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의 한국 잠룡 전 상서(前上書)<9.上>주어진 권력은 과감히 한껏 행사하라, 오직 개혁만을 위해…정치 개혁과 자민당 총재 권한 집중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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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블 붕괴 후 ‘잃어버린 25년’ 중에 딱 한번 일본경제가 빛을 발한 때가 있었다. 거센 당내 저항을 극복하고 5년 5개월의 총체적 구조개혁으로 일본을 다시 일어서게 한 고이즈미 내각(2001~2006년) 때가 바로 그 때였다. 저성장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개혁 리더십의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의 장래를 자기에게 맡겨달라는 잠룡들에게, 고이즈미가 편지로 전하는 충언을 한번 들어보자. |
<편지 9-上> 주어진 권력은 과감히 한껏 행사하라, 오직 개혁만을 위해…정치 개혁과 자민당 총재 권한 집중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소명을 다하는 데에, 최고 지도자에게 주어진 모든 권한을 백분 활용하라.
모든 권한은 국민이 선택한 최고지도자만이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국민이 선택하지 않은 다른 이와 나누거나 그에게 넘겨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민주화를 위해’ ‘대통합을 위해’ 분권이나 권한이양을 이야기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도자 자신이 헌신하여 추구하는 바가 없거나 나라와 국민을 이끌 바가 없을 때, 또는 국민으로부터 선택받지 못한 자가 권력의 단맛을 보려할 때 하는 소리일 뿐이다. 그들은, 권력이 안겨다 주는 이득에만 눈이 어두운 체, 왜 최고지도자에게 그런 권한이 주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자들이다. 최고지도자에게 국민이 부여한 권한은 그 만이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1955년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출발한) ‘55년 (자민당 장기집권) 체제’ 를 지탱해 온 두 기둥, 즉 파벌주도 정치체제와 관료주도 행정체제를 무너트리고 정치와 행정에 관저(총리)주도 체제를 확립했다. 그 관저주도 체제를 통해, 나는 2차 대전 후 가장 강력한 총리로서 나에게 주어진 모든 권력을 행사했다. 그 관저주도 체제가 있었기에, 당 안팎의 극심한 반대 속에서도 나의 구조개혁이 성공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당내 인사권과 후보 공천권 그리고 자금배분권을 안겨주어 당 총재 권한을 강화해 준 것은 94년 호소카와(細川護熙) 정치개혁이었고, 내각 인사권, 법안 발의권 그리고 내각부를 마련해 주어 총리에게 권한을 집중 강화시켜 준 것은 96년 하시모토(橋本龍太郞) 행정개혁이었다. 나는 ‘고이즈미 개혁’을 위해, 법과 제도가 당 총재와 일본총리에게 부여하는 모든 권한을 최대한 활용했다. 90년대의 정치 및 행정 개혁은 나의 5년5개월 관저주도 개혁체제의 제도적 기반이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 당 총재와 일본 총리의 권한을 강화하는 그들 개혁이 추진되었나를 보이고자 한다.
주목할 바는 파벌주도 정치체제와 관료주도 행정체제를 타파한 개혁들이 ‘자기 개혁’ 차원에서 정계나 관계 스스로 발안하거나 추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무능과 부패에 실망하거나 분노한 국민에게 등 떠밀려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개혁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개혁의 대상이 자발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디에서나 무리다.
1. 정치 개혁과 자민당 총재 권한 집중
‘깨끗한 정치’를 위해 도입된 소선거구제 도입과 정치자금법 개정은 자민당 총재의 권한을 강화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 총리의 관저주도 체제를 강화하는 토대가 되었다.
자민당이 장기집권은 50년대 초부터 장기집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민당이 모든 선진국들이 부러워하는 일본의 장기적 고속·안정 성장을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국민의 입장에서는 집권 정당을 바꿀 아무런 필요를 느낄 수 없었고, 자민당으로서도 장기 집권을 보장해 주는 그 정치체제를 바꿀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1988년 6월에 터진 리쿠르트 사건은 ‘55년 체제’의 민낯을 드러내고 말았다. (리쿠르트 사건은 리쿠르트 사가 상장이 되면 주가 폭등이 확실한 비상장 주식을 권력자들에게 넘겨주고, 리쿠르트 자회사가 이들에게 주식매입 자금까지 꿔 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는, 현직 총리를 비롯해 전 총리,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 등 당시 일본 정치와 경제를 주무르는 거의 모든 거물급 인사가 망라되어 있었다. 주식 상장을 관장하는 대장상까지 주식을 받았으니 더 이상 따져볼 것도 없었다.
총리가 사임하는 등 정치권의 ‘자정(自淨)’ 노력이 있었으나 국민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고, 자민당의 내리막길도 멈추지 않았다. 자민당은 1993년 총선에서 38년 연속 집권을 마감하고 말았다. 자민당뿐 아니라 정치권 전체가 깨끗한 정치, 돈이 들지 않는 정치 개혁의 방향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1994년 1월 29일은 ‘진정한 정치개혁’이 시작된 날로 불린다. 非 자민당 연립정권의 호소카와 총리와 야당 자민당 고노(河野洋平) 자민당 총재가 정치개혁안에 합의한 날이었다. 그 합의에 따라 3월 4일 국회를 통과한 정치개혁법은, 선거제도를 중선거구제로부터 소선거구ㆍ비례대표 병립제로 바꾸고 정치자금법도 강화하는 것으로, ‘철의 삼각형’에 의한 이익유도정치(利益誘導政治)와 파벌 간의 합종연횡(合從連衡)으로 연명해 온 자민당의 정치기반을 근저에서부터 흔들 수 있는 것이었다.
<중선거구의 병폐: 파벌주도 정치와 이름뿐인 당 총재>
합당으로 만들어진 정당이다 보니, 자민당은 하나의 정치 이념으로 뭉쳐 일관된 정치성향을 가진 정당이라기 보다는, 민주계 파벌과 자유계 파벌이 권력을 분점하는 ‘파벌 연합체’일 수 밖에 없었다. (통치나 정책이념의 바탕 위에 뭉친 게 아니라 집권을 위한 정치역학에 의해 만들어진 집단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정당과 유사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의사결정을 (구성원의 다수결이 아닌) 파벌 간의 ‘합의’로 하는 것이 기본적인 관행이었다. 물론 당칙에는 다수결로 의사결정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관행으로는 ‘전회일치’(全會一致=만장일치)가 불문율이었다.
이런 분권구조 아래서는 총리조차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리더십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았다. 총리를 뽑는 관행부터 그랬다. 중의원 제 1당의 총재가 일본 총리로 선출되었는데, 그 때까지의 ‘만년 제 1당’ 자민당은 늘 주요 파벌들 간의 타협으로 총재를 선출했다. 당 총재와 일본 수상을 파벌이 정하다보니, 일본 총리는 태생적으로 매사에 파벌(영수)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내각 인사도 당 간부 인사도 파벌의 몫이었다. 새 총리가 일단 주요 파벌들로부터 추천을 받아 파벌들의 영향력과 파벌들에 속한 주요 의원들의 전문분야를 감안해 각료를 임명했다. 총리가 아니라 파벌 영수가 파벌 소속 의원들에게 각료자리를 ‘내리는’ 셈인 것이다.
총리가 당정 인사에 관해서 파벌의 의향을 따를 수밖에 없을 정도이니, 정책에 관해서도 파벌들의 뜻을 따라야 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제도로는 자민당의 정책결정과 내각의 정책결정은 각각 독립적으로 정해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당정일체(黨政一體=여당과 행정부가 뜻을 같이 해야 하는 것)를 위한 사전승인(事前承認=내각이 추진하고자 하는 사안을 미리 여당으로부터 승인 받는 것)이라는 관행에 의해, 내각의 결정은 당(파벌)의 결정에 묶여 있었다.
개별 의원도 총리가 아닌 파벌(영수)의 수중에 있었다. 개별 의원과 당 총재(총리)는 같은 당원일 뿐 그 이상의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당 총재가 정치자금을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각이나 당이 자리를 주는 것도 아니었다. 정치자금은 의원 개인이나 파벌영수가 조달하고 있었다. 족의원이나 주요 당직을 맡아 영향력이 있는 개별 의원은 개인적으로 모금을 할 수 있었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참 의원들은 돈과 선거 지원유세 등을 파벌과 그 영수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국회의원으로 뽑히고 출세를 해 나름대로 권세가로 크는데 필요한 ‘돈’과 ‘표’와 ‘자리’ 그 모든 것이 파벌(영수)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파벌주도 정치체제 속에서 총리는 각료에 대한 임명권도, 정책결정권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없고, 당 총재로서도 정치적 자원 배분권도, 후보공천권도 손안에 없었다. 총리는 명색만 여당과 내각의 우두머리일 뿐, 파벌의 협조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당정 지도자로서 리더십을 발휘할 아무런 제도적·관행적 기반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파벌의 협조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저 ‘좋은 것이 좋은’, ‘이도 좋고 저도 좋다’는, 좋게 말해 인화중시 내지 통합우선 형의 무골호인(無骨好人) 형이 과거 일본 총리들의 정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선거구로 정당 경쟁으로, 깨끗한 선거로>※주1
(※주1 : 內山 融(2007), 『小泉政權 – ‘バトスの首相’は何を變えたのか』, 中公新書. 184~187쪽. 여기서 말하는 중선거구제의 병폐는 당시 일본 정치사회가 인식하고 있던 병폐이지, 모든 중선거구제가 그런 모든 병폐를 다 안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파벌주도 정치체제, 이익유도정치, 총리의 상대적 취약화 등 중선거구제의 병폐로 지적되는 현상들이, 일본이 소선거구제로 전환한 후에도 자주 관찰되는 병폐들이다. 제도가 가진 장단점이라는 것이 제도간의 상대적인 차이지 절대적이거나 구조적인 차이가 아니라는 얘기다. 결국, 제도적 여건과 그 제도를 운영하는 인물들이 잘 어우러져야 그 제도로부터 기대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어떤 제도이든 변함 없는 교훈이라 하겠다.)
소선거구(小選擧區)로의 선거구제를 전환해야 한다는 가장 큰 명분은 정치부패의 근절이다. 중선거구제에서는 (소선거구제보다는 상대적으로) 유권자가 정당이 아니라 후보자 개인이 어떤 인물이냐를 두고 투표를 하게 된다. 정당보다는 후보자 개인이 돋보여야 하는 그런 ‘개인 본위의 선거’에서는, 선거구 관리에 돈이 들고 또 정부예산사업 등으로 지역기업이나 지역민에게 금전적 혜택을 주는 이익유도정치가 될 수밖에 없다. 중선거구제에서는 부패와 정경유착이 기본적인 작동원리였던 것이었다.
소선거구제로 바뀌면 그 작동원리에 변화가 올 수 밖에 없다. 선거부터, 개인이 아니라 정당 간의 경쟁으로 바뀌게 된다. 선거가 정당간의 경쟁이 되면, 유권자는 ‘개인이 어떤 인물이냐’보다는 ‘정당이 어떤 정책을 추진하려는가’, ‘당 총재가 어떤 인물인가’ 등을 고려하여 투표하게 된다. 대중언론의 역할이 매우 큰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후보자 개인의 인기보다 당 총재의 인기가, 개인이 동원할 수 있는 지역사업보다 정당 정책이 중요한 만큼, 후보자 개인에 의한 정치부패나 이익유도정치가 개입될 여지가 줄어들게 되어 깨끗한 정치가 정착될 수 있는 소지가 더 큰 것이다.
소선구로 당 총재가 공천권 장악 :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소선거구제는 당 총재(=총리)로 권력을 집중시키게 된다. 선거에 임하는 정당 후보 공천권과 정치자금 배분권 때문에 그렇다. 한 선거구로부터 3명에서 5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는 중선거구제 아래서는, 당 공천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많은 선거구에서, 복수의 자민당 공천후보가 출마해, 자민당 후보끼리 경합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들로서는 자민당으로부터 공천을 받았느냐 보다 어떤 파벌(영수)의 (돈과 표) 지원을 받느냐가 더 중요했다.
또 당선에 최소한 필요한 득표율이 낮아서, 지역에 적당한 인기만 있어도 당 공천 없이 무소속으로 나와도 당선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에서 공천을 못 받아 무소속으로 선거에 나가도, 당선만 되면 자민당에 복당 시켜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리 치나 저리 치나, 당의 공천이 경시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당 총재가 공천권을 무기로 국회의원 개개인을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소선거구제에서는 총재가 ‘갑’이 되고 파벌은 ‘을’로 전락하게 된다. 당과 소속 국회의원에 대한 총재(즉, 총리)의 영향력이 지대해 지는 것이다. 우선, 당의 공천후보가 한 사람이니, 파벌은 총재에 대해 자파(自派) 후보를 공천해달라고 부탁하는 입장이 된다. 또 파벌 영수가 파벌 안에서 갖는 힘도 약화되게 된다. 사실상의 공천권을 가진 것도 아니고, 총재에게 밉보이다가는 공천을 못 받게 되니, 자연 총재와 입장을 달리하는 파벌 영수보다는 총재의 의향이 더 중요해 진다.
정치자금법 강화로 당(총재)이 정치자금 배분: 1994년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정치자금법이 강화되어, 국회의원 입장에서는 기업이나 단체로부터 거액의 헌금을 받기가 힘들어졌다. 대신, 정당은 정치자금 모금도 쉬워지고, 매년 국가예산으로부터 국민 일인당 250엔에 상당하는 자금을 정당교부금으로 받게 되었다. ※주2
(※주2 : 정치자금법 개정 전에는 파벌당 정치자금을 1년에 20억 엔 이상 모았다. 그러나 정치자금법 개정 후, 예를 들어, 2002년 최대 파벌인 하시모토 파가 받은 금액이 4억 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 자민당은 총 정당교부금 313억 엔 중에 145억 엔을 배당 받고 여기에 그 외의 수입을 합해 총액 244억 엔의 자금을 모았다.)
자민당의 경우, 정치자금의 배분을 주로 맡는 것이 총재 이하의 집행부다. 통상 정치자금의 배분을 맡는 것이 간사장이지만, 간사장을 임명하는 것은 총재다. 자민당 의원들이 정치자금 때문만이라도 당 집행부와 총재와 각을 세워본들 아무 득이 될 게 없는 것이다. ‘돈이 끊어지면 인연도 끊어지는 건’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다. 동원할 수 있는 정치자금과 더불어 파벌의 힘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ifs POST>
<순서> 왜 지금 개혁의 리더십인가?
제 1부 제대로 된 잠룡라면
제 2부 대권을 잡고 나면 개혁의 무대는 이렇게 꾸며라
제 3부 모두를 개혁에 동참시켜라
제 4부 논란이 많은 개혁과제를 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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