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의 한국 잠룡 전 상서(前 上書) <13,下> 제 2부 대권을 잡고 나면 : 머리를 손에 쥐어라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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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블 붕괴 후 ‘잃어버린 25년’ 중에 딱 한번 일본경제가 빛을 발한 때가 있었다. 거센 당내 저항을 극복하고 5년 5개월의 총체적 구조개혁으로 일본을 다시 일어서게 한 고이즈미 내각(2001~2006년) 때가 바로 그 때였다. 저성장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개혁 리더십의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의 장래를 자기에게 맡겨달라는 잠룡들에게, 고이즈미가 편지로 전하는 충언을 한번 들어보자. |
<편지 13 下> 머리를 손에 쥐어라-골태방침은 ‘개혁의 바이블’
관저주도 정책추진의 신호탄
개혁저항세력에게, 골태방침의 개혁과제도 문제였지만, 내 내각이 개혁을 추진하는 방식은 더 문제였다. 골태방침 2001이 제시하고 있는 ‘정책 프로세스의 개혁’은, 관련부처나 족의원들이 관련부문의 이익을 위해 서로 담합하여 bottom up(좋게 말해, 하의상달(下意上達)) 방식으로 정책을 수립하던 것을, 자문회의를 통해 수상관저가 top down(상의하달 上意下達) 방식으로 정책을 결정∙수립하겠다는 것이었다. 공식적으로 관료나 여당 의원들에게서 정책결정권마저 빼앗겠다는 얘기나 다름 없었다.
골태방침의 모든 것 때문에 밥줄이 끊기고 힘을 잃게 된 부처 관료나 관련 족의원으로서는, 그에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그 저지를 위해 결의를 다져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 점이, 나와 자문회의가, 관료나 국회의원들로부터 개혁과제의 추진이나 참여를 기대도 하지 않고 처음부터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기로 작정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 내용이 알려지고 관료나 국회의원의 의견이 무시당하는 일이 계속되자, 골태방침에 대한 반대 움직임은 점차 자민당 상층부로 옮겨가서, 그 동안 내심 나의 급진적 개혁 추진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자민당 거물들이 드러내고 그 불만과 비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두 달 전(2001년 4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나에게 진 하시모토 前 총리는 골태방침이 너무 구체적인 정책까지 정한다면서 ‘골태(骨太)가 아닌 것까지 포함되어 곤란하다’고 딴죽을 걸었고, 6월 22일에 열린 총무회에서는 (지방자치체에 대한 국고보조금이나 우정사업을 관장하는) 총무상까지 지냈던 인사가 ‘수상이 말하면 (무엇이든 그대로) 정해야 하는 것인가’고 흰 이빨을 드러냈다.
그런 공개적 반발에도 나는 마이동풍(馬耳東風)으로 일관했다. 오히려 그들의 거친 반대로 골태방침, 개혁과제 그리고 자문회의의 역할 등이 중대 이슈가 되어가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개혁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여당 내분을 즐겨 보도하고 있던 언론은, 자민당과 관료 등 천군만마(千軍萬馬)의 개혁저항 세력에 대해 일필단기(一匹單騎)로 맞서는 나를 개혁의 기사로 묘사하는 데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들의 반대가 내가 ‘국민의 편에 서서, 국민의 지지로’ 개혁을 추진하는 데에 추동력이 되어주고 있었다.
나의 무반응에 여당의 입장이 곤란해지고 있었다. 자기네 손으로 뽑은 지 두달도 되지 않은 새 내각이 내놓은 첫 정책지침서를 마냥 가로막고 서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자민당이 두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골태방침의 내용에 아무런 수정을 가하지도 못하고, 사전승인이 아니라 사후승인(事後承認)으로 자민당 총무회의가 골태방침을 승인했다. 그것으로 ‘여당이 승인을 해야 정책을 수립할 수 있다’는 여당의 체면을 건지는 것으로 그들은 만족해야 했다.
아무리 여당이라 하더라도 개혁에 저항하는 사람은 개혁저항 세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누구한테서든, 더구나 개혁저항 세력한테서 사전승인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개혁을 추진할 작정이었고, 이 점은 자민당 총재 선거에 나서면서 ‘바뀌지 않으면 자민당을 부순다’고 말할 때 이미 당원과 국민에게 약속한 것이기도 하다. 개혁저항 세력은 나와의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싸움에 지고 있었다.
내가 당과 관계부처의 뜻에 굴하지 않고 골태방침을 관철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내가 골태방침이 제시하고 있는 개혁과제 추진에 대해 불굴의 의지가 있었고 또 80년대 이후의 정치개혁과 90년대의 행정개혁에 의해 수상의 권력이 강해져 있었던 것이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들만큼 첫 골태방침의 채택에 중요했던 배경은 당시 내 내각이 압도적인 국민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4월 말 내각이 발족할 당시 78%였던 내각 지지율은 골태방침이 나온 6월에는 81%를 기록하고 있었다. 7월 참의원 선거를 코 앞에 둔 자민당이 나의 개혁에 반기를 드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골태방침의 원안의 ‘무수정’ 채택에 유리하게 작용했던 또 다른 점은, 골태방침이 일본에서 처음 시도되는 정책기조의 설정 방법이었다는 점이다. 그 점 때문에 (개혁과 예산 지침서로서) 골태방침이 얼마나 실질적으로 중요하게 취급될 것인지, 정치권이나 일반부처들이 미쳐 깨닫지 못했다. 골태방침이 ‘별 것 아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골태방침이라는 것에서 위협을 덜 느끼다보니, 그것이 비교적 수월하게 별 수정 없이 자문회의의 원안대로 만들어 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설사 골태방침에 그들이 원하지 않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정책이 추진되거나 예산이 편성될 시기에 당과 부처가 상호 협력해 조정하면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 구체적인 정책을 수립할 때가 되면 결국 정책주도권이 자기네 손안에 들어올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안이한 생각이 얼마나 큰 ‘실책’이었는 지 곧 밝혀지기 시작했다. 나는 골태방침를 핵심의 변경이나 수정 없이 그대로 구체적인 정책으로 끝까지 추진해 나갈 작정이었다.
자료: 大田弘子(2006), 『經濟財政諮問會議の戰い』, 東洋經濟新報社.
개혁공정표로 개혁 태업(怠業) 차단
내 내각은 개혁추진을 위해 독특한 장치를 선보였다. 관료와 국회가 꼼짝 못하고 고이즈미 내각이 정해놓은 대로 구조개혁을 추진하게 한 ‘개혁공정표(改革工程表)’ 가 바로 그것이다. (그 후 모든 내각이 주요 정책에 관해 정책 추진 공정표를 만들게 되어 일본의 행정의 관행이 되었다.) 이는 관료의 생태를 감안해서 고안해 낸 개혁추진 방안이었다. (물론, 개혁공정표 아이디어는 다케나카 자문회의 담당대신이 내게 건네주었다!)
추진해야 할 정책과제를 아무리 구체적으로 짜서 관료들에게 넘겨준다 하더라도, 그것에 추진 완료 시점을 못박아 두지 않으면 개혁추진을 담보할 수 없다. ‘작은 정부’류의 나의 개혁이 곧 권한과 예산의 축소라는 걸 잘 아는 관료들은 ‘중장기적으로 추진한다’ ‘개선해 나간다’ 또는 ‘검토한다’는 말만 늘어놓고 실제 추진은 어떻게든 뒤로 미루어 개혁을 중도하차 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내가 자문회의에서 개혁공정표 작성을 지시 내린 것은, 골태방침이 각의결정된 직후인 7월 10일이었다. 나는, 장관들이 책임을 지고 각부처가 추진해야 할 개혁과제의 스케줄을 제시하되, ‘9월이나 가을까지 할 수 있는 것, (가을) 임시국회에서 법 개정을 통해 가능한 것, 2002년도 예산으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시기를 구분하여, 공정표를 작성하라고 작성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그 후 두 달에 걸쳐 각 부처 장관들로 하여금 자문회의에 참석해 골태방침이 제시하는 개별 개혁과제의 세부 사안을 구체적으로 언제까지 추진할 것인지를 설명케 하고 조정을 거치게 한 다음, 9월 21일 자문회의가 개혁공정표를 정식으로 마무리 채택하였다. 그 후 매년 골태방침과 개혁공정표는 한 묶음의 개혁 추진 계획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정책의 입구(入口)
2002년에 들어 불황이 더욱 깊어지는 가운데서도 골태방침 2002는 고유의 개혁 지향을 바꾸는 않았다. 그래서 세제개혁, 지방행정재정개혁 (‘3위1체개혁’), 사회보장제도개혁, 세출개혁, 연금개혁, 의료개혁, 특정재원개혁, 예산편성 프로세스 개혁 등 고이즈미 개혁 과제들이 여전히 골태방침의 중심 테마로 자리잡고 있었다.
골태방침 2002은 특히 재정과 관련해 골태방침 2001의 긴축과 개혁의 기조를 그대로 이어갔다. 그리하여 (1) 2010년대 초 기초재정수지의 흑자화 (2) ‘실질적으로’ 2002년 수준 이하로 세출 억제 (3) 국채발행 30조엔 초과 억제 (4) 2003년 특정재원 개혁 구체화 (5) 행재정개혁 가속화로 작은 정부 조기 실현 등 재정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집권 후 1년 사이에 관저주도 체제에 일어난 가장 괄목할 만한 변화의 하나가 일본 행정체제 안에서의 골태방침의 자리매김이었다. 골태방침 2001이 처음 등장하였을 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자민당 족의원이나 개별 부처가, 2001년 한 해를 통해 정책수립이나 예산편성이 골태방침의 틀 안에서, 골태방침이 정한 대로 진행되는 것을 보고는 생각을 고쳐먹지 않을 수 없었다. 골태방침이 정책 추진이나 예산확보를 위한 ‘최초의 승부처’ 즉 ‘입구’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특히 ‘작은 정부’ 정책관에 철저한 나 때문에 긴축예산을 짤 수 밖에 없었던 재무성은, 자기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예산요구까지 ‘그것은 자문회의가 정한 골태방침에 위배된다’는 핑게로 입막음을 하곤 했다.
2002년에 들어서는, 자민당 개별부회나 부처들은 골태방침이 본격적으로 논의되는 5월보다 훨씬 전부터 (2003년부터는 자문회의 주요 토의과제를 정하는 연초부터) 자문회의를 상대로 로비에 들어갔다. 자기네들이 원하는 정책이나 정부 예산사업을 골태방침에 포함시키거나 또는 그 예산 삭감 리스트에서 제외시키기 위해서였다.
골태방침을 둘러싼 자민당과 부처의 로비는 해가 갈수록 조직화 되어갔다. 골태방침이 자타공인으로 예산편성에 중요한 절차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더불어, 관저주도에 의한 개혁추진과 예산편성이라는 관행도 통상적인 것으로 정착되어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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