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 분열로 망한 오나라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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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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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나라 동궁의 갈등과 조정의 분열(AD245)
AD229년 오나라(AD229-AD280)를 세운 손권은 AD242년 18세 손화(和)를 태자로 책립하고 친동생 손패(覇)를 노(魯)왕에 봉하였다. 그리고 왕씨 소생인 그 둘을 같은 궁궐에서 같이 살게 하였다. 그만큼 손권은 손화와 손패를 차별 없이 총애했고 또 두 형제간의 사이도 매우 좋았다. 그러나 태자 손화를 모시는 태자부 관료들과 노왕 손패를 모시는 노왕부 속료들로써는 아무래도 갈등이 없을 수가 없었다. 상서복야 시의라는 사람이 노왕부로 발령나게 되자 황제 손권에게 이렇게 상소했다.(AD242)
“ 신이 가만히 살펴보니 노왕 손패는 천생으로 품덕이 높을 뿐만 아니라 문무의 자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방을 진압하고 번병을 다스리는 직책을 맡겨 내어 보내시어 형님의 덕정을 널리 선양하고 빛내도록 해야 합니다. 또 태자부와 노왕부의 격도 마 땅히 차별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국가의 훌륭한 법도이고 천하가 바라는 바입니다.“
태자 손화와 노왕의 대우가 똑같은 것이 격식에 맞지 않다는 말이다. 상서복야 시의는 네 번이나 같은 내용의 편지를 올렸지만 황제는 움직이지 않았다. 시의의 속뜻이 무엇이었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노왕을 견제하자는 것만은 확실하다. 조정의 정통 대신과 관료는 대체로 태자 손화 편이었고 관우를 죽인 그 유명한 승상 육손(손권의 사촌 매형이기도 함)이 태자지지파의 거두였다.
노왕 편에는 황제 손권의 딸 손노반이 있었다. 보(步)부인 소생인 손노반은 배 다른 동생 손화를 낳은 왕씨와 사이가 매우 나빴다. 손노반의 남편 전종도 아들 전단과 전기와 전서를 노왕파에 가담하게 하였다. 태자파 육손이 전종에게 강력하게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전종과 그의 아들들은 노왕 편에 섰다. 노왕 손패 또한 자신의 신분을 낮추면서까지 유능하고 유려한 사람들과 교류를 확대해 나갔다. 점차 조정이 태자파와 노왕 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태자부와 노왕부의 갈등이 점차 고조되자 3년 뒤인 AD245년 황제는 궁궐을 둘로 나누고 태자와 노왕의 행정부서 또한 나누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태자부나 노왕부에 선비들의 출입을 일체 금지하도록 하였다.
손노반은 앞으로 태자 손화가 황제로 등극하게 되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것이 뻔했으므로 태자 손화를 극렬하게 모함하기 시작했다. 손권이 병으로 눕게 되자(AD245) 황제가 태자를 형님인 손책 사당에 제사를 하도록 보냈는데 손노반이 몰래 밀사를 보내 염탐시킨 결과 태자가 제사를 지내기는커녕 근처에 있는 태자비의 숙부 장휴의 집에서 놀면서 비밀모의만 하고 있더라고 참소했다. 손노반은 또 왕부인(태자 손화의 모후)이 손권의 와병소식을 듣고 즐거워하더라고 모함했다. 손권은 딸 손노반의 모함을 듣고 격노하였고 부인 왕씨는 걱정 끝에 홧병으로 죽었다.
(2) 태자파가 궁지에 몰리고 육손의 죽음(AD245)
태자 문제로 온 조정이 시끄럽고 황후 왕씨 또한 죽은데다가 손노반 및 노왕파의 참소가 끊이지 않자 병마에 시달리던 손권의 태자에 대한 애정은 급격히 식었다. 걱정이 된 육손이 나서서 이렇게 충언했다.
“ 태자는 나라의 정통이므로 반석같이 굳건해야 합니다.
노왕은 번신일 뿐이므로 녹질과 총애가 차등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피차간에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하는 것이 바른 길입니다.“
손권은 육손의 이 말에 몹시 못마땅했다. 육손의 외조카 태상 고담도 태자 옹호에 나섰다.
“ 나라를 거느리는 사람은 반드시 적서를 밝혀 주시고
높고 낮음의 예를 분명히 해야
골육간의 은전이 온전하게 되고
분수에 넘치는 욕망이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한 무제가 총애하는 신부인을 황후와 같이 자리하게 하자
원앙이 나서서 신부인을 크게 꾸짖었습니다.
한 무제가 화가 나서 원앙을 죽이려하자
원앙이 상하구별의 뜻을 설명하고
‘사람돼지(인체)’의 사례를 설명하자
한무제와 황후가 모두가 깨닫지 않았습니까.
지금 신이 말씀 올리는 것은 어느 한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태자의 안전과 노왕의 온전함을 모두 위함입니다.“
고담의 말을 전해 듣고 노왕 손패 또한 매우 불쾌해 했다. 노왕파인 전종의 아들 전단과 전서가 고담의 동생 고숭과 장휴를 참소했고 결국 손권은 고담과 그 아들 고숭을 귀양보냈고 태자비의 숙부 장휴는 사약을 받았다. 노왕에게 경사를 떠나 지방을 수비하라고 재촉한 태자태부 오찬을 모함하여 결국 참수하였고 오찬과 내통하였다고 하여 육손에게 책임을 물었다. 억울하고 분통해하던 육손은 화병으로 죽었다.(AD245)
(3) 태자 손화 폐위와 손량 옹립과 반대파 숙청(AD250)
태자 손화와 틈이 있었던 전공주(즉 손노반, 남편의 이름이 전종이었으므로 그렇게 불림)는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 아버지 손권의 애첩 반부인과 그의 아들 손량을 몹시 칭찬하며 가까이 하였다. 그리고 남편의 조카 전상의 딸을 손량에게 시집보내게 하였다. 노왕 손패의 무리들이 형 손화를 해치려고 음모를 꾸리는 것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던 손권은 시중 손준을 불러 이참에 손화와 손패를 동시에 물리치고 오히려 반씨 소생 손량을 세울 뜻을 넌지시 드러내었다. AD250년 가을 손권은 손화를 유폐시켜 버렸다.
표기장군 주거가 태자는 나라의 근본임을 들어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손권은 듣지 않았다.
상서복야 굴황은 모든 장군들을 대동하고 머리에 진흙을 바르고 온 몸을 결박하고서 매일같이 궁궐에 나와 손화를 용서해 줄 것을 빌었다. 손권이 매우 노하여 내뱉었다.
“ 할 일이 되게 없는 모양이구나.(无事匆匆=無事悤悤)”
무난독장군 진정과 오영독장군 진상은 편지로 황제의 태자 폐립을 반대하다가 온 가족이 주살당하였다. 주거와 굴황이 반대를 그치지 않자 황제는 궁전으로 끌어왔는데 그래도 입에서 피가 나도록 반대를 외치며 그치지 않자 결국 귀양을 보내었다. 귀양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주거에게는 사약이 내려졌다. 이 후에도 태자 폐립에 반대하다가 목숨을 잃은 자는 수십 명에 달하였다. 손화는 폐서인시되어 절강성 장흥으로 귀양 보냈고 손패에게는 사약을 내렸다. 손패에게 붙어 손화를 참소한 양축, 전기, 오안, 손기 모두 주살되었다. 그 해 11월 8세의 손량을 태자로 옹립하였다. 태자의 모후인 부인 반씨는 다음 해 5월에 황후로 승격시켰다.
(4) 손권의 때늦은 후회(AD251)와 사망(AD252)
태자를 갈아치운 손권은 그 다음 해(AD251)에 풍질로 건강이 나빠졌고 손화가 죄가 없음을 깨닫게 되어 손화를 귀양지인 절강성에서 소환하려고 했다. 전공주와 시중 손준과 중서령 손홍이 모두 반대하고 나섰다. 폐립문제로 조정이 한바탕 홍역을 치른 마당에 손화가 다시 오게 되면 더 큰 불화가 일어날 것은 당연했다. 결국 병든 손권은 나이어린 태자 손량을 대신하여 조정을 맡아 줄 사람을 물색하였다. 시중 손준이 무창에 있는 대장군 제갈각을 추천했다. 제갈각은 제갈근의 아들로 제갈량의 조카인 셈이다. 손권은 그가 강퍅하고 잔혹하여 믿음이 가지 않았다. 손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현재 상황에서는 제갈각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결국 무창의 대장군 제갈각을 소환했다.
건업(남경)으로 길을 떠나려는 제갈각에게 상대장군 여대가 충고의 말을 올렸다.
“매사 열 번씩 생각하고 행동하시오.”
제갈각이 언짢은 듯 대꾸했다.
“옛날 계문자(춘추시대 노나라 대부)는 세 번 생각하고 실행했고
공자께서는 두 번 생각하면 족하다고 했는데
그대가 나보다 열 번 생각하라고 하니
나 제갈각이 확실히 그들보다 열등하다는 말이구려.“
연말에 건업에 도착한 제갈각은 대장군 및 태자태부가 되었고 손홍은 태자소부의 역할을 맡았으며 등윤을 태상으로 삼았다. 손량의 어머니인 반황후는 성격이 사나웠고 탐욕스러웠다. 손권이 병들어 눕게 되자 아들이 곧 황제가 될 것이므로 태자소부 손흥에게 악명 높은 전한 여태후(呂太后)의 칭제 사례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깜짝 놀란 조정대신들이 모의하여 반황후를 질식사 시키고는 갑자기 병사했다고 발표했다. 나중에 사건 전모가 드러나 6-7명이 죽었다. 병이 깊어지자 황제 손권은 제갈각, 손홍, 등윤, 여거, 시중 손준을 침실로 불러 훗날을 부탁하고는 곧 사망했다(AD252년 4월, 71세).
(5) 손홍의 잔꾀가 부른 재난(AD253)
태자소부 손홍은 평소에 제갈각과 사이가 나빴다. 자신의 직급 태자소부가 제갈각의 태자태부보다 낮기도 했지만 원래 제갈각이 교만하고 안하무인 군인이어서 앞으로 조정 정치가 매우 어려워질 것이 염려되었다. 일단 제갈각을 먼저 제거하려고 손권의 장례를 발표하지 않기로 손준 등 조정 대신과 의논했다. 손준에게 계획을 누설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제갈각을 추천했던 손준은 바로 그 사실을 제갈각에게 알렸고 제갈각은 중대한 문제를 의논하자고 손홍을 유인한 뒤 죽였다. 제갈각이 사실상 군권과 조정의 전권을 쥔 셈이다.(AD252)
(6) 제갈각의 위공격 실패와 손준의 제갈각 처형(AD253)
태자 손량이 10세의 나이로 오나라 황제에 올랐다. 제갈각은 즉각 감세조치를 내리고 행정을 간소화했다. 여러 황실의 친왕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임지를 전부 옮기도록 조치했다. 제왕 손분이 옮기려하지 않자 겁박하여 옮겨 가도록 했다.(AD252) 이 때 북쪽 진나라 사마사가 세 갈래 길로 오를 침략하려다가 제갈각에게 크게 패하였다. 이 승리에 도취된 제갈각은 그 다음해인 AD253년 20만의 대군으로 진나라 정벌에 나섰다. 많은 장군들의 반대에도 군사를 일으켰던 제갈각이 전쟁에서 크게 패배하여 성과 없이 돌아왔다. 군사들과 백성들은 전쟁에 지치기도 하였고 또 제갈각의 인사전횡이나 가혹한 형벌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를 알아차린 손준은 제갈각을 반란혐의로 무고하였다. 황제 손량은 손준과 짜고서 연회를 열어 제갈각을 초청한 다음 군사를 풀어서 제갈각 무리를 죽여 버렸다. 사실 연회에 모종의 계략이 숨어있을 것이라는 첩보가 있었지만 손량이나 손준을 어린아이쯤으로 가볍게 생각했던 제갈각이 결국 피살되었다. 손준을 태위, 승상 겸 대장군으로 삼고 등윤을 사도로 삼았다. 손준은 귀양 가 있던 옛 태자 손화에게 독약을 보내 죽였다.(AD253)
이 때 손화에게는 첩 하씨가 있었는데 손화의 모든 첩들이 손화와 함께 자살했지만 하씨는 자기 아들과 다른 첩이 나은 손화 아들을 기르기 위해 자살을 택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 중에 손호가 나중에 오나라 마지막 황제가 된다.(아래(11)참조)
(7) 손준 암살모의(AD254, AD256)와 손준의 병사와 손침의 집권(AD256)
손준이 병권을 쥐고 정치를 농단하자 손준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움텄다. 사마 환려가 손준을 죽이고 소화가 태자이기 전에 원래 태자였던 장남 소등의 아들 소영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발각되어 모두 몰살당했다.(AD254) 전공주가 동생 주공주를 손준에게 참소했다. 주공주의 남편 주거가 이번 역모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손준은 주공주도 죽였다(AD255). 다음해(AD256) 7월 오나라 장군 손의와 장이와 임순 등이 손준을 암살하려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10여명이 죽었다. 병권을 잡은 손준은 제갈각과 마찬가지로 위나라를 침략하여 영토를 넓히고 싶었다. 군사를 모아 북으로 진격하려는 도중에 손준은 병에 걸려 죽게 되자(AD256년 8월14일) 사촌동생 손침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였다.
(8) 등윤과 여거의 손침 제거 실패(AD256)
표기장군 여거는 물론 조정 대신들은 손준에 이어 손침이 전권을 잡은 것에 불만이었다. 여거가 주동이 되어 등윤을 승상으로 삼아 달라고 황제에게 간청했다. 손침은 등윤을 대사마로 임명하고서 얼마 전에 죽은 여대를 대신하여 무창에 주둔하도록 명령하였다. 여거는 등윤과 함께 손침을 몰아내기로 밀약하고서 군사를 일으켰다.(AD256) 손침은 즉각 군사를 발동하여 여거에게 반격을 가했다. 무창으로 가려던 등윤도 군사를 돌이켜 손침을 반역자로 규탄하고 건강으로 진격했다. 등윤과 그 군사는 손침 군사에게 패하여 등윤의 삼족이 멸족됐다. 손침은 대장군으로 승진하고서 병권을 장악했다.(AD256년 11월) 사촌 형 손헌 또한 손침을 죽이려고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하여 결국 자살했다.
(9) 손량의 손침 제거 실패와 손휴 옹립(AD258)
나이가 열다섯이 되어 황제 손량이 정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하자 손침이 걱정이 되었다. 병을 핑계로 하여 칩거하면서 친동생 손거에게 숙소의 방비를 맡기고 다른 친동생들에게는 병영의 수비를 부탁했다. 황제 손량이 저번에 사약을 내린 주공주 피살사건(AD255)의 재조사를 명령하자 겁에 질린 전공주는 자신은 그 일을 전혀 모르며 오히려 주거의 아들 주웅과 주손이 주동한 것이라고 둘러대었다. 손량은 주웅과 주손을 죽였다. 손침이 주웅과 주손은 죄가 없다고 변호했으나 황제는 듣지 않았다. 손침이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사실 황제 손량은 전공주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전공주와 손을 잡고 먼저 손침의 측근 주웅과 주손을 제거한 뒤 손침을 죽일 참이었다. 황제가 처남 전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 손침이 권세를 전횡하면서 나를 가볍고 어리게 취급한다.
황명을 거역하면서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덮어씌우며
조회에도 나아와 알현하지 않으니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다는 태도가 아니고 무엇이냐.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니 그를 잡아 들여야 하겠다.
경의 아버지(전상, 즉 황제의 장인)는 위장군이니
비밀리에 병사와 군마를 정비하도록 하고
내가 주작교까지 나아가면 그 때에 군사를 동원하여
일시에 그곳을 포위하여 손침의 군사를 무장해제하도록 하라.
이것은 극도의 비밀을 요하는 사항이니
어머니도 모르게 하라.“
전기는 황명을 아버지 전상에게 알렸는데 전상이 그만 손침의 사촌누나인 처에게 누설하고 말았다. 전상의 처는 즉각 손침에게 사람을 보내 알렸으며 그 즉시 손침은 군사를 일으켜 전상을 체포하고 그 다음 날 군사를 풀어 황궁을 포위하고 말았다.(9월26일) 황제 손량이 손침의 군사에게 완전히 포위되자 처 전황후에게 외쳤다.
“ 그대의 아버지는 바보 같아서 나의 큰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손량은 폐위되어 회계왕으로 강등되었고 전기는 자살했다. 전상은 귀양 보낸 뒤 자객을 보내 살해했다. 손침은 손량의 형 낭야왕 손휴를 황제로 세웠다. 그 때 손휴 나이가 23세였다.
(10) 손휴의 치밀한 계획과 손침 실각(AD258)
손휴는 손침에게 승상과 형주목이라는 직책을 주었다. 손침의 친동생 손은을 어사대부 및 위장군으로 삼았다. 여러 신하들이 황태자를 세우라고 독촉했으나 손휴가 급한 일이 아니라고 허락하지 않았다. 손침이 고기와 술을 가지고 손휴를 찾아갔으나 손휴는 선물을 받지 않았다. 손침이 화가 났다. 곁에 있던 부하 장포와 나누어 먹으면서 울분을 토했다.
“ 내가 아니었으면 황제를 꿈도 못 꿨을 놈이
나의 정성과 성의를 거절하다니.
마땅히 갈아치워야 겠다.“
장포가 그 원망을 그대로 황제에게 전했다. 황제 손휴는 당황하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했다.
먼저 손침에게 대장군과 후한 상과 직책을 내려 안심시켰다. 그리고 손침이 반란을 꾀한다고 보고한 사람을 손침에게 내려 보내 악의가 전혀 없음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손침이 점차 겁이 나서 조정에서 벗어나 무창 주둔을 자원하자 손휴가 그것을 허락하여 안심시키기도 하였다. 손침의 반란 소문은 그치지 않고 올라왔다. 손휴가 부하들에게 손침 처단 방법을 몰래 물었다. 연말 조정회의(납회)에 부른 다음 체포하자고 했다. 손침이 나올 리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여러 번 손침을 불렀다.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던 손침이 대담한 계책을 세웠다.
“ 여러 번 불렀는데도 나가지 않으면 오히려 의심만 더 할 뿐이다.
오히려 나가되 미리 군사를 풀어 승상부에 불을 지르고 도망 오면 된다.“
손침이 납회에 참석했고 계획대로 승상부에 불을 놓았다. 손침이 불을 끄기 위해 나가야 된다고 하자 황제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렸다. 황제는 주변에 있던 군사들에게 눈짓으로 체포를 명령하였다. 손침은 그렇게 잡혔고 목이 베어졌다.(AD258년) 손침의 모든 부하들은 용서받았다.
(11) 손휴 사망과 손호 등극(AD264)
손휴가 황제가 된 이후 몇 년간 오나라는 비교적 조용했다. 위나라에서는 어리석은 황제 조모가 황권회복을 한다고 설치다가 가충의 심복에게 피살되었고(AD260) 그 뒤를 이어 조황(나중에 개명하여 조환)이 원제로써 제위에 올랐다. AD262년에 손휴는 주씨를 황후로 책봉했고 아들 손완을 태자로 세웠다. 승상에는 복양흥을 임명하고 장맹과 맹종을 좌우 어사대부로 임명했으나 실제로 좌장군 장포를 가장 총애했다. 곧이어 촉한이 위나라 등애에게 멸망했고(AD263) 위나라에서는 촉한 정벌에 공훈이 컸던 등애·종회의 반란이 일어났다.
오나라 주군 손휴는 병으로 눕게 되어 입으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손으로 글을 써서 승상복양흥에게 아들 손완을 부탁하고는 곧 손휴가 사망했다. 나이 서른이었다. 오나라에서는 촉한이 망한 지 얼마 안 된 터라 불안하여 나이 많은 어른스런 주군을 원했다. 좌전군 만욱이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오정후 손호를 승상 복만흥과 좌장군 장포에게 강력하게 추천했다. 재주가 있고 나이도 들었으며(당시 23세) 책과 문학을 좋아하고 법도를 존중한다는 평가였다. 승상과 좌장군이 결국 주태후에게 손완 대신 손호를 추천하였고 주태후는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손호는 손화가 사약을 받고 죽었을 때(AD253) 함께 자살하지 않고 살아남은 하씨 소생이다.
(12) 손호의 복수의 폭정(AD265-AD280)
황제가 된 손호는 창고를 열어 가난하고 궁핍한 백성들을 살폈으며 선비를 우대하고 황실 동물원을 폐쇄하고 궁녀를 풀어 놓아 주는 등 선정을 많이 베풀었다. 따라서 사민은 물론 조정 신료들까지도 영명한 군주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아 손호는 감추었던 포악함과 교만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색에 빠지고 거칠었으며 난폭한 형벌로 백성들의 지탄을 받기 시작했다. 손호를 지지했던 승상 복양흥과 좌장군이 실망하며 한탄했다.
“아 우리가 사람을 잘못 봤구료.”
이 말을 엿들은 사람이 손호에게 밀고를 했다. 복양흥과 장포가 입조하는 날(AD264년11월1일) 체포하여 광주로 귀양 보낸 다음 도중에 자객을 보내 살해했다. 화가 난 손호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복양흥과 장포의 삼족을 이멸시키고 말았다. 손호는 태자였던 아버지 손화를 몰아내고 황위에 올랐던 작은 아버지 손량과 손휴에 대한 불만에 가득 차 있었으므로 그들의 가족도 가만 둘 수가 없었다. 직전 황제였던 경황제 손휴의 처 주씨(=주태후)를 죽이고 경황제의 아들들도 수색하여 처단했다.(AD265)
산기상시 왕번은 체질과 기상이 고상하고 반듯하여 황명을 어김없이 순종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 황제가 기뻐하지 않았다. 황제의 안색을 잘 살피고 기분을 맞출 줄 아는 산기상시 만욱과 중서승 진성이 질투하면서 왕번이 아마도 황제를 가볍게 여기는 것 같다고 참소했다. 때마침 술자리에서 왕번이 취하여 쓰러지자 황제는 왕번을 시험해 볼 요량으로 귀가해도 좋다고 명령했다. 왕번이 가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황제가 갑자기 그를 다시 불렀다. 왕번은 걸음걸이를 반듯하게 하고 말씨도 어눌하지 않아 전혀 취한 기색이 없었다. 황제는 왕번이 자신을 속이고서 술 취한 척 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왕번을 끌어내 궁궐 계단 아래에서 목을 잘랐고 머리를 호랑이 굴에 던져 버렸다.
손호는 사람들과 대면하는 것을 매우 혐오했다. 잘 만나지도 않았고 또 만나서도 모든 신하들은 눈을 내려 딴 곳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좌승상 육개(육손의 조카)가 나서서 말했다.
“ 군주와 신하는 서로 알아야 합니다.
만일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군주가 누군지 알지 못한다면
무슨 불상사가 생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손호는 육개에게만 대면을 허락했고 다른 사람들과는 예전과 같이 대면하지 않았다. 또 손호는 황문 환관들을 내보내 여러 주군을 돌아다니며 관리들의 딸들을 뽑아 올리도록 했는데 후궁 숫자가 1천 명이 넘었는데도 그치지 않았다.
손권시절 급사였던 환관 하정은 손호가 집권하자 누하도위가 되어 술과 곡식을 구매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돈과 물자를 만지게 되자 당연히 재물을 손에 넣게 되었고 이 재력을 바탕으로 황제 손호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좌승상 육개가 간악한 하정에게 이렇게 말했다.
“ 그대는 주군을 섬기면서 충성스럽지 못하여
나라 국정을 기우리고 있으니 어찌 천수를 누리기를 기대하겠소.
어찌 그리 간사한 일만 골라서 하시오.
먼지와 더러움은 하늘이 듣는 것이니 당장 고치도록 하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예측할 수 없는 화를 당하게 될 것이오.“
그 소리를 들은 화정이 분개하며 이를 갈았다. 육개는 황제에게 이렇게 고했다.
“ 화정은 믿고 쓸 수 없으니 의당 궁궐 바깥일을 맡겨야 합니다.”
그런 뒤 얼마 되지 않아 육개는 죽었다. 평소 육개를 곱지 않게 보던 황제는 하정의 참소에 따라 육개 가족을 모두 복건성으로 귀양 보내 버렸다.
환관 하정이 자신의 며느리로 이욱의 딸을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이욱이 허락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원한을 품은 하정은 황제에게 이욱을 모함했고 황제는 이욱의 목을 베었다. 개를 좋아하는 황제를 위하여 하정은 모든 장군들에게 개를 바치도록 했다. 개 값이 폭등했고 개를 묶는 목줄의 가격이 만전이 넘었다고 했다. 모두들 하정의 죄라고 질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그를 충성스럽고 부지런하다고 칭찬하면서 작위를 높여 주었다. 육항이 나서서 간신 하정을 물리치라는 간언을 올렸다.
“ 소인은 이치와 도리를 알지 못하고
생각 자체가 천박하므로 자기가 정성을 다 한다 하여도
올바른 일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간사한 마음을 품고서 황제의 기분을 맞추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사람에게서 무슨 훌륭한 일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AD271)
황제의 하정에 대한 총애는 전혀 식지 않았다. 손호가 폭정을 보이자 조정 중신들은 그를 제거할 모의를 일으켰다. 우승상 만욱, 대장군 정봉, 좌장군 유평 세 사람이 황제가 화리에서 유람할 때 건업으로 복귀하지 않음을 틈타서 거사하자는 예기였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들었으나 모른 척하고는 곧바로 건업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해 연말 연회가 있었을 때 몰래 독주를 준비해서 만욱에게 먹였다. 그러나 독이 든 것을 알고 있던 연회의 시종이 독을 덜어내어 만욱은 목숨을 건졌다. 유평 또한 독배를 들었으나 사전에 해독제를 준비했으므로 살아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독살 의도를 알아차린 만욱은 결국 자결했고 유평도 분함과 원망함으로 병이 나서 죽었다.
환관 하정의 국정 농단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중서령 겸 태자태부 하소(賀邵)가 긴 상소문을 올렸다.
“ 근래 조정의 관원이 분열되고 혼란하여
진짜를 말하는 사람과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섞이고
충신과 훌륭한 사람은 배척되며 믿음직한 사람은 해를 입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올바른 사람의 예리한 판단은 부서지고
용렬한 신하는 아첨하며
황제의 가리키는 것만을 좇아 시세를 맞추고 있습니다.
어긋나는 도리를 토해내고
청렴한 사람을 혼탁하게 만들고
충성스런 신하의 혀를 옭아매고 있습니다.
가까운 총신들은 매일 황제의 눈치만 살피며 황제의 뜻만 좇아
순응하는 말들만 쏟아내니 사람들은
이를 현명하고 착실한 정책이라고 아부를 늘어놓고
천하는 태평성대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신이 듣건대 나라를 일으키는 군주는 자신의 허물듣기를 좋아하며
황음·혼란한 군주는 자신의 칭찬듣기를 좋아한다고 하였습니다.
허물듣기를 즐기는 군주는 날로 허물이 줄어들어 복된 일에 이르고
칭찬듣기를 즐기는 군주는 칭찬들을 일이 줄어들어 결국 화에 이른다고 합니다.
폐하는 엄한 형벌로 곧은 말을 금지하시고
훌륭한 선비를 내쫓으시어 간하는 말씀을 막으시며
술잔을 돌리는 연회에서조차 목숨을 보장할 수가 없으니
벼슬을 하는 자는 물러나는 것이 다행스럽고
경사관인은 지방으로 나감이 복된 일이라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빛을 지키고 실마리를 넓히며(保光洪緖)
빛나고 융성하게 도를 밝히는 일(熙隆道化)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능력도 없고 비천한 하정을 폐하께서는 그의 아첨에 현혹되셔서
높은 권위와 많은 복락을 주셨습니다.
대저 소인이란 입궐할 때 반드시 간사한 이익을 탐하는 법입니다.
춘추좌전에 이르기를 나라가 흥할 때에는 백성보기를 간난아이 보듯 하며
나라가 망할 때에는 백성보기를 마치 흙더미나 검불처럼 본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법률은 점점 가혹해지고 부세는 날로 많아지며
환관과 총신들은 황제 주변에서 나날이 궁궐건축과 같은 큰 노역을 일으키니
장리들은 책임을 피하기 위해 백성들을 옭아매어 죄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흩어지고 한탄원망의 소리가 천지를 울려 천하 화목한 기운을 해치고 있습니다.
나라에 1년 먹을 곡식이 없고 집에서는 한 달 버틸 곡식이 없는데도
후궁에서는 일없이 앉아서 먹는 자가 만 명이 넘습니다.
바라옵기는 폐하께서는 기초와 근본을 두텁고 강하게 하시고
개인적 인정을 끊으시고 정도를 좇으신다면
성왕(周成王)과 강왕(周康王)의 치세가 일어나며
성조(聖祖, 즉 손권)의 운수가 융성할 것입니다.(AD272)“
하소의 피가 끓는 듯한 절절한 상소문을 들은 손호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마침 길을 가던 하소와 누현이 서로 만나서 반갑게 웃는 모습을 본 환관이 황제에게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면서 두 사람이 크게 비웃었다고 무고하자 황제는 두 사람을 귀양 보내 버렸다. 명망이 높은 하소는 곧 복직시켰으나 누현은 교지로 귀양지를 옮겼다가 바로 독살시켰다. 그 해에 하정은 악행이 드러나 참수되었다.
(13) 서릉전투의 승리와 육항의 간청
당시 오나라는 북쪽 진나라와 양자강을 두고 다투고 있었다. 오나라 서릉(의창) 감독 보천이 반란을 일으키고 진나라에 항복하자(AD272) 오나라는 진군대장군 육항을 보내 서릉을 포위했다. 육항은 육손의 아들이다. 육항(陸抗)은 좌대사마 시적이 죽자 양자강 상류지역 군사총책임자가 되었는데 황제의 군사와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육항은 황제에게 이렇게 상소했다.
“ 신이 듣건대 황제가 베푸는 은덕이 같다면
인구가 많은 나라가 이기고
힘이 비슷하다면 안정된 나라가 위태로운 나라를 이긴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적(晉)이 점령하고 있는 땅은 광대한 지역인데
우리는 밖으로 원조하는 나라도 없고
안으로는 잡풀만큼의 강함도 없는데도
정치는 문드러지고 지지부진하며 백성들도 평안하지 못합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장강을 끼고서
험준한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걱정이 없다고들 하는데
장강과 험산과 같은 이런 것들은 아주 작은 도움일 뿐이라서
지혜로운 사람들이 기대는 것이 못 됩니다.
신은 매번 나라의 위태로움을 생각할 때
밤새 베개만 어루만질 뿐 잠을 못 이루고 음식도 먹는 것을 잊을 뿐입니다.
임금을 섬기는 도리란 뜻을 거스를 지라도 속여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믿어
해야 할 일 17조를 올려 보고 드리나이다.“
육항의 17조가 무엇인지는 사료로 전해지지 않았으나 손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육항의 군대가 서릉을 포위하자 진나라에서도 거기장군 양호를 보내 응수했다. 소위 오와 진의 ‘서릉전투’였다. 이 전쟁에서 육항이 이끄는 오나라가 승리하고 진나라 양호나 서윤, 양조는 모두 북쪽으로 물러났다. 오나라 손호는 서릉전투의 승리를 자신의 정치에 대한 하늘의 뜻이라고 보고 오만한 폭정을 계속했다.
오나라에 이상한 징조가 보였다.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광주리에 담겨진 것이 여러 집에서 발견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길조라고 생각하여 황제가 시중 위소(韋昭)에게 물었다. 위소는 많은 사람의 집에 흔히 나타나는 일이므로 길조라 할 것이 없다고 폄하했다. 황제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당시 위소는 국사를 편찬하고 있었는데 손호가 아버지 손화의 제기(帝紀), 즉 황제의 기록을 써 달라고 요청했다. 위소는 손화가 비록 문황제라는 시호를 받기는 했으나 실제로 황제에 즉위한 적이 없었으므로 제기를 쓸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황제는 격노했다. 이 때 병이 들기도 했던 위소는 시중과 사관의 직책을 사양하고 물러나려고 했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주연이 있게 되자 손호는 모든 참석자에게 술을 7되 이상 마시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다른 신하에 대해 단점이나 조롱하는 말을 강제로 말하게 하였다. 술을 취하면 본심이 나타날 것이므로 강제로 취하게 하여 신하들의 본심을 보자는 목적이었다. 병중에 있던 위소에게는 평소 차를 마시게 했었으나 이번에는 위소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취한 위소는 다른 신하의 단점을 지적하는 것이 옳지도 않고 또 화목함을 깨는 일이므로 단점 대신 매우 까다로운 경전을 인용하여 그 모르는 것을 가지고 수치심을 갖도록 할 뿐이었다. 손호는 위소가 황제를 존중하지도 않고 황명을 따르지도 않는다는 명분으로 감옥에 가두고 말았다. 갇힌 위소는 자신의 억울함을 씻어 보이려고 황제에게 드리는 책을 저술했다. 그러나 그 책에 오래된 먼지가 묻어있다는 것을 꼬투리로 잡아 위소가 황제를 무시했다고 하여 위소를 주살하고 말았다.(AD273)
손호는 공경의 딸을 선발하여 6궁에 충당했는데 이를 어긴 집은 불경죄로 다스렸으며 간택이 끝날 때까지 전국의 모든 혼사는 중단되었다. 이 모든 일은 양황후가 주관하였는데 양황후는 키가 크고 피부가 흰 사람만 뽑았을 뿐 미인은 뽑지 않았다. 황제는 불만스러우 직접 뽑는 일에 나섰다. 공경의 딸은 3부인과 9빈으로 삼았고 이천석(장관급)과 장군의 딸은 그보다 급이 낮은 양인 이하로 삼았다.
손호가 아끼는 희첩이 사람을 시장에 보내 백성의 물건을 빼앗아 오게 한 일이 있었다. 사시중랑장 진성이 관련자들을 모두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진성 도한 손호의 총애를 받던 사람이었다. 희첩이 손호에게 울면 호소하자 손호는 다른 사건에 관련시켜 불에 달군 톱으로 진성의 목을 자르고 시체를 사망산 아래에 던져 버렸다.(AD273)
손호의 좌부인 왕씨가 죽자 슬픔에 쌓인 손호는 몇 달씩이나 바깥에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히 손호에게 변고가 일어났으며 손호와 모습이 비슷한 하도(손호의 외사촌)가 임금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조정 실권자에는 손호의 어머니 하씨 종족들이 특히 많았었다. 그러자 소문은 덧붙여져서 하도는 정통성이 없으므로 당연히 손분이 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들이 떠돌았다. 임해태수 해희가 회계태수 곽탄에게 조정의 정치를 한탄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 일로 곽탄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곽탄은 해희의 조정정책 비판만 전했을 뿐 손분에 관한 쿠테타 예기는 일체 하지 낳았으므로 결국 방면되었으나 해희에게는 체포령이 떨어졌다. 군사를 가지고 있던 해희가 저항해보았으나 결국 부하들에게 잡혀 잘린 목이 건강으로 보내졌다. 손호는 소문이 떠돌던 손분과 그 가족을 모두 죽였으며 손분의 죽은 어머니 묘소를 정돈한 장준의 삼족을 이멸시켰다.(AD274)
병이 들자 나라가 걱정이 커진 육항은 황제에게 편지를 올렸다.
“ 선친(육손)께서 말씀하시기를 ‘서릉지역은 나라의 서쪽 문이니
지키기도 쉽지만 도한 잃기도 쉬운 곳이다.
이곳을 지키지 않으면 형주를 잃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온 나라를 기울여서도 찾아야 할 것이다.‘
서릉(의창)지역 방위군을 8만 명으로 보강하시고
여러 잡다한 국가 업무를 줄이시어
힘을 합쳐 방어에 매진하셔서 저의 걱정을 덜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시면 진실로 염려스럽습니다.
신이 죽은 뒤라도 서쪽(서릉지역)에 관심을 두십시오.“
그리고 육항은 죽었다. 황제는 서릉지역의 통할권을 육항의 다섯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육항의 군사력을 보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산시키고 약화시켰기 때문이다.(AD274)
중서령 하소는 중풍에 걸려 말을 잘 할 수가 없게 되자 몇 달 동안을 조정을 떠나 일을 처리하지 못했다. 손호는 하소가 자신을 속이는 것으로 의심했다. 그를 체포하여 술 창고에 가두고서는 1천여 번 이상 말을 하라고 고문했다. 끝내 말을 못하자 불에 달군 톱으로 머리를 잘랐고 그의 가족들도 임해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귀양 와 있던 누현의 가족들도 이 때 피살되었다. (AD275)
손호의 폭정은 그치지 않고 계속 되었다. 가뭄이 들어 부세를 면제해 주기를 요청한 회계태수 차준을 효수하였고 인두세가 부적절하다고 거부한 상동태수 장영도 참수했으며 몇 마디 간언을 올린 상서 웅목 또한 칼자루로 때려 죽였다.(AD276)
손호는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을 질투하여 배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시중이자 중서령인 장상은 말이 민첩하고 분명하였으므로 황제가 질투와 원망을 느끼던 사람이었다. 손호가 장상에게 물었다.
“고가 술을 먹는 것을 누구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장상이 이렇게 대답했다.
“ 200되 정도의 주량이십니다.”
손호가 말했다.
“ 너는 왕 노릇도 못한 공구(즉 공자)와 나를 견주는구나.”
공자 주량이 약 200되 쯤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화가 난 황제가 즉시 장상을 가두어 버렸다. 공경 이하 100여 조정 신료들이 모두 나와 전 아래 꿇어 엎드려 사죄하며 용서를 빌었다. 황제는 장상을 풀어주고 건안에서 배를 만드는 일에 복역시켰다가 곧 사약을 내려 죽였다.(AD278)
(14) 진나라 사마염의 통합과 용서와 화해의 정치
당시 북쪽에서는 사마염이 조조가 세운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진(晉)을 건국(AD265)하여 부현, 이희, 양호라는 걸출한 충신들의 도움을 받아 개혁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때였다. 특히 사마염은 처음으로 간관(諫官)이라는 제도를 도입하여 무슨 말이든 거리낌 없이 황제에게 할 말을 하도록 하고서 산기상시 부현과 황보를 간관에 임명하였다. 부현은 이렇게 사마염에게 말했다.
“ 아직도 장차 깨끗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예의를 갖춘 신하를 선발하지 아니하시고
기강과 풍기 및 절도를 돈독하게 하지 않으시며
공허하고 비루한 인사를 물리치시지 않으시고
근신하지 않는 인사를 징계하시지 않으시니
신은 이를 심히 걱정하옵니다.“
사예교위 이희가 관료들의 비리행위를 맹렬히 탄핵하고 나섰다. 현령 유우와 전상서 중산왕 사마목과 상서복야 무해가 관청의 공공 경작지를 훔쳤다고 비판했다. 사마염은 이희를 전한시대 직언을 올리는 사직(司直)의 전설과 같은 양포(兩鮑, 즉 鮑永과 鮑恢)와 같다고 칭찬하고 관련자를 전부 처벌하도록 하였다. 사마염의 작은 할아버지 사마목의 관직을 파면하고 이미 죽은 무해는 시호를 깎아 내렸다.
진의 대사마 석포는 제갈탄의 반란(AD258) 진압 이후 10년 동안 회남지역에 주둔하면서 선정을 펼쳐서 명망과 평판을 높이 쌓아왔었다. 회북지역 감군(군사책임자) 왕침이 이런 석포를 질투하여 사마염에게 참소를 올렸다. 석포가 오나라와 내통한다는 것이다. 이 때 오나라 또한 북쪽을 넘보고 있던 터라 석포도 보루를 쌓고 하수를 막아서 대비를 하던 참이었다. 사마염은 그런 석포의 행위가 의심이 갔다. 진나라 최고의 충신 양호(羊祜)가 황제에게 간곡히 말했다.
“ 단언컨대 석포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황제 사마염은 양호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곧바로 의양왕 사마망에게 군사를 주어 보내 석포를 소환하게하고 그의 관직을 삭탈했다. 쓸데없는 공사를 일으켜 백성을 힘들게 했다는 죄목이었다. 석포의 참모 손삭은 지나가다가 친구인 사마준의 병영(허창에 있었음)을 들렀는데 거기서 조정의 군사가 석포를 소한하기 위해 발동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마준은 석포의 일에 손삭이 끼어들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손삭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석포가 있는 수춘으로 말을 달렸다. 그리고 석포에게 당신이 지금 조정의 의심을 받고 있으니 당장 수춘도정(행정중심)에 나가서 석고대죄 하라고 충고했다. 석포는 손삭의 말대로 따랐고 황제 사마염이 그 말을 듣고 의심을 풀었다. 업으로 소환된 석포는 낙릉공의 신분으로 안전하게 귀향했다.(AD268)
(15) 진나라 양호의 오나라 정벌과 오 멸망(AD280)
오나라 손호의 폭정이 거듭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오의 운명이 거의 다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마염은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오나라 정벌 계획을 병으로 누어있는 양호에게 장환을 보내 물었다. 양호가 대답했다.
“ 손호는 포학함이 심하여 지금은 싸우지도 않고 이길 수가 있습니다.
만약 손호가 죽게 되어 오의 사람들이 영명한 군주를 세운다면
백만 대군을 가지고도 장강을 넘볼 수가 없을 것이니
장차 후환이 클 것입니다.“
양호는 장환에게 모든 것을 당부하며 말했다.
“ 내 꿈을 이룰 자는 그대뿐이요.”
황제 사마염은 누워서라도 오나라 정벌의 선봉에 서주기를 바랐다. 양호가 말했다.
“ 오를 빼앗는 일에 반드시 제가 갈 필요는 없습니다.
평정되고 나서 성스러운 수고를 더하셔야 할 것입니다.
공명에 관해서는 소신이 뜻이 없으니
일이 끝난 뒤
부디 훌륭한 인재를 잘 살펴 임명하십시오.“(AD278년 6월)
그 다음해(AD279) 8월 익주자사 왕준이 오나라 정벌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청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7년이나 준비했던 배 조차 썩어가고 있다는 보고였다. 사마염도 속으로 내년쯤 공격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오나라에서도 북진정책을 쓸 생각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두예는 서둘러야 한다고 편지를 올렸다. 장화와 바둑을 두던 중에 두예의 편지를 읽은 사마염이 아무런 대꾸가 없자 장화가 말했다.
“ 의심하지 마십시오.“
드디어 사마염이 즉각 오 정벌에 나서기로 마음을 굳혔다.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가충, 순욱, 풍담 등이 전쟁에 반대했다. 황제가 크게 화를 내자 전쟁에 반대하던 자들이 모두 관을 벗고 꿇어앉아 사죄했다. AD279년 11월 사마염은 총 20만의 대군을 몰아 내려왔다. 사마주는 장강의 동쪽, 왕준은 서쪽, 두예는 의창, 호분은 하구, 왕융은 무한, 왕혼은 환성 등 여섯 지역으로 나누어 동시에 남하했다. 그리고 석 달 뒤 AD280년 3월 오나라 수도 건업이 왕준의 군사에게 함락되고 손호는 진나라에게 항복하였다. 사마염은 이 모든 전공이 양태부(양호)의 것이라고 치하했다. 가충은 특히 여러 번 전쟁을 반대하고 거짓으로 진격하라는 황명을 바꾸어 군사행동을 중지하라고까지 했으나 사마염은 모두 죄를 묻지 않았다.
진나라 표기장군 손수는 10년 전 진나라로 귀화했었는데 사촌 형 손호의 오나라가 멸망하자 축하하지 않고 혼자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옛날 토역장군(손책)은 약관의 나이에
교위라는 신분으로 창업했는데(昔讨逆弱冠以一校尉创业)
뒷날 주군이 강남지역을 통째로 버려(今后主举江南而弃之)
종묘와 산릉이 폐허가 되었구나.(宗庙山陵,于此为墟)
유유한 하늘아 저것이 무슨 인간이냐(悠悠苍天,此何人哉)!“
(16) 오나라 멸망의 근본 원인 : 손권 손호의 분열과 복수정치
오나라는 건국한 지 50년, 창업자 손권이 죽은 지 4대 28년 만에 망했다. 물자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지형이 험준하지 않아서도 아니며 또 충신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오로지 군주 때문이었다. 손권이 태자 손화를 폐위시킨 것이 첫 번째 잘못이었다. 공신 중의 공신 육손이 반대한 것을 묵살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총애한다는 이유만으로 첩 반씨의 나이어린 아들 손량을 세움으로써 오나라 조정의 분열과 갈등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 손권의 잘못이었다. 10살 손량이 즉위하자 조정의 실권은 암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제갈각, 손준, 손침으로 옮겨갔다. 나이가 들면서 황제 손량이 황권을 되찾을 생각을 하자 손침은 즉각 황제를 여덟 살 위인 형 손휴로 바꿔 버렸다. 그러나 손휴는 자신을 밀어 준 손침을 제거하고 황권수복에 성공했지만 얼마 있지 않아서 병사하고 말았다. 조정대신은 손권의 적통이었던 손화의 유인한 생존 아들 손호를 황제로 모셔왔다. 그러나 손호는 향락에 빠짐과 동시에 복수에 타오르는 분노정치로 여러 충신을 무참하게 처형하는 공포정치를 이어갔다. 안으로부터 분열과 폭정으로 무너진 오나라 조정은 진나라의 전쟁 개시 불과 석 달 만에 수도가 함락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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