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재벌 논자들의 곡학아세(曲學阿世)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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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케티의 <21세기 자본> 바로 읽기’?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21세기 자본>은 주요 선진국들의 부와 소득의 분배가 18세기 이후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방대한 조세자료에 기초해 실증한 연구서다. 지금까지 이런 큰 범위와 장기간의 분배 연구가 없었기에, 그리고 1970~8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부와 소득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기에, 2014.3. 이 책의 영어판이 출간되자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고 불평등 문제에 관한 뜨거운 논쟁이 촉발되었다.
이 책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스티글리츠(J.E. Stiglitz)에게는 “부의 분배에 관한 자료의 제공”이라는 “근본적인 공헌”을 한 저서이고, 쿠루그먼(P. Krugman)에게는 “올해의, 그리고 아마 10년 중의, 가장 중요한 경제학 서적”이다. 피케티가 사용한 통계 일부에 의문을 제기했던 Financial Times는 이 책을 “Business Book of the Year”으로 선정, 3만 파운드의 상금을 수여했다.
반면, 우리나라의 친재벌 논자들에게 이 책은 일반인들에게 ‘위험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바로 읽기’가 필요한 서적이다. 이들은 2014.8.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바로읽기>를 출간, 이 책이 “배 아픔 정서를 부추기는”, “가난으로 인도하는”, “현상을 오도할 뿐”인 내용과 주장을 담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의 불평등의 불가피성과 정당성을 설교하고 있다.
앵거스 디턴의 The Great Escape 왜곡 번역
친재벌 논자들의 불평등 옹호는 피케티 비판에서 끝나지 않았다. 2014.9. 한국경제신문은 프린스턴대 앵거스 디턴(Angus Deaton) 교수가 2013년 출간한 The Great Escape를 <위대한 탈출>로 번역·출간해 <21세기 자본>의 대항마로 삼고자 했다.
이 번역서는 불평등이 성장의 동력이라는 메시지를 팔고자 했고, 이를 위해 원문의 충실한 전달이라는 번역 윤리를 저버렸다.
번역서에서 원서의 부제 ‘health, wealth, and the origin of inequality’가 “불평등은 어떻게 성장을 촉발시키나”로 대체되었다. 표지에 원서에 없는 소개 글들 - “앵거스 디턴의 신자본주의론”, “불평등은 성장의 또 다른 기회이다!”, “정통 주류경제학자가 밝히는 불평등 그리고 빈곤 해소의 대안” - 이 붙여졌다. 나아가, “피케티 vs. 디턴, 불평등을 논하다”라는 현진권 자유경제원장의 서문도 추가되었다. 장, 절의 제목과 위치가 변형되었고, 본문 번역에도 누락이 많았다. 번역서는 원서와 다른 책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전경련은 이 번역서와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바로읽기>에 시장경제상을 주었다. 2014.12. 한국경제신문은 우수상 수상자로 “‘21세기 자본론’의 문제점을 지적한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바로읽기’와 경제적 불평등이 성장을 촉발시킨다는 사실을 분석한 ‘위대한 탈출’이 선정됐다”고 보도했다.
2015.10. 디턴 교수가 소비, 빈곤 및 후생에 대한 연구업적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많은 언론들이 (아마 번역서에 의거해서) 그가 피케티의 대척점에 있으며, <위대한 탈출>에서 ‘불평등이 성장의 동력’임을 논증했다고 보도했다. 한국경제신문(2015.10.16.)이 대표적이다: “디턴은 자본주의가 경제성장을 통해 그 어떤 시대보다 불평등을 줄이고 있다고 강조해왔다. 이는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가 지난해 출간한 ‘21세기 자본’에서 세습된 부가 빈부격차를 심화시켰다고 주장한 것과 정반대다. 이보다 앞서 2013년 디턴 교수가 내놓은 ‘위대한 탈출’은 불평등이야말로 성장을 촉발했으며 세상은 역설적으로 평등해졌다고 설득력 있게 입증했다.”
이런 홍보가 한창일 때 <위대한 탈출>의 왜곡 번역 문제가 불거졌다. 이 문제를 알게 된 프린스턴대 출판부는 번역서 판매를 중지시키고 독립적 검토를 거쳐 새 번역본을 출간하되, “이 책이 불평등에 관한 다른 책들에 대한 대척점으로 읽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서문을 제거”하라는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이런 사태 후에도 친재벌 논자들의 The Great Escape에 대한 아전인수 해석은 계속되었다. 다음 주장들이 대표적이다: “경제성장으로 세계가 보건, 기대수명, 교육수준 등에서 의미 있는 진보를 이뤘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며 “이것이 위대한 탈출의 핵심 명제다.” “성장이 빈곤층의 경제적 희생으로 생겼다는 피케티식의 ‘배 아픔의 정서’는 우리를 다시 빈곤에 빠뜨릴 것이다.”
The Great Escape의 진정한 메시지
The Great Escape는 가난과 질병으로부터의 탈출을 다룬 책이다. 이 책의 핵심 주제와 주장은 무엇인가? 브라운대학교의 D.N. Weil 교수가 2015.3. 미국경제학회의 Journal of Economic Literature에 서평(review)을 게재했다. 그의 요약문 전체를 그대로 옮겨본다:
“이 책은 물질적 생활수준과 건강 간의 관계를, 여러 국가에 걸쳐 그리고 시간에 걸쳐, 탐구하고 있다. 무엇보다, 디턴은 소득증대가 건강증진에 유의하게 기여하는지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의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빈국에서 생명을 구하는 데는 많은 돈이 들지 않으며, 소득증대가 없는데도 광범하게 건강증진이 이뤄진 사례가 많다. 그는, 다른 설명으로서, 건강과 소득 간의 횡단면 상관관계가 제도의 질적 차이에 의해 유발되며, 장기간에 걸친 소득과 건강의 평행적 향상은 지식 진보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The Great Escape 어디에도 자본주의가 경제성장을 이뤄 탈출이 가능했다는 말은 없다. 디턴은 지식의 발전이 삶의 향상을 가져왔다고 보고 있다. Weil의 서평을 인용하면, “지난 수세기에 걸친 선진국에서의 소득과 건강의 동시 향상은 주로 지식의 변화에 의해 설명된다. 구체적으로, 과학의 발전과 계몽주의에서 나온 실험정신에 의해 추동되어, 생산 지식과 건강 지식이 함께 발전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질병의 질곡에 갇혀 있다. 어떻게 해야 탈출할 수 있나? 서평의 결론대로, 디턴은 제도의 품질과 국가 역량을 강조하고 있다:
“가용 지식을 적용해 설사와 하기도 감염에 의한 사망을 막으려면 국민 모두에 대해 호응하고 책임지며 목적달성의 역량을 가진 정부가 필요하다. 일국이 산출물을 잘 생산하게 만드는 제도의 특성들이 깨끗한 물과 의료 접근도 잘 조직하게 해준다. 그래서 디턴의 책은, 의회와 계약이 아니라 세균과 영양실조에서 시작해서, 제도의 중요성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진화하는 이해에 크게 기여하는 것으로 끝난다. Thomas Hobbes는 폭력에 그리고 디턴은 미생물에 의한 폭력에 집중했지만, 잘 작동하는 정부가 인류가 비참의 상태를 탈출할 수 있게 하는 동인이라는 디턴의 결론에 Hobbes도 동의할 것이다.”
디턴이 빈국에 대한 경제원조에 부정적인 것은, 일부 언론보도처럼 ‘불평등이 성장을 촉발’하거나 ‘자력으로 성장에 매진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어서가 아니라, 원조가 수혜국의 정치를 그 국민과 괴리시켜 성장의 기반인 제도의 발전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The Great Escape의 불평등 논의
디턴이 ‘경제적 불평등이 성장의 동력’이라고 했나? “불평등은 발전을 자극할 수 있거나 또는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불평등은,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에서 이익을 얻는 길을 보여준다면, 때로 성장을 확산시킬 수 있다. 그러나 불평등은 물질적 향상을 약화시키고 심지어 완전히 절멸시킬 수도 있다.”
그는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은 “같이 가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불평등 자체가 기회의 평등에 대한 장애물”이라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또한 그는 사회 전반의 소득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고, 이에 대한 우려는 계급전쟁이나 배 아픔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긴요한 것은 진영논리가 아니라 자료와 지식이다
세계 주요국들은 저성장과 불평등 확대에 직면해있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불평등은 우리의 삶은 물론, 정치·경제·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 불평등은 뒤쳐진 사람들에게 따라잡을 희망과 유인을 갖게 해 사회가 발전하게 할 수 있지만, 심한 불평등은 정치 시스템을 부패시키고 경제성장을 마비시킬 수도 있다.
불평등이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불평등 인식과 논의는 사적 이해관계와 이념에 매몰되어 있다. 피케티와 디턴에 대한 언론보도는 불평등 문제에 대한 이념적 편향에 지배되었고, 진영논리의 단언들로 채워졌다. <위대한 탈출>의 왜곡 번역 시비가 벌어졌고, 이는 저급한 이념싸움으로까지 번졌다.
저자 승인 없이 원서를 변형한 번역서를 내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래서는 외국학자 저서를 이용해 자신들의 믿음을 팔려 했다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이런 행태는 반재벌 정서를 부추기고, 보수의 진정한 가치를 위협한다. 불평등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속빈 진영논리의 싸움을 확대 재생산하고 분열을 조장할 뿐이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이념 장사꾼들이 아니라 불평등 문제의 진실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불평등의 양상과 귀결, 관련정책의 효과 등에 대한 자료와 지식이 있어야만, 논쟁이 합리적으로 진행될 수 있고 더 나은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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