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가중되는 경제혼란과 제2차 뉴딜 (1) 노사분규와 전국적 파업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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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933년의 경제 : 아무것도 나아짐이 없이 가중되는 노사분규
1933년 내내 은행파산은 이어졌고 실물경제는 살아나지 않았다. 물론 최악이었던 1932년에 비해 성장률은 –12.9%에서 –1.2%로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역성장 국면이 지속되었다. 특히 텍사스와 아칸소 등 중부 대평원 지역에는 수십 년만의 대가뭄(the Great Drought)이 닥쳐서 농작물이 고사하고 농민들이 파산했다.(The Dust Bowl) 농가주택에 대한 차압은 지속되었고 민간은 물론 정치권에서도 뉴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쏟아졌다. 뉴딜이 아니라 캐캐 묵은 카드묶음(Old Stacked Deck)라는 혹평이 난무했고 연방정부가 개인의 능력 이상으로 지급하면서 무능력자들을 신사로 만들려고 한다고 비꼬았다.
FD행정부가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행정명령과 법을 입법하고 조치를 내렸지만 농업지역은 농업지역대로 어려움이 지속되었고 산업지역은 산업지역대로 경영부진과 함께 겪어보지 못한 노사분규에 휩싸였다.
1933년 노사분규의 첫 테이프는 캘리포니어 중부의 농업노동자로부터 발생했다. 1933년의 농업파업(the Farm workers strikes of 1933)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파업은 1933년 산타 클라라지역의 콩농장에서 시작하여 여를과 가을 내내 이어졌으며 샌 호아킨 밸리지역의 면화농장으로 번져 약 5만 여명이 참여한 대규모 파업으로 확대되었다. 이어서 1933년 가을에는 중서부 자동차 공장지대에서 노조인정을 요구하는 유명한 싯-다운 파업(the sit-down strike)이 확산되었다.(아래 <17> 확산되는 노사분규 참조)
농업분야에서 FDR에 대한 실망은 극에 달했다. 특히 FDR에게 기대를 많이 걸었던 개혁성향의 농업지도자들은 FDR의 정책이 너무 소극적이며 금융가를 보호하는데 치우쳐있다고 생각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레노(Milo Reno, 1866 –1936)이다. 그는 1921년부터 1930년까지 아이오아주 농민연대의 위원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1928년 선거에서는 스미스를, 1932년 선거에서는 FDR 민주당 후보를 강력하게 지지한 사람이었다. 농민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농민들이 단결해야 하며 다음과 같은 정책들을 요구해왔다.
· 적극적인 인플레 정책,
· 농업생산 보호,
· 농산물 가격 지지,
· 금융기관의 농가주택 및 시설 차압 금지
FDR의 정책 : 달러가치 절하
FDR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당황했다. 농업조정법(AAA)나 은행법과 같은 소극적인 입법으로는 실물경제를 살리는 것도 어렵거니와 정치적으로도 지지를 계속 받기 어렵다는 점을 깨달았다. 농산물가격과 공산물 가격의 비율은 1920년을 기준(=100)으로 1932년에는 58까지 추락했다. 농산물 가격을 상대적으로 올리기위한 특단의조치가 필요했다. FDR의 선택은 금본위제도를 포기하고 달러화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여 인플레를 부추기면서 동시에 수출을 확대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FDR은 1933년 10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지속적으로 금을 사들이면서 달러환율을 인하시켰다. 그 결과 달러환율은 온스 당 $20.67에서 $35.0으로 40% 절하되었다.
· 가격인상(인플레)
· 농산물가격 국제경쟁력 제고
· 전반적인 수출가격 경쟁력도 제고
· 교역조건 [농산물가격(수출))/공산품가격(주로 수입)] 정상화(rebalance)
<16> 상품신용공사(The Commodity Credit Corp., CCC, 1933년 10월)
연방정부투자회사인 상품신용공사(the Commodity Credit Corporation)는 FDR의 행정명령 6340으로 1933년 10월17일 설립되었다. 그 목적은 농산물 가격과 농가소득을 안정시키고지지 보호하는 것이다. 즉,
· 농산물 생산을 증대시키고 가격을 안정시키며 충분한 공급을 보장하고
· 농산물의 효율적인 유통을 위하여
· 매매, 대여, 대지급 혹은 기타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3백만의 자본금을 농무부와 농업신용청(FCA)가 출자하여 최대 $300억을 차입할 수 있도록 한 금융기관이다. 지금은 무한대로 차입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었다. 1939년 7월에 농무부로 흡수되었다.
CCC의 주된 기능은 다음과 같다.
· 상품과 저장시설의 구입 및 건축지원
· 농가의 소득 지원
· 농가의필요한 자재시설 지원자금
· 지주의 자원보호시설 인센티부 제공
· 타 부서 및 외국정부에 대한 농산물 지원
· 국내 및 해외 자서단체 기부 지원
· 국내 및 해외시장개발 지원
· 다양한 소득지원, 재난지원, 자원보호프로그램 지원
· 외국에 대한 농산물 판매 신용지원
현재 CCC의 의무적 대부기능은 다음의 네 종류로 규정되어있다.
① 소득보전과 재난지원(Farm Service Agency 소관)
② 자연보호(FSA 및 국가자원보호서비스 NRCS 소관)
③ 상품가격안정 및 식품지원(Commodity Operations and Food Aid,FSA 소관)
④ 해외시장개벌(해외농산물시장판로서비스Fo.Ag.S 소관)
⑤ 수출신용(FAS와 FSA 공동소관)
<17> 확산되는 전국적인 파업 : 1933년 – 1934년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출범했지만 1933년 FDR정부는 심각한 노사분규에 봉착하였다 물론 노사문제는 노조와 사용자간의 문제였으나 심각한 경제난에 처한 노동자와 사용자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고 또 정치적으로도 개혁진보주의가 대세였으므로 여야 할 것 없이 노조에 동조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정치적인 분위기를 업고 노조는 1933년과 1934년에 걸쳐 전국적이고 대대적인 파업을 일으켰다. 농업, 자동차 산업, 섬유산업 및 항만노조 등 거의 모든 산업에서 노조의 권리를 내세우는 파업이 격렬하게 발생했다.
① 1933년 농업부문 대규모 파업( The Farm Workers strikes of 1933-1934)
1933년 캘리포니어 중부 샅타 클라라 지역의 콩 수확기 시작하여 여름과 가을에 걸쳐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는데 크고 작은 파업이 24개 발생했고 약 5만여 명이 참여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파업은 1933년 10월의 샌 호아킨 밸리의 면화 농장파업으로 수만 명이 동참하여 그 중 2명이 농장주가 고용한 자경단에 의해 사살되었고 8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주 경찰이나 시 경찰은 개입하지 않고 수수방관했다. 이 파업은 미국 역사상 농업파업으로는 가장 큰 규모로 평가되고 있다.
다음해인 1934년에는 농업노동조합인 CAWIU 주도로 양배추와 채소경작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주도했는데 이들은 노조인정은 물론 임금인상과 일 최소 4시간 근무보장과 청결한 식수제공과 교통편의 제공을 요구했다. 주 경찰당국은 사용자들의 요구에 편승하여 대규모 구속과 집회금지 처분으로 맞섰다. 파업노동자와주 경찰 간의 유혈사태와 폭동과 혼란이 한참 동안 지속된 이후에야 연방정부와 연방경찰이 개입하여 중재에 나섰다.
총파업을 주도했던 CAWIU는 연합전선을 펼친 농장주와 주 정부와 멕시코 정부의 방해에 의해 요구사항을 관철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해체되는 운명을 맞았다.
② 오하이오 톨리도의 오토 라이트사 파업(1934년 6월)
Federal Labor Union 18384은 노조인정과 임금인상 문제로 사용자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FLU 18384는 여러 회사에 적을 둔 근로자들이 결성한 노동조합이었으므로 재정적으로도 파업에 압박을 덜 받았고 따라서 비교적 강성노조였다. 1933년 2월 23일 오토-라이트라는 회사의 노조가입 직원들이 파업에 나섰다. 오토-라이트사 거의 모든 직원들이 동참했다. 사용자 측이 5%의 임금인상과 4월 1일에 계약갱신을 약속하고서 5일 만에 파업이 끝났다.
그런데 막상 4월 초가 되자 사용자 측은 약속한 계약갱신을 못하겠다고 선언했다. FLU 18384는 2차 파업을 선언했다. 미국노동당(the American Labor Party, 머스트 당수)이 즉각 노조편을 들고 끼어들었다. 직원과 당원을 동원하여 회사를 둘러쌓다. 사용자 측은 즉각적인 법원의 파업제한 조치를 얻어냈다. 노조는 5월 말 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6천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피켓 시위를 벌였다. 사용자 측은 1500명의 구사대를 조직하여 맞섰다. 톨리도 시경찰도 노조 측에 동정적이었다.
1934년 5월 23일 연방경찰이 무력으로 파업시위를 해산하는 과정(The Battle of Toledo)에 두 명이 총상으로 사망했다. 회사 사장과 미국노동당 간부 2명이 5월 25일 체포되었다. FDR은 특사 태프트를 보내 중재를 시도했다. 톨리도의 중앙노동위원회(85개 단위 FLU 연합체)가 총파업으로 위협하고 태프트의 적극적인 중재 노력에 힘입어 1943년 6월 2일 FLU18384와 사용자는 다음과 같은 잠정합의를 이끌어 냈다. 노조의 완벽한 승리로 평가되는 내용이었다.
· 5% 임금인상
· 최저임금 시간 당 35센트
· 노조인정(회사노조 불인정)
· 노조고충 및 임금 협상 중재조항 설치
· 쟁의행위자 재고용
③ 서부 항만노동자 파업(1934년 5월-8월)
(배경)
서해안 해운항만노조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개별노조로 결성되어 운영되어왔다. 1920년대 들어서 IWW가 항만노동자와 선원노동자와 어부를 중심으로 노조를 결성하여 1923년 산 페드로 파업을 주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1933년 6월 NIRA가 입법되고 나서 노조가입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서해안 해운항만근로자들은 대부분 국제항만노조(International Longshoremens Association)에 가입하면서 기존의 개별 회사노조를 공격하였다.
그 중에서도 알비온 홀 그룹(the Albion Hall group) 이라고 불린 강경행동파들은 1934년 3월부터 전 서부해안의 노동자들이 결집하여 공동계약을 체결하고 공동으로 신규직원을 고용하고 감독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중앙집행부격인 ILA의 온건적인 태도를 거부하면서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대파업)
서부 해안 항만노동자의 대규모 파업은 1934년 5월 9일 발생했다. 서해안 모든 항만노조원이 파업에 참가했으며 며칠 뒤에는 선원노조도 가담했다. 사용자들은 수 천 명의 회사구사대원을 조직하여 맞섰다. 5월 15일 노조가담자들이 사용자 측의 구사대를 공격했다. 경찰은 파업노동자를 향해 발포했고 파커(Dick Parker)가 사망했다. 사망자에 대한 동정심이 퍼지면서 파업은 샌프란시스코, 포틀랜드, 시애틀 등 서해안 전역으로 번졌다.
FDR은 중재에 나섰지만 노조원들은 노사합의안을 두 번이나 거부했다. 7월 초 사용자 측은 항만작업 개시를 시도했지만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면서 다시 사상자가 발생했다. 피의 화요일인 7월 5일 경찰과 사용자 지지자들이 파업 노동자들에게 발포하면서 두 명이 사망했다. 사망한 두 명의 장례식을 계기로 또 다시 총파업이 일어났다. 7월 14일 15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파업에 샌프란시스코 시장은 긴급사태를 발동하였다. 총파업을 주도한 위원회가 전권을 가지고 사용자 측과 협의를 가진 끝에 사용자측이 제시한 안을 수용하고 총파업을 끝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많은 노조원들이 합의한 내용에 불만을 가지고 간헐적인 파업을 시도하였으며 노조의 대표성에 대해서도 이견들이 표출되었다.
④ 미니애폴리스 팀스터 운송노조 파업(The Minneapolis Teamsters Strike of 1934)
1933년까지만 해도 팀스터(the International Brotherhood of Teamsters)는 파업을 대단히 꺼리는 온건한 운전자 노조였다. 그러나 1934년 5월 던 (Ray 와 Miles Dunne) 형제와 몇 몇 강경파들이 주도하여 전 운송업자들을 동참시키는 매우 효과적인 파업을 이끌어내었다. 미니애폴리스 경찰과 사용자 보안요원들은 서로 가두 충돌을 일으켜 경찰이 부상당하기 까지 하였다. 5월 21일 수백 명으로 증강된 경찰병력은 총검을 뽑아들고 시위대를 위협하였으며 노조에 동조하여 시위대 숫자도 늘어났다. 격렬한 대치 중 경찰 두 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하는 일이 발생했다.
중앙노동위원회와 건물연합회와 팀스터합동위원회는 경찰국장 요하네스를 방문하여 24시간휴전을 제안했다. 경찰국장이 조건적으로 찬성한 가운데 시정부는 주정부에 대하여 국가방위군을 배치해 줄 것을 요청했다. 5월 25일 사용자와 노조 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내용은
· 노조를 인정하며,
· 파업참가자를 전원 복직시키며,
· 차별 및 연공서열 조항을 금지할 것 이었다.
조합원은 압도적으로 합의안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사용자 측이 합의내용을 거부하면서 7월 17일 다시 파업이 일어났다. 노조는 평화적인 시위를 위하여 각목이나 흉기를 소지 하지 못하도록 당부했다. 그러나 경찰은 총을 휴대하고 진압에 나섰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하면서 두 명이 사망하고 67명이 부상당했다.
7월 20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던 노조들이 시위에 가담하였고 경찰국장과 시장에 대한 탄핵요구가 빗발쳤다. 7월 26일 계엄령이 내려지고 4천명의 국가방위군이 동원되었다. 시위주동자에 대한 체포가 이루어졌고 노조 본부가 계엄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노조지도부는 중앙노도위원회에 총파업을 일으켜 줄 것을 요구했지만 허용하지 않았다. 1934년 8월 21일 연방중재원이 개입하여 노사간의 합의를 도출해 냄으로써 파업이 끝났다.
⑤ 섬유노동자 파업(the Textile workers Strike 1934)
원래 뉴일글랜드 지역에 번창하던 섬유산업은 1880년부터 서서히 남쪽으로 이동하여 1933년경에는 남부지역이 전국 생산의 70% 이상을 생산하는 면직 및 모직 섬유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섬유산업의 발전은 대규모 대공황 실업자를 유입함으로써 더 낮은 임금과 더 열악한 노동조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뉴딜에 대한 희망)
국가산업부흥법(NIRA)의 제정으로 노조가입권이 보장되자 섬유산업 최대의 노조인 섬유노동자연대(The United Textile Workers,UTW) 가입자는 1933년 1만 5천명에서 1934년 25만명으로 폭증했다. 국가부흥위원회(NRA)가 작업장의 작업규칙과 근무조건과 최저임금 등 전반적인 규제를 강화하고 주 40시간 근무제한을 적용하였다. 사용자들은 작업강도를 매우 높여 근로자를 경영하였다. 분규의 발단은 1934년 5월 사우스 캐롤라이나 홀스 크릭 밸리의 면화작업장에서 발생했다. NIRA 특별 파견인이 현지에 도착하였으나 사용자의 규칙위반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섬유노동자연대는 총파업을 경고하고 나섰다. NIRA가 UTW 에 대하여 노동위원회 참여자격을 주겠다고 제안하자 UTW는 총파업 의사를 철회하였지만 현장 노조지부는 생각이 달랐다.7월 18일 UTW의 알라바마 헌츠빌지부가 파업에 돌입했다. 이어 인근 지역으로 파업이 확대되었다. 8월 10일에는 사망자가 한 명 발생하자 장례식을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긴장이 고조되었다.
UTW는 뉴욕에서 특별회의를 개최하고 다음과 같이 요구하였다.
· 주 30시간 근무,
· 주 $13.00 에서 $30.00 최저임금,
· 근로착취근절,
· 노조인정, 그리고
· 노조참가자 전원 복직.
이 안을 놓고 조합원의 총파업여부 의견을 물은 결과 압도적으로 찬성하여 1934년 9월 1일 전국의 면화작업장의 파업이 발생하였다. 사업자들은 위의조건들이 공허한 위협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연방정부는 NLRB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뒷짐만 지고 방관했다.
(총파업)
총파업은 납부 면화공장전역을 휩쓸었다. 총파업 참가자는 40만 명을 넘어섰다. 사용자들은 물론 남부 주지사들은 몹시 놀랐고 모든 강경책을 다 동원하겠다고 공언했다. 계엄령이 선포된 지역도 나왔고 국가방위군이 대규모로 도원되기도 했다. 트리온(조지아)에서는 9월 2일 시위대와 사용자 보안대원 사이에 총격전에 벌어져 시위대원 두 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고 오거스타(조지아)에서는 여섯 명이 즉시 사망하고 한 명은 부상 중에 사망하기도 하였다.
(파업 종료)
주정부나 사용자들은 시위자들에게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다. 인근 교회나 노조에서 일부 지원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파업을 주도하는 노조지도부로서는 파업을 계속할 동력이 점차 약해졌다. FDR의 지시로 결성된 중재위원회는 새로운 섬유산업 만을 위한 노동중재위원회를 결성할 것을 권고했다. FDR은 그 안을 수용했다. 궁지에 몰린 UTW은 서둘러 승리를 선언하고 총파업을 종료했다.
그러나 총파업은 노동자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노조인정도 받지 못했고 최저임금이나 작업조건 개선과 같은 이득도 획득하지 못했다. 수천 명의 파업참가자들이 일자리를 잃었으며 FDR이 지지했던 섬유산업만의 특별노동위원회도 아무런 권한 없이 유야 무야되고 말았다.
<계속>
◈ 뉴딜(the New Deal) 정책 대해부 <제2부> 가중되는 경제혼란과 제2차 뉴딜
(1) 노사분규와 전국적 파업 <15> 1933년의 경제 : 아무것도 나아짐이 없이 가중되는 노사분규 <16> 상품신용공사(The Commodity Credit Corp., CCC, 1933년 10월) <17> 확산되는 전국적인 파업 : 1933년 – 1934년
(2) 위협받는 FDR <18> 위협받는 FDR
(3) 제2차 뉴딜 <19> 1935년의 제2차 뉴딜(상)
(4) 사회보장법과 증세법 <19> 1935년의 제2차 뉴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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