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2 : 정통의 길을 걸어간 전량 (B)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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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6) 장궤의 유언과 아들 장식(AD314)
AD314년 5월 장궤가 병으로 누웠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장궤는 아들을 불러 놓고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문무장군이나 보좌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데 힘을 쓰고
위로 나라에 보답하며
아래로 자기 집안을 평안하게 하라“
그리고 장궤가 5월 20일 사망했다. 시호는 서평무목공이다. 표문을 조정에 올려 아들 장식에게 자리 물려줄 것을 요청했다. 10월 조정은 장식을 도독양주제군사, 양주자사 및 서평공으로 임명했다.(AD314)
양주 군사 장빙이 도장을 어디서 얻어왔다. 그 도장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 황제행새(皇帝行璽)”
번역하자면 ‘황제역할 하는 사람의 도장’이란 뜻이다. 장빙은 이 도장을 장식에게 바쳤다. 장식은 도장을 보더니 근엄하게 이렇게 말했다.
“ 이는 신하된 사람이 가질 것이 아니다”
도장을 장안으로 보냈다. 역사 비평가 호삼성은 이런 장식에 대해 이ᅟᅥᆶ게 평가했다.
“ 당시 4진 4정 가운데
군신의 분수를 안 사람은 장식부자 밖에 없다.“
(7) 장식의 정치(AD316)
양주지역 통치자 장식은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 관리와 백성의 허물을 들추어 고발하는 사람에게
포와 비단과 양과 쌀을 상으로 주겠다.”
모든 일을 일일이 자신이 챙겨서 정치를 하겠다는 말이었다. 아버지가 죽고 정치를 이어 받은지 얼마 되아 의욕이 넘쳤던 장식으로서는 당연하게 여겼던 일이었다. 고창사람 외근이 말했다.
“ 밝으신 서평공께서 정치를 하시는데
일이 크고 작건 간에 모두 스스로 이를 결정하시니
혹 군사를 일으키고 명령을 내리시는 경우에도
아래 부서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어긋나고 실패하면
비방 받는 것은 나눌 곳이 없습니다.
아랫사람들은 권위를 무서워하여
이미 이룩된 것, 즉 장식의 명령만 받을 뿐입니다.
이같이 하면 비록 상을 천금으로 준다 하더라도
끝내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총명함을 조금은 덜어내시어
무릇 백가지일을 모두 아랫사람에게 찾아서 물으시고
각자 자기 생각을 다 말하게 하신 다음
이를 채택하시면 훌륭한 말이 스스로 많아 질것입니다.
따로 상을 주실 일이 없도 것입니다.“
장식이 기뻐하며 외근의 지위를 세 등급이나 올려 주었다. 또 장군 왕해와 5천 보,기병을 보내 장안을 원조하고 공물과 장부를 겻들여 호송하게 했다. 조정에서는 그런 장식에게 도독섬서제군사라는 직책을 주었고 그의 동생 장무는 진주자사로 임명했다.(AD316)
(8) 유요의 장안공격과 서진 멸망(AD316)
전조의 유요가 장안을 공격해왔다.(AD316) 장식은 안정태수 초숭과 신평태수 축회와 홍농태수 송철을 보내 장안을 구원했다. 서진의 산기상시 화집이 패상(섬서성 남전)에 주둔하고 군사를 총지휘하자 유요군이 두려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상국 사마보가 호숭을 파견 유요를 격파했으나 서진 조정의 궈신 국윤과 삭침 무리가 다시 정권을 오로지 할 것이 두려워 군사를 뒤로 물린 뒤 흥평으로 철군하고 말았다.
사마보의 군사들이 물러나자 유요는 장안외성을 함락시켰고 국윤과 삭침은 장안의 작은 내성을 지켰다. 전조 유요의 군사에 포위된 내성에는 곡식이 부족하여 쌀 한말이 금 2냥과 바꾸었고 사람을 서로 서로 잡아먹어 인구 숫자가 절반으로 줄었다. 서진의 군사나 백성들은 다 성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전량의 의병 천 여명은 죽음을 무릅쓰고 방어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AD316년 3월10일 서진 민제 사마업은 어깨를 드러내고 양이 끄는 수레를 타고 구슬을 입에 물고 관을 수레에 싣고 장안 내성 동쪽 문을 나와서 유요에게 항복했다. 유요는 관을 불태우고 사마업을 평양(산서성 임분)으로 호송했다.(3월17일) 전조 황제 유총은 서진황제 사마업을 광록대부 회안후에 봉하고 일단 목숨을 살려주었다. 그러나 사마업은 2년 뒤 처형된다.
서진이 멸망한 뒤 조정의 황문랑 사숙과 시어사 왕충은 양주에 의탁하기 위해 도읍지 무위로 도망왔다. 그리고 민제가 유요에게 항복하기 전 몰래 보낸 조서를 장식에게 건넸다.
“ 대도독 양주목 시중 사공 장식은
승제(황제의 위임을 받아)하여 일을 처리하라.
짐이 낭야왕(사마예)에게 때를 맞추어
대위를 받아 섭정하라고 명령하였으니
그대는 낭야왕을 도와 어려움을 풀어가라.“
말하자면 자신이 포로가 된 상황이니 장식이 망명정부의 수장이 되어서 마치 황제 위임을 받은 것처럼 정치를 하면서 낭야왕을 도와 서진 조정을 재건하는데 노력하라는 황명인 셈이었다. 낭야왕 사마예(AD276-AD323)는 사마관의 아들이다. 사마관은 서진 창업주 사마의의 아들 사마주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서진의 건국창업자 사마염의 사촌인 셈이다. 그러므로 사마예는 사마의-사마염의 직계 후손이다. 사마예는 다음해인 AD317년 건강으로 내려가 동진의 창업주가 된다. 장식과 그 후손들은 조상들이 서진 조정에 그랬듯이 동진 조정에 대해 끝까지 충성을 바쳤다.
(9) 전조의 천수지역 압박(AD318)
서진이 AD316년 유요에게 멸망될 때 일부 관료들은 남양왕 사마보를 중심으로 북서쪽으로 도망가서 천수를 중심으로 안정(감숙성 진원)과 신평(섬서성 빈현)과 부풍(섬서성 흥평)지역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전조의 안정태수 초숭과 토로장군 진안이 군사를 들어 상규(감숙성 천수)를 압박해 들어왔다. 당황한 서진 상국 사마보가 장식에게 다급하게 구원을 요청했다. 장식은 금성(감숙성 난주)태수 두도에게 보,기병 2만을 보내 구원해 주었다.
이 즈음 포로로 잡혀있던 민제 사마업이 평양에서 피살되었다.(AD317년12월20일) 파강도위장선이 장식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남양왕 사마보는 황실의 먼 친척
스스로 존호를 가지려고 하나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왕 사마예는 가까운 친척 또한 명망덕행도 갖고 있으니
마땅히 천하가 그를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사마보의 계통이 낭야왕 사마예처럼 황실과 가깝지 않으니 돕지 말자는 권고였다. 장식은 사신 채충을 표문과 함께 건강 사마예에게 보냈다. 장식은 민제 사망 후 계속해서 민제 연호인 건흥을 49년 동안 사용했다. 동진 효종 승평 5년(AD361)이 되어서야 당시 주군 장천석은 동진 연호 승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0) 독립을 선언한 사마보와 피살(AD319)
상규(감숙성 천수)에 주둔해 있던 남양왕 사마보가 AD319년 없어진 서진 조정을 부활한다는 의미에서 진(晉)왕을 자칭하면서 연호를 건강이라고 하고 장식을 정서대장군 및 개부의동삼사에 임명했다. 그런데 진왕 사마보의 부하 진안은 스스로를 진주자사라고 자칭하면서 전조에 투항했다가 성한에 투항했다가 하기를 반복했다. 상규에 큰 기근이 일어나자 진안이 상규를 공격해 들어왔다. 진안에게 압박 받던 사마보는 또 다시 장식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다. 충성스런 장식은 보,기병 5천을 보내 사마보를 도와줬다. 장식의 구원병이 진격해 들어오자 진안은 면제(감숙성 청수)로 퇴각했고 사마보는 측근 장천과 함께 다시 상규로 돌아 올수 있었다. 사마보가 천수로 복귀한 뒤 장식의 군대가 돌아가자 진안은 다시 상규를 압박했는데 이번에도 장식은 장수 송의를 보내 진안을 완전 퇴각시켰다.(AD319)
사마보의 장수 장춘과 양차는 별장 양도와 불화했다. 장춘과 양차는 사마보에게 양도를 죽이라고 졸랐지만 사마보가 듣지 않았다. 이 두 사람은 또 사마보에게 진안을 공격하자고 권했지만 이 역시 묵살하고 듣지 않았다. 화가 난 장춘과 양차는 사마보를 유폐시켰다가 곧 살해해 버렸다. 사마보는 순진하기는 했지만 아둔하고 결단력도 없으며 사실상 무능한 군주였다. 장춘과 양차는 사마보에게 아들이 없어서 종실의 자제 사마첨을 후계로 세웠다. 이 난리통에 사마보 무리 중 1만여 명이 장식이 있는 양주로 도망갔다.
진안은 주군 유요에게 장춘과 양차가 조종하는 사마첨을 토벌하기를 요청했다. 유요는 즉각 승낙했다. 유요의 대군이 진안의 선봉으로 쳐들어오자 장춘과 양차는 내부에서의 반란을 예방하기 위해 곧바로 사마첨을 살해했다. 그러나 유요와 진안의 연합군을 막기에는 턱없이 힘이 모자랐다. 장춘은 부한(감숙성 임하)으로 도망갔고 양차는 진안에게 포획되었다. 진안은 사마보의 영구 앞에서 양차를 참수했다.
(11) 유홍의 반란과 전량 건국(AD320)
유홍이라는 사람이 양주 천제산(무위 남쪽 40KM)에서 요사한 술법을 가지고 혹세무민 하는 바람에 1천 여 명 백성들이 그를 열렬히 따르는 일이 벌어졌다. 그 무리 중에는 장식의 부하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관리 염섭과 조앙 등은 유홍과 고향이 같았다. 유홍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하늘이 내게 신의 인새를 주었으니
응당 내가 양주에서 왕노릇 해야 할 것이다.”
유홍을 철저히 따르며 신봉하던 염섭과 조앙은 주위의 10여명과 함께 장식을 암살하고 유헝을 옹립할 음모를 꾸몄다. 장식의 동생 장무는 그 사실을 전해듣고 장식에게 가서 유홍 무리를 잡아들이라고 재촉했다. 장식이 사초를 보내 잡아들이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염섭은 칼을 품고 장식의 침막으로 들어가 그를 암살하고 말았다. 나이 50세 였다. 사초가 유홍에게 갔을 때 유홍은 이미 장식이 죽었다고 말했지만 사초는 유홍을 잡아 혀를 자르고 가두었다가 고장(무위)의 저자에서 거열형에 처해버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하던 무리 수 백명도 함께 처단했다.
장식의 아들 장준이 13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삼촌 장무를 양주자사 서평공으로 세웠고 전국에 사면령을 내림과 동시에 장준에게는 무군장군의 직책을 내렸다. 이런 사면령 조치는 사실상 독립국가 만 할 수 있는 행위이다. 따라서 자치통감의 역사가들은 이 때를 전량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 바야흐로 중국에는 5개 국가가 병립하는 형국이 되었다. 동진, 전조, 후조, 성한, 그리고 전량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때 이미 탁발의로의 대나라가 건국(AD315)된 상태였으므로 사실은 6국체제가 된 셈이다. 곧바로 장무는 조카 장준을 세자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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