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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15: 3대 인재가 이어진 후진(後秦)을 망가뜨린 요홍(姚泓) (I)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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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07월16일 16시4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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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55) 후진과 후연의 우호연대(AD394)와 참합피 전투(AD395)

 

요흥의 사람됨이 범상하지 않은 것은 요석덕의 평가에도 잘 나타나 있지만 후연하고 연대한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당시 후진은 북쪽으로 북위와 영토를 다투고 있었는데 북위가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였으므로 북위의 배후에 있는 후연과 연대를 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매우 효과적이었다. 후연 또한 북위와 국경을 접하는 상황에서 후진과 연합하면 방위에 훨씬 유리한 면이 있었다. 후진과 후연 모두 원교근공의 전략이 서로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남하하는 북위와 지난 해 서연을 병합하면서 팽창하려는 후연의 싸움은 불가피했다. 선공은 북위가 먼저 일으켰지만 후연의 모용수는 국력을 동원해 북위 반격에 나섰다. 8만 대군 후연의 선봉에는 모용수의 아들 태자 모용보가 나섰다. 전투는 내몽고 포두에서 일어났다. 후연의 모용보 군사는 북위 탁발규 군사에게 연전연패했다. 부하 장수들은 주군 모용수가 와병 중이니 퇴각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지만 모용보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일단 군사를 추슬러 포두 동쪽 참합피(산서성 양고)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AD395년11월) 겨울 폭풍이 불고 기온이 급강하하면서 황하까지 얼어버리자 퇴각하는 후연군대는 전투한번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동상으로 죽어나갔다. 탁발규가 직접 인솔하는 10만의 대군은 배나 빠른 속도로 후연의 배후를 공격해 들어갔다. 태자 모용보는 단기로 도망쳐 나왔고 10만 대군은 전멸했다. 패전 소식을 들은 모용수는 내년에 더 큰 대군을 가지고 북위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모용수는 다음해(AD396년) 출병 중에 71세로 병사한다. 태자 모용보가 즉위하지만 이때부터 후연은 수세에 몰리고 북위가 세력을 뻗어나가게 된다.

 

(56) 후진 요흥의 동진과 선정(AD397)

 

AD396년 후연을 계승한 모용보의 무능력이 드러나면서 후연 조정은 후계에 대한 불안과 걱정으로 심각한 반란과 반역의 혼란에 휩싸인다. 그 틈을 타고 북위는 무서운 기세로 동진과 남하해왔다. 후연의 핵심 근거지인 중산(산서성 정주)가 함락되고 후연의 황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도망갔다. 후연이 무너지면 그 다음은 후진 차례다.  

 

이런 와중에 요장과 요흥의 어머니 사(蛇)씨가 죽었다. 요흥은 충격에 빠지고 슬퍼하는 것이 예를 넘어서 모든 정치를 내팽개쳤다. 여러 신하들이 한나라와 위나라의 예에 따라 장례를 후히 치르고 즉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정사를 제대로 돌 볼 것을 간곡하게 요청했다. 상서랑 이숭이 상소를 올렸다.

 

“ 천하를 효를 기초로 다스림은 지극히 훌륭하신 일입니다.

  이미 장례가 끝났으니

  평복으로 갈아 입으시고 조회를 받으십시오“  

 

윤위가 이숭을 논박하면서 말했다.

 

“ 이숭은 고례를 어기고 예를 무시했으니

  엄하게 벌을 내려야 합니다.“

 

요흥이 이렇게 답했다.

 

“ 이숭은 우리 모두가 다 잘 아는 효자고 충신이다.

  그가 내게 조회를 권한 것은

  그만큼 국사가 중하다는 것을 깨우치는 충언이다.

  내 그의 말을 듣고 곧바로 조회에 임할 것이니

  그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요흥은 곧바로 군사를 몰아 동쪽 호성(하남성 영보)으로 진군했다. 요흥의 대군이 몰려오자 홍농(영보 동쪽)과 화산(하난성 화현)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왔다.(AD397) 요흥은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려고 매우 노력했고 신하들의 간언을 흉금열고 받아 들였다. 이 대 등용한 인재가 뛰어난 행정가이자 전략가인 두군과 높은 유학자 강감과 강직하고 덕행으로 유명한 고성선이다. 

 

 

(57) 후진 요숭의 동진 낙양공격-낙양함락(AD399)

 

그 해 후진에는 여러 가지 흉측한 자연재해가 많이 일어났다. 요흥은 하늘의 경고라고 생각하고 황제 칭호를 깎아 내려서 왕이라고 부르고 여러 신하들의 작위도 1등급씩 내렸으며 대사면령을 내렸다. 동시에 정사를 간소하게 하고 인재를 적극 등용하였으며 흉악한 관리들을 주살하게 하였다.         

 

AD399년 당시 낙양은 실권자 사마도자의 조카 안제 사마덕종이 다스리던 동진 땅이었다. 그러나 중앙 조정이 타락하고 무능하여 전국은 여러 군벌로 나뉘어 할거하였다. 건강 지역만 사마씨 황실이 다스릴 뿐, 강주의 환온, 예주의 사마상지, 진강의 유뢰지, 광릉의 고아지, 익주의 은중감 그리고 옹주의 양전기가 지역 실세로 군림하고 있었다. 후진의 제공 요숭은 끈질기게 옹주의 핵심지역 낙양을 공략하였다. 궁색해진 옹주자사 양전기는 북위의 탁발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탁발규는 산기시랑 장제를 상산왕 탁발준에게 보내 동진을 도와주라고 명했다. AD399년 8월 탁발규는 6만 대군을 목숭에게 딸려 보냈다. 그러나 북위의 군대가 도착하지 않는 동안 후진의 군사가 낙양을 뽑아 버렸다. 낙약이 후진에게 떨어지자 회수와한수 이북의 여러 지역은 동진을 버리고 후진에게 투항해 왔다.

  


(58) 후진의 서진 공격과 서진의 투항(AD400)

 

 

AD400년 경 장안의 서쪽 지금의 감숙성 지역에는 크게 네 개의 세력권이 있었다. 하나는 난주를 중심으로 하는 걸복국인의 서진(西秦)과 고장(감숙성 무위)을 축으로 하는 독발오고의 남량(南涼), 그리고 그 서쪽 지금의 장액을 거점으로 하는 저거몽손의 북량(北涼)과 그보다 더 서쪽 지금의 주천을 중심으로 하는 이고의 서량(西涼)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걸복국인-걸복건귀(형제)의 서진과 독발오고-독발이록고(형제)의 남량은 요흥의 후진과 국경이 겹치는 탓에 서로 다툼이 많았다. 

 

요흥은 먼저 요석덕을 농서지역으로 보내 서진의 걸복건귀를 공략했다. 걸복건귀는 농서 수비를 모올에게 맡기고 자신은 요석덕의 배후 보급로를 차단하려고 시도했다. 요흥이 곧바로 요석덕의 뒤를 받쳐 주는 바람에 걸복건귀의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스스로 몸을 피해 부한(감숙성 유중)으로 돌아왔다. 걸복건귀의 3만 6천 군사는 후진에게 투항했다. 그리고는 전갈을 수도 금성(감숙성 난주)로 보내 모두 후진에게 항복하라고 지시한 뒤 스스로는 남량의 독발이록고에 투항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독발씨가 본인의 의도를 의심할까 두려워 아들 걸복치반은 인질로 남량의 독발씨에게 보내고 본인은 후진에게 항복했다.  

  


(59) 후진의 서쪽 세력 장악 (AD401)

 

서진이 사실상 함락되자 후진 장수 요석덕은 난주에서 황하를 건너 더욱 북쪽으로 군사를 몰아 고장(감숙성 무위)의 독발씨 남량을 침범해 들어갔다. 독발씨는 전투를 피해 뒤로 물러났다. 후량의 여륭들이 고장을 중심으로 후진에게 항전했으나 장수 여타는 군사 2만 5천을 거느리고 요흥에게 항복했다. 서량의 이고, 북량의 저거몽손, 남량의 독발이록고가 모두 요흥에게 투항하고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했다. 얼마 있지 않아서 여광이 AD389년 세웠던 후량의 여륭도 내분이 일어나 결국 후진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전진이 멸망한 뒤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군웅들로 쪼개졌던 농서 이서지역은 후진의 요흥에게 완전히 통일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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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후진과 북위의 대립 요홍의 태자옹립(AD402)

 

이제 황하 이북지역은 요흥의 후진과 탁발규의 북위 두 나라만 남아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탁발규는 말 1천 필을 하적간에게 붙여 요흥에게 보내 딸을 배필로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요흥(AD366-AD416)은 북위 탁발규(AD371-AD409)가 이미 2년 전 후연 모용보의 딸을 황후로 취한 뒤였음을 알고 하적간을 가두어버렸다. 북위는 하적간이 포로로 잡힌 것을 알고 후진의 변경을 침략하고 대대적으로 군사와 군량을 비축하면서 평양(산서성 임분)을 거점으로 남침을 준비하였다.

 

북위의 상산왕 탁발준은 먼저 고평(영하 고원)에서 후진을 쳐들어 왔다. 그 지역을 수비하던 후진의 몰혁간과 유발발은 진주(감숙성 천수)로 후퇴했다. 탁발준은 점령한 지역의 포로를 모두 붙잡아 북쪽으로 이주시켜버렸다. 후진의 동쪽 하동(산서성 하현)과 서북쪽 고평으로부터 북위가 쳐들어오자 후진도 병사를 징발하고 군량미를 비축하며 장차 있을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북위와의 한 판 대전을 준비하던 요흥은 만일에 대비하여 열 네 살짜리 아들 요홍(AD388-AD417)을 황태자로 책봉하면서 전국에 사면령을 내렸다. 요홍은 학문을 좋아하고 온순하며 관대하고 효성이 깊었으나 한 가지 흠은 군사적인 문제에 관심이 별로 없고 또 잔병치레가 많았다. 후계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하던 요흥은 결국 요홍을 세우기로 결단한 것이다.  

 

(61) 후진-북위의 전투 : 시벽(柴壁)의 전투(AD402)

 

AD402년 봄 요흥은 의양공 요평과 상서우복야 적백지를 보기병 군사 4만과 함께 보내 북위 정벌하도록 했다. 요흥 자신 또한 군사를 이끌고 선봉장의 뒤를 이었다. 몰혁간 군사는 천수에 주둔하고 요흠은 낙양에 진을 치며 만일에 대비했고 태자 요홍과 상서령 요황은 수도 장안을 지켰다. 북위 또한 전쟁을 꾸준히 준비해 온 터라 즉각적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북위의 선봉에는 비릉왕 탁발순과 예주자사 장손비가 6만 기병을 앞세워 진격했고 주군 탁발규는 더 많은 대군을 거느리고 탁발순의 뒤를 받쳐 주었다.

 

북위의 대군이 영안(산서성 곽주)에 도착할 무렵 후진의 선봉장 요평은 2백 기병을 보내 북위군을 직접 염탐하다가 전원이 사로잡혔다. 요평은 물러나 시벽(산서성 임분 서남)에 웅거하였다. 탁발규는 곧바로 추격하여 시벽의 요평 후진군을 포위했다.(AD402년8월9일) 요흥은 요평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4만 7천의 군사를 급히 보내왔다. 요흥의 계획은 임분의 동쪽 천도를 먼저 장악하므로써 포위를 펼친 북위군의 배후를 위협하자는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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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군은 이미 그 곳의 지형을 철저히 파악하여 요흥 군이 어디로 어떻게 올지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요흥 또한 북위군의 위세에 눌려 주춤주춤하면서 느릿느릿 북상했으므로 그만큼 북위군에게 대비할 시간을 벌어 주었다. 8월 28일 북위 탁발규는 3만 기병을 직접 인솔하고 좁은 협곡을 북상하는 후진군을 기습했다. 그 곳 지형은 양쪽으로 길게 산맥이 뻗어 있어서 매복습격에 매우 취약한 지형이었다. 후진군은 몽갱(산서성 양분) 남쪽에서 북위군에게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요흥은 후퇴했고 요평은 시벽에 갇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두 달이나 갇혀 양식과 화살이 다 떨어진 요평은 10월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뚫으려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전 장수들이 분수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탁발규는 수영잘하는 사람을 시켜 쇠갈고리로 자살하려는 장수를 건지려 했으나 대부분 익사하고 말았다. 탁발규가 사로잡은 후진군 포로만 2만여 명 이었다. 요평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은 요흥과 그 군사들의 통곡 소리가 산과 골짜기를 흔들 정도였다. 요흥은 탁발규에게 화친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다른 일이 없었다면 탁발규는 군사를 몰아 장안으로 들어 왔을 것이다. 그러나 북위의 배후에 있던 유연이 북위를 공격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위험을 느낀 탁발규는 서둘러 군사를 수습하여 돌아갔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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