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딜 대해부<제3부> 실패한 경제, 성공한 개혁 (1)불안한 2차 뉴딜 성과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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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FDR이 반대한 뉴딜, 보너스 법(The Adjusted Compensation Payment Act 1936)
(참전보훈의 보상문제)
제1차 대전 이전까지는 참전용사에 대한 보훈은 일정 규모의 토지와 금전적 보상으로 이루어졌다. 독립전쟁의 일반 병은 40 헥트아르(약 12만 평)와 $80 이었고 장군은 450 헥트아르가 제공되었다. 남북전쟁 직전 보훈규정이 대폭 완화되어 대규모의 토지가 참전용사에게 지급되면서 토지부족 현상이 발생하게 되자 현금만 지급하는 제도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1890년 이후 일어난 미-스페인 전쟁과 제1차 대전 참전 용사들은 제대로 된 보훈혜택을 받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참전용사들은 미국향군회(the American Legion,1919)를 결성하고 정치적인 압력을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미국향군회의 강력한 항의를 반영하여 의회는 제1차 대전 참전용사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는 법안 수차례 제출하였으나 집권 공화당 상원이 번번이 부결시키거나 혹은 하딩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1922년 9월 19일 상하 야원을 통과한 법에 대하여 하딩이 거부권을 행사하자 하원은 즉시 재의결(258:54)했지만 상원의결에서는 2/3에 4석이 모자라 결국 폐기되었다.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법안에 대하여 국가재정건전성만 고집하는 대통령 및 보수 공화당 상원의원에 대한 반감이 진보적인 공화당 상원의원 중심으로 일어났다.
참전용사에 대한 현금지급을 강력 반대하는 대통령과 상원의원이 버티고 있는 한 입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지지파들은 현금지급 대신 미래지급, 즉 미래에 현금화할 수 있는 증서 등의 혜택을 제공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입법안을 제출하였다. 상하 양원을 통과하고 제출되었지만 1924년 5월 15일 쿨리지 대통령은 ‘사고파는 것은 애국행위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의회는 곧바로 재의결하여 5월 19일 법안으로 확정되었다. 이것이 WWACA 1924(The World War Adjustment Compensation Act 1924)이다.
이 법은 국내전쟁 참전용사에게 참전일 하루 $1, 최대 $500, 국제전 참전용사는 하루 $1.25, 최대 $625 을 지급하되, $50 이하는 즉시 지급하고 나머지 금액은 20년 뒤에 지급하는 참전증서를 제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약 37만 명에게 $36억 4천만 달러가 지급되었다. 참전용사들은 지급받은 참전증서를 담보로 22.5%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었으나 대공황이 발생하자 1931년 대출한도를 50%로 늘렸다. 참전용사들은 지급시작 기간을 20년에서 앞당겨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보너스 군단 the Bonus Army 폭동 , 1932년 7월)
1차 대전 참전용사 17000명과 가족 등 43000명은 1932년 초부터 1차 대전 참전 용사 전쟁보상금 지급문제로 소동을 부리고 있었다. 스스로를 보상금 탐험대(The Bonus Expedition Forces)로 부르면서 정부의 정당한 보상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이런 요구를 받아들여 하원은 20년인 참전증서의 지급기간을 앞당기는 라이트-패트맨 보너스 법안(the Wright Patman Bonus Bill)을 1932년 6월 15일 통과시켰지만 이틀 뒤 6월 17일 상원에서는 62:18로 부결시켰다. 후버 대통령과 공화당의 입장은 재정 부담이 커지고 경제회복에도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였다.
2만 5천의 군중들이 DC 거리로 나서서 법안 부결에 항의하는 시위를 했다. 수도에서 일어난 최대의 반대시위였다. 그들이 공공건물을 장악하고 장기 농성에 들어가자 DC 경찰이 농성자를 강제로 철거하는 과정에서 폭동이 7월 28일 발생하여 2명이 총상으로 사망했다. DC경찰은 연방정부의 지원을 요청하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진압군으로 진주하여 거의 폭압적으로 농성자들을 진압하여 비판을 받았다.
(FDR과 보너스 법 1936)
FDR은 1932년 대선기간 동안 보너스 군대의 요구에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인 1933년 5월 에 농성자를 위한 특별 캠프를 인근 포트 헌트(Fort Hunt)에 열어주고 1일 삼식 및 교통편의를 제공했다. 그리고 수시로 관리를 보내 중재를 시도햇고 영부인 엘레아노 역시 개인자격으로 단독으로 행군지도부를 찾아가 점심을 같이 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당시 농성자들은 후버는 군대를 보냈고 FDR은 부인을 보냈다고 칭찬했다. FDR은 민간보호사업단(CCC)를 통해 일자릴 제공함으로써 문제를 풀 생각이었지 농성자들의 조기지급요구에는 냉담했다.
1935년 5월 22일 상하 양원이 참전용사의 요구를 담은 법 즉 The Patman Greenback Bonus Bill 1935 을 의결하여 대통령의 서명을 요구했지만 FDR은 거부하고 하원의장에게 법안을 서명 없이 돌려보냈다. 하원은 그날 즉시 찬성 322 반대 98로 재의결하였다. 그 다음날 상원의결에서는 찬성 54 반대 40으로 4석이 부족하여 법안은 부결되었다. FDR이 거부권을 행사한 이유는,
· 장차 다른 집단들의 유사한 요구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고
· 당장 시급히 필요한 재난지원이라고 볼 수 없으며
·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대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상하원은 1936년 1월 22일 약간 수정된 형태의 보너스 법(The Adjusted Compensation Payment Bill)을 의결하여 다시 FDR에게 보냈다. 이틀 뒤인 1월 24일 FDR은 예전처럼 거부권을 행사했다. 하원은 당일 찬성 324 반대 61로 재의결했고 사흘 뒤 상원도 찬성 76 반대 19라는 압도적 의결로 법을 확정시켰다.
(법의 내용)
이 법의 주요 내용은 기존 발행한 참전증서를 재무성이 발행한 액면 $50의 재무증서로 교체하고 언제라도 현금화할 수 있도록 했다. 현금화 하지 않고 보유하는 경우 연 3% 이자를 지급하였다. 재무증서 발행총액은 $17.45억이었는데 1년 사이에 약 80%가 환불받아갔다. 뉴딜의 다른 공공일자리 프로그램보다 매우 신속하게 현금이 지급되었으므로 경기회복 효과도 훨씬 컸으나 FDR은 이 법에 대해 끝까지 거부권을 행사했다.
<21> 불안한 제2차 뉴딜의 성과 : 1935년과 1936년 경제
제2차 뉴딜정책이 실행된 1935년 이후 1936년까지 연방정부의 지출은 1934년에 비해 53%(140.9->215.1)나 늘었다. 제1차 뉴딜 정책 2년 동안 연방지출이 60%(88.0->140.9)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금액으로는 제2차 뉴딜의 증가폭이 제1차 뉴딜보다 약 40%(74.2/52.9)나 많은 금액이다. 경제의 대부분 지표들이 제1차 뉴딜 때(1933-1934) 보다는 제2차 뉴딜 때(1935-1936) 더 나아졌다. 불변 GDP도 2년 동안 12.3% 증가에서 26.9% 증가로 나아졌고 소비도 12.3%에서 26.9%로 좋아졌다. 특히 내구소비재 소비는 제1차 뉴딜 2년 동안 10.7% 증가했으나 제2차 뉴딜 때에는 48.9%나 증가했다. 전체 투자는 큰 차이가 없었으나 설비투자나 주택투자는 제1차 뉴딜 때 보다는 제2차 뉴딜 때 확실히 나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1936년의 경제지표들은 1929년 수준을 따라잡지 못했다. 불변GDP는 81.1, 내구소비는 89.5, 설비투자는 82.1, 그리고 주택투자는 54.9에 불과했다. 제1차 뉴딜과 제2차 뉴딜의 4년 동안 연방지출은 145%나 증가(88.0->215.1)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회복은 매우 더디었다.
<22> 다시 불거지는 노사불안 1936년-1937년
FDR이 집권한 1933년 이후 3년 동안 실질경제성장률은 10%대로 올라왔지만 1935년 경제상황은 여전히 1929년에 비해 크게 못 미쳤다. 실질GDP는 1929년의 71%에 불과했고 내구재소비는 73%, 설비투자는 60% 주택투자는 44%에 불과했다. 실업자는 7백만 명을 넘어서면서 실업률이 여전히 14%를 유지하고 있었다. 실업자의 불만은 물론 취업자들도 고용상태나 처우에 불만이 쌓여있었다. 1934년의 전국적인 노사분규에 이어 1935년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1935년의 노동환경은 1934년과 매우 다르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히치맨의 원칙, the Hitchman’s doctrine, 1917)
미국 대법원은 1917년에 내려진 최종판결에서 소위 히치맨 원칙(the Hitchman’s doctrine)을 처음으로 세웠다. 그 판례는 노조가입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고용을 허락하는 계약(yellow dog contract)은 연방법원이 간여할 문제가 아니라 불법이라 할 수 없다는 판결이었다. 이 원칙에 입각하여 근로자들은 사용자의 사전 허용 없이 노조에 가입하는 것이 매우 힘들어지게 되었다. 노사분규가 곳곳에서 발생했고 연방법원은 이 원칙에 입각하여 노사분규를 금지시키는 집행명령을 내렸다.
(노리스-라가디아 법(The Norris La Guardia Act 1932))
1932년 노리스 상원의원(공화당)과 라가디아 하원의원(공화당)은 연방법원이 히치맨의 원칙에 따라 노사분규금지 명령을 남발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입법안을 제출하여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통과시켰다. 이 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노조 불가입을 전제한 고용계약은 연방법상 불법이며,
· 근로자는 아무런 개입 없이 노조가입권리가 있으며,
· 평화적인 노사분규에 대해 연방법원은 정지 조치를 내릴 수 없다
(국가노동관계법의 제정)
게다가 1935년에는 국가노동관계법(NLRA 1935)이 통과되어 근로자의 노조결성과 단체행동권이 법적으로 부여되었다.( 위<19> ③ 참조) 즉, 국가노동관계법 7조(a)에 따라 근로자는 단체협약권과 단체행동권을 갖게 되었으므로 아무런 법적 장애 없이 노사분규를 일으킬 수 있었다.
① GM 싯-다운 대파업(The GM Great Sit-Down Strikes, 1936-1937)
국가산업부흥법(NIRA) 의해 노조가입과 평화적 파업이 자유화 되자 전국적인 파업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 흐름은 주로 철강 산업과 자동차 산업이 발달한 중서부에서 일어났으며 이 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CIO(The Committee for Industrial Organization)의 존 루이스였다.
존 루이스는 광산촌에서 태어나 광부출신으로 20대 중반이던 1906년부터 미국광산근로자연맹(The United Mine Workers of America)과 CIO를 주도해 온 사람이었다. 공화당을 지지해 왔으므로 쿨리지 정부 때 장관을 제안 받을 정도로 리더십과 재능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1932년 대선에서 노조의 지지를 받고 대통령이 된 FDR도 루이스와 그의 지지자들에게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루이스 또한 FDR 정부의 노동정책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루이스는 광산업에서 나아가 자동차산업의 노조결성에 매우 적극적이어서 1935년 전국자동차연맹(The United Auto Workers, UAW)을 창설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고 1936년에는 철강근로자조직위원회(The Steel Workers Organization Committee, SWOC)를 조직하여 흩어져 있는 여러 노조조직을 결합하였다. 루이스와 그의 UAW 부하들은 GM의 자동차 공장의 노조 결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두 노조원의 해고를 단초로 1936년 12월 30일 GM자동차의 차체를 제작하는 클리브랜드의 피셔 공장에서 파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GM의 전국 공장이 요구조건을 동시에 수락하지 않는 한 파업을 종료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UAW계획은 곧바로 또 다른 차체 제작공장인 디트로이트의 피셔공장을 봉쇄함으로써 GM의 모든 자동차 생산을 중단 시킬 생각이었다. GM이 그 정보를 입수하고 차체공장 설비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자 UAW는 계획을 앞당겨 당일 디트로이트 플린트 공장의 싯-다운 파업을 시작하였다. 싯-다운 파업이란 불법으로 작업장을 점거하여 공장을 가동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파업이다. 파업 주도자들은 2천여 명 농성자를 관리하는 조직을 내부적으로 만들어 정보제고, 행동강령, 질서유지, 오락 및 자체 재판결정 등 체계적으로 파업을 관리하였다. 왜냐하면 평화적인 파업만 NIRA 7조(a)가 보장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진보적인 인물이 주도하는 지방정부 또한 식자재와 소요 물품들을 들여놓아 주어 장기간 버틸 수 있었다.
1937년 1월 11일부터 여러 차례 경찰병력이 투입되어 다소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농성파업자들이 성공적으로 막아내면서 농성이 장기화되었다. 부통령 낸스(John Nance)는 연방병력을 동원하고자 했으나 FDR이 반대했다. FDR은 GM이 노조의 요구를 들어주기를 바랐다. 법원의 2차 파업중지 명령마저 노조가 거부하면서 UAW지도부는 GM의 다른 공장도 파업에 동참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마침내 GM이 노조의 요구를 수락하면서 44일 만에 파업이 끝났다.
(파업 결과)
근로자들의 노조가입과 급여가 5%인상되었으며 점심시간에 노조원의 노조활동에 대한 의견교환이 허용되었다. 전 GM 공장의 10만여 명은 물론 FORD 직원까지 노조에 가입하게 되면서 UAW 가입자는 50만 명이 넘게 되었다.
② 1937년 소규모강철회사 파업(The Little Steel strike of 1937)
1937년 3월 13일 미국 최대 철강회사 US Steel이 SWOC와 표준화된 급여스케줄, 일일 8시간 노동, 오버타임 1.5배 지급 등을 내용으로 하는 단체협약을 맺겠다고 계약하였다. 그러나
리틀-스틸이라는 중소형 철강회사가 네 개(Republic, Inland, Youngstown, Bethlehem)는 그 계약에 서명을 거부하였다. 1937년 초 GM의 싯-다운 파업에서 대성공을 거둔 존 루이스와 CIO는 철강회사의 노조 결성을 위한 파업을 계획하였다. 리틀 스틸에서는 첩자를 SWOC에 침투시키고 독가스와 화약과 사립경찰과 식량을 비축해 장차 있을 충돌을 대비했다. 그리고 회사 내 노조원들을 수 백 명 해고시켰다.
리틀-스틸의 총파업은 1937년 5월 26일 촉발되었다. 약 6만 7천명 근로자들이 파업에 나서면서 산발적인 폭력이 발생했다. 수 천 명 파업근로자들이 수감되었고 3맥여명의 부상자와 18명의 사망자까지 발생했다. 파업은 약 5개 월 가량 지속되었지만 큰 성과 없이 파업이 끝나고 말았다.
리틀 스틸 노조가 파업에 성공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진압이 매우 강경했다. 1936년과 1937년 경제가 가라앉고 있어서 철강 산업의 경영상태가 좋지 않았다. 따라서 리틀-스틸로써도 무리한 노조의 요구를 마냥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강경대응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파업 지도부가 강공 일변도의 정책을 고수하면서 파업행위가 너무 위험하여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23> 재계에 등을 돌리는 FDR (1936년)
(FDR의 매디슨-스퀘어 가든 연설(1936년 10월 31일))
FDR은 대통령선거일(1936년 11월 2일)을 사흘 앞두고 뉴욕 매디스 스퀘어 가든에서 연설했다. 유명한 ‘그들의 증오를 환영한다(I welcome hatred.)“는 연설이다.
연설 시작 직전 관중은 FDR에게 약 15분간 기립박수를 보냈다. 한 참을 기다린 FDR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권 이후의 뉴딜정책의 성공에 대해서 언급했다. 뉴딜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근로자 계급의 고통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개인적인 혹은 정치적인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뉴딜 정책은 전쟁을 금방 시작한 것일 뿐이라면서 더욱 강력하게 추진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는 평화를 강조하면서 평화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적은
· 경제와 금융의 독점(business and financial monopoly),
· 투기세력(speculation),
· 무분별한 대출(reckless banking),
· 계층 간 반목(class antagonism
· 지역주의(sectionalism) 및
· 전쟁 폭리(war profiteering) 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이 단합하여 FDR 자신을 증오하고 있지만 그 증오를 환영한다.(They are unanimous in their hate for me, and I welcome their hatred.)“ 선언했다.
FDR의 이 연설은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나는 전쟁에 대한 참전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기업과 금융을 적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궁극적으로는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습격이후 FDR과 미국이 참전하게 되지만 재선 기간(1937-1941) 내내 FDR은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의 뜻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FDR은 국내적으로는 적개심에 가득 찼다. 보너스 법의 통과에서 확연히 드러났듯이 FDR의 거부권 행사를 두 번이나 번복한 것은 FDR로써는 치욕적이었을지도 모른다. FDR은 보너스 법에 찬동하는 여야의원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혹은 정치적인 사욕에 따르는 것일 뿐 국가의 어려움이나 경제적 부흥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여러 뉴딜 법들이 대법원에서 위헌판결을 받은 것은 FDR로 하여금 사법부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하였을 것이다. 의회나 사법부에 대한 불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업과 금융부문에 대한 불신이었다. FDR의 재계에 대한 본심이 대선을 앞둔 정치적인 수사일 뿐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1936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FDR이 재계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의 각을 세운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FDR의 균형발전론)
재계가 FDR정부에 대해 강력한 반발을 제기한 계기는 제1차 및 제2차 뉴딜 법들이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억제하고 연방정부의 개입을 정당화하는 것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1934년과 1935년 그리고 그를 보완한 1936년의 증세법이었다. 근로자를 위한 일련의 근로자 친화적 노동법 법 제정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근로자들은 파업을 멈추지 않으면서 기업과 재계는 FDR의 노동개혁 법들이 노사안정과 경제안정을 오히려 해치는 악법일 뿐이라는 생각을 굳혀갔다. 그 위에 과도한 소득세, 자본세, 초과이익세 등은 기업과 재계를 경악하게 만들고도 남았다.
그러나 FDR은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에서 미국의 균형발전(seeking balance in America)을 이루기 위해서는
· 금융산업이 대중의 신뢰를 회복해야 하고,
· 증권투자가들의 재산이 보호되어야 하고,
· 근로자들에게 노조 결성권과 착취로부터의 보호권이 주어져야 하고,
· 국가자원을 보호해야 하고,
· 고령자와 아동을 보호해야 하고,
· 가난과 고통을 덜어줘야 하고,
· 기업의 폭압으로부터 투자가와 소비자를 구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FDR은 기업에 대해 매우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탐욕적이며 자금을 가지고 폭군적으로 군림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최측근 몰리(Raymond Moley)가 기업에 대해 보다 유화적인 표현을 할 것을 권고하자 격노한 FDR은 그와의 오랜 친분관계를 끊어버릴 정도로 비신사적인 행동을 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물론 대선을 앞둔 정치적인 상황도 재계에 대한 호의를 보일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정치권 안팎에서 기업가와 재계에 대한 불신이 전에 없이 강했던 것은 사실이다. 민주당 내에서도 그렇고 공화당 진보파들도 기업에 대한 반감이 매우 강했다. 정치권 바깥에서도 타운샌드나 코글린이나 휴이 롱과 같은 사람들이 거의 저주처럼 기업을 비난하고 있었다. 따라서 여야의 정치적 대연대를 통해 재선 및 장기적인 집권을 노리는 FDR로써는 그런 정치적 시대정신을 도외시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FDR의 기업에 대한 적개심은 정치적인 연출 그 이상의 실체가 있는 철학 같은 것이었다. 어떤 학자들은 하버드 시절의 학내 부유층 서클에서 배제된 것이 발단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지만 몰리의 권유에 대해 광적에 가까운 반발을 보인 것은 정치적인 연출을 넘어서는 그만의 내재적인 가치체계가 기업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좋은 증거라고 판단된다.
<계속>
◈ 뉴딜 대해부 <제3부> 실패한 경제, 성공한 개혁
(1) 불안한 2차 뉴딜 성과 <20> FDR이 반대한 뉴딜, 보너스 법(The Adjusted Compensation Payment Act 1936) <21> 불안한 제2차 뉴딜의 성과 : 1935년과 1936년 경제 <22> 다시 불거지는 노사불안 1936년-1937년 <23> 재계에 등을 돌리는 FDR (1936년)
(2) 대선(大選)과 대법원 판결
<24> 1936년 11월 대선과 뉴딜 연대(The New Deal Coalition) <25> 이어지는 대법원의 위헌판결 <26> 대법원 길들이기(The Court Packing Attempt) 시도
(3) 루즈벨트 추락과 전쟁
<27> 흔들리는 뉴딜 경제, 루즈벨트 추락 : 1937년-1938년 <28> 진보세력의 탈바꿈 : 조용한 혁명 <29> 침체로 부터의 탈피 : 전쟁과 국방비 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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