수당은 궤멸 직전의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과잉 복지`로 인해 `영국병`에 빠지자 영국 국민은 보수당의 변화를 이끈 마거릿 대처를 선택했다. 1997년 토니 블레어에게 정권을 빼앗긴 보수당은 2005년 정권교체를 위해 38세의 데이비드 캐머런을 총재로 추대했다. 캐머런 취임 일성으로 ‘책임지는 기업(responsible business)’을 내세웠다.
보수라고 과거처럼 무조건 대기업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질 때만 보호해준다고 선언했다. 한국 보수도 이제 기업 규제 완화, 법인세 인하 등 '친 기업적인 정책‘만을 지지할 것이 아니라 투명과 책임과 같은 진보 가치를 결합해 변화된 모습을 보여야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
더불어 한국 보수는 40-50대 기수론을 기치로 세대교체를 해야 한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보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의 설립자인 에드윈 퓰너는 "정치적 사이 클상 부침(浮沈)은 있을 수 있다. 흐름은 언젠가는 다시 돌아온다. 중요하고 오래가는 건 이념과 아이디어다. 보수의 요체는 '기회'다. 젊은 유권자들에게 자유시장경제와 기업의 자유를 신봉하는 보수가 청년들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를 만들려 한다는 점을 어필하라“고 조언한다. 한국 보수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어째든 한국 보수가 희망찬 미래를 만나기 위해선 “용기있게 책임지고, 참회하며, 공부하는 보수”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2016년 총선(여소야대)과 2017년 대선(정권교체)에 이어 지방권력까지 진보 세력이 압승할 함으로써 이번 지방 선거는 어떤 형태로든 한국 정치 지형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 올 ‘정초(定礎)선거(foundation election)’가 되었다. 정초선거란 “새로운 정치 지형의 틀을 잡는 선거”다. 한국 보수는 이제 “국민은 왜 보수를 신뢰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할 때다. 보수는 선거이후 전개될 허황된 통합에 앞서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미래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이를 기반으로 진보와의 차별화를 통해 국민들이 체감할 수 공감 정치를 펼쳐야 한다. 단언컨대, 책임을 지지 않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는 보수 가치로는 결코 미래가 없다. 유승민 전 대표와 안철수 전 후보도 “과거 김영삼 전 대통령이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며 3당 합당에 참여했고 결국 대권을 차지했던 것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은 범 보수 대통합에 동참해서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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