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의 한국 잠룡 전 상서(前 上書) <10> 지도자의 권위를 지켜라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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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블 붕괴 후 ‘잃어버린 25년’ 중에 딱 한번 일본경제가 빛을 발한 때가 있었다. 거센 당내 저항을 극복하고 5년 5개월의 총체적 구조개혁으로 일본을 다시 일어서게 한 고이즈미 내각(2001~2006년) 때가 바로 그 때였다. 저성장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개혁 리더십의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의 장래를 자기에게 맡겨달라는 잠룡들에게, 고이즈미가 편지로 전하는 충언을 한번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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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10> 지도자의 권위를 지켜라
총리나 대통령이 수호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국민이 그들에게 맡긴 총리직(prime ministership)이나 대통령직(presidency)이다. 국민들로부터 위임 받은 것인 이상 누구도 그 권위에 대해 도전할 수 없고, 그런 도전을 허용해서도 안 된다. 내가 너무나도 당연한 이 점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이유는, 최고 지도자로 지내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최고위직의 권위를 지켜내겠다는 의식이 약해지고, 그것을 자주 정치적 타협의 대상으로 삼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한 나라의 수장으로서 총리직에 대한 권위를 지키고자 애썼다. 각료 시절에 총리와 내가 어떤 정책에 관해 의견을 달리 하는 경우 국무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일단 총리의 결단으로 일단 그 정책이 정해지면 그의 결정을 존중했다. 그가 일본의 총리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내가 총리가 된 후에는 각료들이 각료 때의 나처럼 총리의 권위를 존중해 줄 것을 기대했다. 나는 나대로 각료 사이에 심각한 이견이 있는 경우, 최종적으로 결정이 되기 전까지는 여타 각료들을 국무위원으로서 또 내각에 참여하는 ‘동료’로서 인식하여 그들의 의견을 존중했다. 그러나 내가 최종 결정을 내리고 나면 그에 대한 어떠한 반발이나 비판을 허용하지 않았다.
‘총리의 진정은 반대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하시모토 내각에서 후생대신 직을 맡고 있을 때였다. 당시 하시모토 내각이 추진하던 행정개혁에 나의 지론인 우정민영화가 어떤 식으로 포함될까를 두고, 나도 언론도 초미의 관심을 둘 때였다. 내가 하시모토 총리에게, 만일 우정민영화가 행정개혁에 포함되지 않으면 후생대신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혀 놓았다는 사실을 언론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생대신이 총리가 자리를 걸고 추진하는 정책에 사퇴를 하면서까지 공개적으로 반발하면, 그것은 ‘내각불일치’로서 자칫 국회(주로 야당)에 의해 내각불신임을 당해 총사퇴를 강요당할 수도 있는 사안이다.
1997년 말 하시모토가 의장인 행정개혁회의가 내놓은 안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나의 우정민영화의 지론, 즉 우정3 사업(우편, 은행, 보험)의 분리·민영화, 그리고 우편사업에의 민간참여 등을 전면 부정하고 있었다. 고심 끝에 나는 총리의 결정을 따르고 후생대신으로 남기로 했다. 총리의 입장으로 내 입장을 바꾸기로 했다거나, 후생대신 자리에 연연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이 총리의 결정이었고, 또 총리의 권위는 내각동료 대신(大臣)이 존중하고 지켜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총리의 진정은 반대할 수 없는 것이다.’ 총리의 권위 수호를 위해 나의 지론을 접게 된 그 경험은, 내가 ‘우정민영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총리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격에 맞지 않는 두 명의 총리를 몰아냈다
최고 지도자의 권위는 그의 언행과 그 직무 수행으로 지켜지는 것이다. 최고 지위와 그 권위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오기 위해서는 평소 총리의 언행과 리더십이 명분이 있고 또 총리직의 격에 부응하는 수준이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나는 기본적으로 다른 총리의 권위를 인정하고 가급적 그 수호에 동참하는 사람이지만, 총리의 언행이나 직무수행이 명분이나 그 격에 맞지 않는 경우에는 그 점을 지적하고, 심하게는, 그 직위의 권위를 수호하기 위해 그를 물러나게 했다.
1991년 9월 가이후(海部俊樹) 총리가 당 안팎이나 국민 사이에 심각한 이견이 있는 정치개혁 법안을 무리하게 추진하려 했을 때, 국민들로부터의 위임이 없다는 명분으로 그의 무리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아 그를 물러나게 했다. 또 1993년 7월 총선에서 자민당이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을 때 미야자와(宮沢喜一) 총리가 이에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지 않자, 나는 다음날 TV 토론에 나가 “즉각 깨끗하게 퇴진 표명을 해야 한다. 지금의 정치가는 거취에 대해 너무 소홀하다”며 직격탄을 날려 그가 다음날 퇴임을 밝히게 했다. 비록 그것으로 나는 당내에 ‘총리 두 명을 주저앉힌 인물’로 낙인이 찍혔지만, 총리직과 그 권위는 그만큼 엄중한 것이라는 점에서 두 명의 총리를 몰아낸 것에 관해 후회는 없다.
총리 권위에 대한 도전은 허용하지 않았다.
내가 총리가 된 후, 다행스럽게 내각이나 자문회의가 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거나 그 권위에 반기를 든 일은 없었다. 자민당 내의 개혁 저항세력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밀실타협으로 옹립되지 않은 ‘국민이 들어 올린 총리’ 나의 권위를 처음부터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자민당의 기득권 세력은, 일반당원과 국민에 의해 선출된 나를, 구태 자민당의 존립에 위험한 인물로 간주했다. ‘바뀌지 않으면 자민당을 부수겠다’며 당 총재 후보로 나서서 당 총재와 일본 총리가 되었으니 그들의 반감과 경계심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도로공단 등 공기업개혁, 우정민영화 등 주요 개혁과제를 추진하려 할 때마다 총리와 내각의 권위에 대해 도전을 거듭했다. 개혁과제를 발의하고 논의를 거쳐 법안을 제출하는 단계 단계마다, ‘사전승인’(事前承認, 자민당 내각이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에 자민당에 승인을 받는 것)과 ‘당정일체’(黨政一體, 자민당과 자민당 내각이 정책 입장을 같이 해야 하는 것) 관행을 내세워 총리와 내각의 개혁 추진을 저지하려고 했다. 총리에게 주어진 법적 권한으로 보면, 그들은 총리의 발의권(發議權)을 무시하고 있었다.
총리와 내각이 결정하고 추진하려는 것에 반대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총리와 내각이 발의하고 결정한 것의 권위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총리를 하는 한, 총리의 권위에 대한 그런 도전은 일절 수용하지 않았다.
나는 총리의 권위를 무시하는 그들의 관행을 무시하기로 했다. 나는 중요한 개혁과제를 추진할 때 자민당 저항세력이 내세우는 절차적 관행, 즉 사전승인과 당정일체 관행을 무시하고 당당하게 사전승인 없이 당정 간에 이견이 있는 상태로 법안 제출을 하곤 했다.
2002년 봄 우정공사법을 제정하려고 할 때였다. 정부의 우정 사업을 2003년에 공사화 하는 것은 90년대 후반 하시모토 행정개혁에 정해 놓은 바였다. 당시 현안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우정공사화(‘우정공사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편사업에 대한 민간기업의 참여 허용(‘신서편법(信書便法)’)이었다. 자민당 우정족은 우정사업에 대한 민간 참여에 관해 강하게 반발했다. 우편사업에 민간 참여는 곧 우정사업 전체의 민영화로 이어질 것이 불 보듯 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이 내가 신서편법을 고집한 이유이기도 했다.
두 법안이 우여곡절 끝에 자민당 총무부회까지는 갔는데, 4월 19일에 그 총무부회가 2개 법안의 국회 제출 승인을 거부했다. 개혁저항 세력은 법안제출의 사전승인을 거부함으로써 우정공사화부터 저지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이에 나는 “(자민당 우정족이) 끝까지 반대해도 국회제출을 할 것이다. 그것이 통과되지 않으면 자민당이 어떻게 될지 생각하기 바란다.”며 여차하면 국회 해산권의 칼을 휘두를 수도 있음을 분명히 했다.
결국, 4월 23일에 총무부회가 다시 열려, 법안의 국회제출을 승인했다. 우정공사법과 신서편법은 그 해 7월 24일에 국회를 통과했다. 이는 여당이 반대해도 총리가 사전승인 관행을 무시하고 법안을 국회에 제출할 수 있다는 전례를 만들어, 나의 관저(총리)주도 개혁 체제 확립에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2002년 우정공사법 통과 과정은 2005년 (국회해산 후) 우정민영화 법 통과의 ‘예행연습’이었다.
내 내각이 특수법인 개혁안을 확정 짓기 바로 전날인 2001년 12월 17일이었다. 내 집무실을 찾아온 하시모토 전 총리와 나 사이에 격론이 있었다. 일본 정책투자은행 등 8개의 국책금융기관을 하나로 줄이려는 나의 구상에 그가 극력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나에게 “국책금융기관은 내 소관이다. 손가락 하나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런데도 내가 고집을 꺾지 않자 하시모토는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는 막말을 쏟아냈다. 이에 나는 책상을 치며 “료짱(하시모토의 이름의 애칭 또는 낮춤말), 자네와 나, 어느 쪽이 총리대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고 소리쳤다.
내가 화가 난 것은 그가 국책금융기관 개혁에 반대한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총리까지 한 그가, 내가 총리 권위를 그토록 존중해 준 그가, 나의 총리 권위에 대해 최소한의 인정조차 해주지 않는 것에 분노한 것이다. 나에게 총리의 권위는 그런 것이었다. 그것으로 그와의 인연은 끝이었다.
내 집권기간 중 중대사안에 대한 총리의 최종 결정에 국무위원이 반대를 접지 않은 경우가 딱 한 번 있었다. 2005년 8월에 중의원을 어렵사리 통과한 우정민영화 법안이 참의원에서 부결되었을 때였다. 그 직후 소집한 각의에서 나는 국회해산을 만장일치로 결의하고자 했다. 그런데 시마무라(島村 宜伸) 농수산대신이 마지막까지 국회해산에 동의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그것이 내각불일치를 조장하여 국회에서 내각불신임안을 제출하여 내각 총사퇴를 유도해 내겠다는 저의임을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총리인 나는 그 자리에서 그를 파면하고, 내가 농수산대신을 겸임함과 동시에 만장일치로 국회해산을 각의결정 했다. 우정민영화 반대세력을 (공천해 주지 않아) 당에서 몰아낸 그 총선에서, 개혁세력으로 구성된 새 자민당이 압승 하여 10년 염원의 우정민영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계속>
<순서> 왜 지금 개혁의 리더십인가? 제 1부 제대로 된 잠룡라면 제 2부 대권을 잡고 나면 개혁의 무대는 이렇게 꾸며라 제 3부 모두를 개혁에 동참시켜라 제 4부 논란이 많은 개혁과제를 택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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