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의 나무 사랑 꽃 이야기(16) 오래오래 피는 여름 꽃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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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 번씩 이 칼럼에 글을 쓰면서 저의 식물 관찰 습관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종전에는 산에 오르든 공원이나 천변 산책로를 거닐든 나무나 풀꽃들이 어떤 새로운 변화를 선물할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관찰하는 편이었는데, 다음 주에 어떤 나무나 꽃에 대해 쓸까 하는 생각이 앞서다보니 특정한 나무나 꽃들이 개화하기를 기다리며 시기가 다가오면 그 식물들을 찾게 되는 경향이 생겨난 것입니다. 자연스런 관찰을 선호하는 제게는 좀 부담스런 변화인 셈입니다.
여하튼 그런 욕심 때문에 여름이 깊어가는 걸 느끼면서 이 꽃을 기다려 왔습니다. 배롱나무. 이름에 조금 이국적인 냄새가 나는 듯한 나무이지만 알고 나면 많은 분들이 사랑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이 꽃을 여름을 대표하는 꽃이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나무의 다른 이름은 ‘나무백일홍’이지요. 百日紅, 백일 동안 홍색 꽃을 피운다는 뜻입니다. 그 백일홍을 빠르게 부르다가 배롱이 되어 버렸다는 설이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이번에 다룰 다른 여름 꽃은 無窮花입니다. 우리나라 국화로 지정되어 있지요. 그런데 여름에 피는 꽃들은 왜 그 이름에 이렇게 오래오래 핀다는 뜻을 담고 있을까요. 백일 동안 핀다든지, 혹은 끊임없이 핀다든지. 이른 봄 피는 대표적인 꽃인 벚꽃이 기껏해야 열흘을 넘기기가 어려운데 말입니다. 과학적인 소리는 아닙니다만 저는 여름에 피는 꽃들이 봄부터 잎을 내밀고 광합성을 하면서 영양분을 축적해 왔기 때문에 오랫동안 꽃을 피우는 힘을 가질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여름에 사람들의 눈을 끄는 또 다른 여름 꽃인 능소화도 참으로 오래오래 꽃을 피우는 걸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무궁화와 능소화 두 꽃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곳곳에서 개화하기 시작한 사진을 찍어두었는데 마지막 그것도 대표선수 격인 배롱나무 꽃을 올해는 오래 기다린 셈입니다. 마침내 저의 동선 중에 가장 가까운 원불교 교당 옥상에서 지난 7월 26일 이 꽃을 만났습니다. (이미 다른 곳에서 개화한 소식을 전해주신 분도 있었습니다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배롱나무는 그 이름 때문에 어딘지 조금 낯선 나무 같지만, ‘선비가 사랑한 우리 나무’를 쓰신 강판권 선생님에 의하면, 우리 조상님들 때부터 매우 사랑받아 온 나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제가 다녀본 유서 깊은 곳들 중에서 선비들의 고택이나 서원, 향교 등에는 어김없이 이 나무가 심어져 있었습니다. 논산 명재고택, 안동 병산서원, 강릉 선교장 등이 대표적인 곳들이지요. 병산서원에는 수령 380년 된 배롱나무가 안동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옛 선비들은 배롱나무가 그 붉은 빛 꽃을 줄기차게 피운다고 해서 ‘忠을 표출하는’ 것으로 생각했는가 하면, 그 매끈한 줄기는 속의 모습을 그대로 밖으로 드러낸 이미지로 받아들여 (다른 나무들은 두꺼운 껍질로 속을 가리는 데 비해서) 선비들 스스로의 최고 가치로 삼아온 ‘表裏一致’를 상징하는 것으로도 여겼습니다. 참으로 본받을 만한 나무로 여긴 것이지요. 강판권 선생님은 우리나라에 심어진 배롱나무로서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나무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논산의 성삼문 묘, 부산진의 동래 정씨 시조 묘 (천연기념물 168호 지정), 대구의 신숭겸 장군 표충단 등에 심어져 있는 배롱나무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가깝게 사시는 분들은 바로 이 시기에 찾아보실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아쉽게도 지금은 이 나무들의 가치는 그 관상 가치밖에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선, 우리의 주거 생활이 복합 주거단지가 되면서 뜰에 심어진 나무라는 개념이 사라져가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실은 잘 살펴보시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 안에 우리 옛 조상들이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면서 사랑해 오던 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는데 그 의미들이 잘 살아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옛 의미들을 되살리지는 못하더라도 그 나무들이 주는 현대적 가치라도 (삭막함을 덜어주는 정서적 가치, 그늘을 제공해 주는 가치, 그리고 관상 가치까지) 함께 공유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기실 요즘 아파트단지에서는 나무들에서 떨어지는 열매, 낙엽, 그리고 큰 나무에서 울어대는 매미 소음 등을 이유로 나무들을 싹둑 베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보는 저의 심정은 참담해지곤 합니다.
배롱나무는 우리나라에서만 사랑받는 나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나무가 주는 아름다움 때문이겠지요. 중국정부의 영빈관 격인 조어대 안에 피어 있는 홍색, 자색, 흰색 세 가지의 배롱나무의 아름다움은 저의 기억 속에 오래오래 남아 있고, 일본 동경의 거리에서도 프랑스 수목원 정문에서도 이 나무는 경관을 높여주는 나무로 다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국화로 지정되어 있는 무궁화를 모르는 분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릴 때 숨바꼭질 놀이 노래로도 기억하고 있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그 꽃을 쉽사리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대부분의 공원이나 대학 캠퍼스, 아파트 단지, 공공기관 정원 등 어느 곳에서나 심어져 있지만 쉽게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를 안타까워해서인지 서울 외곽의 한 지방자치단체는 국도변을 따라 가로수처럼 심어놓은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저는 여의도공원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주변에 심어져 있는 무궁화가 참으로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키가 크지 않은 무궁화가 다른 나무들과 경쟁하는 자리에 놓이면 눈에 띄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역사적 의미를 담은 곳 주변을 중점적으로 무궁화로 장식하는 방법이 효과적일 것 같다는 말씀이지요.
재미있는 점은 위에서 언급한 중국 북경의 조어대 안에서도, 프랑스 뫼동에 있는 로댕 미술관의 정원에서도 무궁화가 제법 의미 있는 자리에 심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기분이 좋아진 것은 물론이지요.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나무는 능소화입니다. 이 꽃도 여름 내내 핍니다. 능소화는 덩굴나무가 피우는 꽃 중에서 덩굴장미 다음으로 사랑을 받는 나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덩굴나무이기에 약간의 멋을 부리기에도 좋은 나무입니다. 치렁치렁 드리워진 가지 끝에 핀 주황색 꽃은 참으로 사랑스럽지요. 저는 이 꽃들이 호남지방의 시골집 대문 옆 담벼락 너머로 피어서 그 집 대문을 장식해주는 모습을 매우 좋아해서, 집 주인의 품격을 높아준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위에 올린 문형산 기슭의 주택가에 심어진 능소화 사진이 비슷한 이미지를 줍니다.) 비슷한 이미지는 남원의 광한루원 담장 너머로 피어 있는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능소화도 세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나무입니다. 작년 7월 한 달간 프랑스 파리에 머물 때 곳곳에서 보았지만, 가장 인상적인 모습은 교외도시 뫼동의 로댕미술관을 찾아가면서 만난 능소화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늘어진 모습을 잘 살려서 작은 예술품을 만들었다는 인상을 가졌었습니다.
아참! 배롱나무는 과연 백일 동안 꽃을 피울까요? 그리고 배롱나무와 무궁화 중에 어느 꽃이 더 오래 필까요? (우리나라 수도권을 기준으로 해서 말입니다.) 이 숙제를 풀기 위해서 저의 사진 데이터베이스 6년치를 살펴보았는데 아쉽게도 배롱나무는 7월 중순에서 9월 중순 정도 두 달 정도에 걸쳐 발견되는 반면에, 배롱나무보다 더 일찍 개화하는 무궁화가 제법 의연하게 마지막으로 꽃 피운 모습의 사진은 가을이 제법 깊어간 9월 21일이었으니 오래 피는 것으로는 무궁화가 배롱나무를 살짝 누르는 것 같습니다. 그 이름에 걸맞은 결과일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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