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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89>시의 홍수 속에서 더욱 빛나는 참된 시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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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5년02월08일 16시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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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도 나도 시인이라는데…

 

 ‘요즘 직장 정년하고 나서 달리 할 일도 없고 하니 시나 써볼까 한다’는 사람을 만나곤 한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참담하기도 하고 비감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좋은 시는 ‘달리 할 것도 없고 해서 써보는 심심파적 말놀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꿈 많던 청소년 시절 많은 사람들이 가슴 속에 솟구치는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성인이 되면서 사는 일에 바빠 멀리했던 ‘표현에의 욕구’를 되 돌이켜 보는 일은 자연스런 충동일 수도 있을 수 있겠다. 이런 사람들은 좋은 시를 골라 충실하게 읽는 독자가 되어 그런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이 독자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시인’을 꿈꾸고, 실제로 이런 저런 편법들을 거쳐 실제로 ‘등단’이란 걸 하고 있다고 한다.

 

요즘 수준 이하의 시들이 넘쳐나고, 너도 나도 시인이 되었노라 명함들을 돌리는 사태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이런 세태에서 연유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찌라시 수준의 우스개 글들이 시로 둔갑해 횡행하고, 시정잡배들까지 시인이 되었다며 명함을 찍어 돌린다. 시집 내는 일이 쉬워지다 보니 별의 별 시집들도 난무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무슨무승 시인협회를 만들고, 문학상을 제정하고 시상식을 갖는다. 호화판 출판기냠회를 열기도 한다.

 

이런 현상이 결과적으로 진정한 시의 독자들을 시로부터 멀리하게 만들고, 시인이라는 명칭 자체가 희화화되어 불리는 경우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난삽해진 시단 풍경들이, 시가 한 시대의 등불이며, 희망적 전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냉철한 성찰의 안목이 필요한 이유이다.

 

너무 많은 문학 잡지, 너무 쉬운 등단

 

지금 한국에는 300 여 종이 넘는 유명무명의 문학잡지들이 간행되고 있고 이들 잡지들 중 대부분이 영세한 것들이어서 간행 자체를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들 잡지의 영세성과 ‘시나 써 볼까’하는 사람들의 허망한 욕구가 맞아 떨어지면서 덜 익은 ‘소위 시인’들이 넘쳐나는 세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시는 짧은 형식 속에 고도로 숙련된 사유와 상상력을 담아내는 예술 장르이다. 단 몇 줄의 시에 천둥 벼락같은 감동을 담아내며, 독자에게 평생 뇌리에 남는 그리움의 옹달샘을 남겨줄 수 있는 것이다. 천부적인 재질과 오랜 정진을 거쳐서야 겨우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참된 시인의 경지인 것이다.

 

그런데도,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시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내가 문청시절, 스승이셨던 박목월 선생님께 여쭤본 적이 있었다.  “선생님, 시인이 되기 위해서 천부적인 재질과 후천적 노력이 어느 정도 될까요?” 선생님 말씀이 “재능이 6이면 노력이 4쯤 되는 게 아닐까?”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그런데 나는 요즘 생각하기를 천부적인 재능이 7쯤 되고 개인이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3쯤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좋은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적 재질을 타고나야 되는 것이란 말이 되겠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너무 많은 자칭 시인들이 범람하고 있고, 너무 많은 시집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과도 맥락이 닿아 있다. 마치 1920년대 아마추어 문단시대로 회귀해버린 느낌이 든다. 시의 애호가로 남아 있어야 할 사람들이 시판에 넘쳐나고, 이제는 시단의 복판에까지 몰려들고 있다. 그들에게서는 프로페셔널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마치 치장을 위한 액세서리 하나쯤 마련하는 호사 취미에 머물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은 그들끼리 무슨 협회를 만들기도 하고, 그들끼리 잡지를 만들기도 하며 신인을 등단시키기도 한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어느 시 행사에 참여한 버스 안에서 누군가가 “등단하고 싶으신 분 연락주세요” 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시인이라는 호칭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시인협회 회장을 할 때,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신입회원 인준하는 일이었다. 떳떳하지 않게 등단이라는 걸 한 사람들일수록 회원입회 추천(한국시인협회의 경우 임원 2사람의 추천, 2년 이내 3편 이상 문예지 발표)을 받아 입회원서를 제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너무 길게 쓴 시, 능력 부족 반증

 

요즘에 발표되는 상당수 젊은 시인들의 시를 나는 읽어낼 수가 없다. 시를 존재 자체가 겪는 욕구불만의 배설체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은 시들이 너무 많다. 시가 욕구불만을 노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욕구불만을 노래할 경우에도 정제된 형식과 구조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시가 터져 나오는 불만을 혹은 갈망을 모두 뱉어내는 토사물의 집하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발표되는 시들의 상당수가 20행, 30행을 넘는 긴 것들입니다. 물론 꼭 필요한 경우 30행, 40행을 넘길 수 있겠지만 시의 행수가 이처럼 길어진 것은 비정상적입니다. 단언컨대 이처럼 긴 시들은 시적 수련이 부족한 작가들의 능력 부족에서 연유된 것이라 생각한다. 장시의 경우라면, 장시로 지녀야 할 구조적 일관성과 필연성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나는 잘 쓴 현대시조에서 현대시가 나아가야 할 향방을 찾아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현대시의 시정신과 현대시조의 정제미가 일체화 될 때, 무잡한 한국현대시의 출구가 있지 않을까 싶다.

 

 문학잡지 편집자의 책임

 

문학잡지 편집자는 단순히 책을 만들어내는 것에서 편집자의 책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문학잡지 편집자는 좋은 작품을 선정해서 발표함으로써 독자와의 만남의 장을 만들어주어야 하겠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단을 교통정리 해줘야 하는 소명도 지닌다. 시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인도해가야 하는 것이고, 좋은 시를 제시해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잡지의 편집자는 필수적으로 비평적 안목을 지녀야 한다. 요즘 문학잡지들은 동인지화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쿤학잡지들이 대개 그 잡지를 통해서 등단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서 작품을 발표하고 거기에 월평이나 작품평 같은 것도 자기 잡지에 실린 것 위주로 평을 하고 있다. 게다가 잡지 간행에 소요되는 경제적 부담까지 관계자들이 부담하기도 한다. 아주 나쁜  경우 등단 시인 호칭을 남발하면서 잡지 간행 비용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고 들린다. 모름지기 문학 잡지는 범 시단의 공기로 엄정하게 존재할 때 참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진짜 시인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이제 참된 시인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너도 나도 시인인이라니 많은 독자들에게 감명을 전하며, 시대를 뛰어넘어 오랜 생명으로 존재하는 시를 쓴 시인만이 시인이라는 엄정한 잣대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좋은 시는 적자생존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선별된다. 국제적인 명망의 마라톤 경기엔 오랜 단련과 능력을 지닌 초청 선수들이 있고 자유참가자 그룹이 있다. 수많은 참가자가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거리를 달린다. 1만명 정도의 참가자가 42.195km의 표준 마라톤 코스를 달린다. 1만여명 전체 참가자가 중 치열하게 선두그룹을 이루며 혼신의 힘으로 달리는 선수들 중에서 세계신기록도 나오고 영광의 시상대에 서는 선수가 나온다. 물론 늦은 시간에 결승점을 통과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게임을 중도에 포기하는 많은 사람들도 있다. 이들이 마라톤 애호가들이다. 이 애호가 그룹의 사람중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루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이 애호가 그룹의 성원 속에 경기력 향상도 이뤄지는 것이라 믿는다. 

 

시집을 몇 권씩 펴내고, 끼리끼리 문학상을 만들어 서로 주고 받기도 한다. 이런 풍토 속에서 누가 시인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명성이란 작가 이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명성은 작품에 주어지는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이었다. 작품이 오랫동안 살아서 읽혀질 때 거기 시인도 함께 있을 것이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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