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존재이유: 사회적 합의를 통한 백성 잘살게 하기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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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치에 대한 불신이 고조되고 있다. 대통령은 소통이 불통이란 비판이 나돌고, 국회의원들은 자기들만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비난이 언론에 회자되고 있다. 왜 이리 된 것일가? 간단히 말해서 정치가 제 구실을 못하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불만을 쏟아내는 것이리라. 그러면 도대체 정치는 왜 존재하고 또 왜 필요한 것일가? 다시 말해 우리는 왜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고 또 그들을 예우하고 존경하며, 그들로 하여금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국가를 다스려가게 하는가? 여기에 경제학이 정치의 존재이유를 묻게 되는 소이가 있다.
나라를 이루는 근본 단위는 국민 개개인이다. 우리의 헌법도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온다고 명시한다. 그런데 국민 개개인은 누구나 이기심이 있다.(물론 이타심이 더 큰 사람도 있다. 이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이익이 되니 여기서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이기심을 지닌 개인들은 각자 자기가 잘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데 사람들은 결코 혼자서 잘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애초부터 사회적 동물이니 정치적 동물이니 하는 표현이 적용되어 온 것이다. 요즘 언어로 인간의 DNA에는 다른 사람과 같이 살아가는 성향이 내포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태생적으로 정치적 행위를 해 왔을거라는 명제가 성립된다. 즉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개인의 이득을 추구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같이 협동해야 산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단 말이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 이기심과 협동심이 달리 나타 날 것이다.
정치란 결국 자신이 잘 살기 위해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협동을 유발해 내서 사회 전체가 잘 살게 하는 작용이라 볼 것이다. 사회전체가 잘 살면 자기도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협동의 결과는 공공재이다. 자기가 그 공공재에 기여하지 않고서도 이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기에 공공재에는 무임승차자가 있다. 무임승차의 욕구가 강한 사람일수록 공공재의 공급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를 흐리게 할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에게 항상 정치는 존재해 왔다. 국가가 형성되어 있는 한 임금이 있었고 제대로 국가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던 부족집단에서도 두목이나 제사장이 존재하여 무리들을 다스렸다. 물론 그들이 백성들을 항상 잘 살게 해주지만은 않았다. 성군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역사 속에서는 폭군이나 혹은 백성을 착취하는 임금들이 더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왜 그런 임금 혹은 지배자들을 용납해 왔는가? 다른 대안이 없거나 다른 대안보다 비록 폭정에 시달리지만 그런 임금이라도 갖는 것이 그들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었다. 임금 없이 혹은 국가 없이 살 경우 외적의 침입이 우리의 생활을 위협할 것이고 또 현재의 임금을 갈아치운다 한들 새 임금이 보나 나으리란 보장이 없었을 것이다.(최근 사회주의자들을 위시하여 국가 없는 사회라는 이상향을 거론 하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이상에 불과하고 현실화되기 어렵다는 비판이 우세하다). 또 그 폭군을 갈아치우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희생 혹은 비용이 너무 많아 폭정을 용납하는 선택을 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결국 국가와 정치가 존재하게 된 것은 국민들의 삶을 보다 잘살게 하기 위함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바대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주권이 국민들에게 있어 만일 국가와 정치가 국민들을 잘 살 수 있게 하는 데 실패한다면 국민들은 국가(정권) 혹은 정치(제도)를 바꾸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구성원 즉 국민들의 사회적 합의를 통해 가능하다. 민주주의란 사회적 합의에 의해 국가 또는 정치를 구성하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민 다수가 인정하는 헌법은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합의의 결과물라 할 수 있다. 사회적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헌법은 곧 국민이 택한 정치경제적 제도(제도 자체가 공공재이다)가 될 것이다.
최근 경제학자들은 정치경제적제도가 각국의 경제성장의 정도를 결정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MIT의 아세모글루 교수는 착취적 정치경제적제도를 지닌 국가는 결국 망하고 포용적 정치경제적제도를 지닌 국가만이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여기서 착취적 정치경제제도라 함은 그 정치경제적 제도에 의해 생산된 결과가 백성의 일부에게만 귀속되어지는 제도를 의미하고 포용적 제도는 상대적으로 넓은 범위의 백성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제도를 의미한다. 예컨대 일제시대에 한반도의 생산물은 일본 혹은 친일분자들에게만 귀속되었을 것이다. 해방 후 시장체제가 도입되고 더욱이 경제계획이 수립되면서 스스로 노력한 사람이 소득을 얻게 되어 한국의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포용적 정치경제적 제도도 지속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박정희정권이 상대적으로 포용적 경제정책을 구사하여 경제성장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나 민주화가 진척된 지금 보다 선진화된 포용적 정치경제제도를 구축해야 경제성장이 지속가능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번 대선에서 여야 모두 경제민주화를 공통의 공약으로 제시한 것은 한국의 정치가 바른 방향을 잡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최근 경제민주화를 위한 노력은 그 힘을 잃고 있다. 일각에서는 단기적인 경제적 침체를 극복하는 일이 급선무이니 경제민주화정책은 잠간 접어 두자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경기침체는 단기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경제민주화가 지연됨에 따라 나타나는 장기적 현상일 수 있다. 예컨대 한국의 소득분배는 최근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반 국민들의 소비가 위축되고 이는 다시 금융시장에서의 부채누증으로 경제구조 전반에 걸친 위기가 야기될 수 있다.
그렇다면 민주적 절차에 의해 형성된 지금의 정권이 이러한 사회적 요구를 왜 등한시하게 되었는가? 이는 국민의 요구를 정치적 과정에서 적절히 반영해야 하는 정치적 제도상에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금의 한국의 정치적 제도는 국민들의 선호를 제대로 반영하여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말이다. 국민들의 의사를 널리 반영하여 보다 넓고 깊은 의미의 포용적 정치경제제도를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이루어 가야 오늘의 한국 경제가 되살아 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사회적 합의 과정이 어떻게 변화하여야 할 것인가. 이는 다음 번 글의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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