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의 나무 사랑 꽃 이야기(44) 후박나무와 돈나무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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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가면 도로변에 서 있는 키큰 시원한 야자수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사시사철 푸른 잎을 자랑하면서지요. 필자는 동남아 지역으로 출장 갔을 때 시원한 새벽에 호텔 근처를 산책하면서 공원이나 도로변에서 만나는 이런 야자수들이나 고무나무 등과 같은 늘 푸른 나무들을 보면서 싱그러운 기운을 느끼곤 했습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도시 거리에 심겨 있는 가로수들은 주로 낙엽 활엽수들입니다. 은행나무, 플라타너스, 느티나무 등이 가장 보편적으로 심겨 있는 나무들이고, 거리에 운치를 더하기 위해 벚나무, 이팝나무, 메타세콰이어 같은 특별한 나무들을 심는 경우도 제법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들 낙엽 활엽수들은 겨울이면 모두 잎을 떨어뜨려 버려서 추운 겨울에 도시의 황량함을 가중시킬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가끔 소나무 같은 상록수들을 심기도 하지만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만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남쪽 해안가의 도시들에서 만나는 상록 가로수들이 정답게 느껴집니다. 비록 한겨울에는 그곳들도 추워지긴 하지만 거리나 공원에서 푸른 잎을 유지한 상록수들을 만나는 것은 역시 도시의 분위기를 한층 편안하고 풍성하게 한다고 느끼곤 하지요.
가로수들은 줄기 아래까지 지나치게 풍성한 잎을 달고 있으면 운전자나 보행자의 시야를 차단할 수도 있기 때문에 줄기가 조금 시원하게 벋어 올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부분의 낙엽 활엽수나, 소나무도 그런 요건을 통과한 나무들이지요.
남쪽 해안가 도시들에서 가로수로 심어질 수 있는 상록활엽수 중에 이런 요건을 잘 통과한 나무가 바로 후박나무가 아닐까 합니다. 제가 고향이라서 비교적 자주 가는 부산에서도 종종 보아 왔지만, 여수, 통영, 해남 등지에서도 길가의 후박나무를 반갑게 만나곤 했으니까요.
후박나무? 수도권을 비롯한 북쪽에 거주하는 분들도 들어본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의 뇌리 속에 남아 있는 후박나무는 안타깝게도 이 글에서 다루려는 그 나무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공식 명칭으로 일본목련이라고 불리는 나무이지요. 보통 목련보다 잎이나 꽃 등 모두 큼직큼직한 나무입니다. 물론 목련처럼 가을이면 잎을 떨구는 낙엽수입니다. 지난해까지 6년간 국립수목원장을 역임한 이유미 선생은 저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우리 나무 백 가지’라는 책에서 이 후박나무를 다루면서 이렇게 된 연유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본목련의 일본 이름인 ‘호오노기 (朴の木)’를 한자로 쓰면 厚朴(후박)이 된다는데, 이를 들여올 때 조경업자들이 후박나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이런 오해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 일본목련 나무도 언젠가 나무사랑 이야기에서 다룰 만한 나무이긴 합니다.
진짜 우리 후박나무의 잎의 크기는 잎이 정말 큰 일본목련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상록활엽수 중에서는 큰 편이고 묘하게도 잎 전체 모양이 잎자루 쪽보다는 잎끝 쪽이 넓어지는 도란형이라서 (계란 거꾸로 세운 모양) 일본목련과 닮았습니다. 1년 사이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대부분의 낙엽수들과는 달리 후박나무는 봄에 꽃을 피운 후에 1년이 지난 여름이 되어서야 열매를 맺습니다. 필자는 2017년 7월 여수를 방문했을 때 호텔 주변 도로변에서도 이 나무를 만났지만, 해상 케이블카를 타고 건너간 돌산공원에서 힘차게 자라고 있는 후박나무 군락을 보았는데 까맣게 익은 열매가 인상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이유미 선생에 의하면 남해 창선면 바닷가에 천연기념물 299호로 지정된 왕후박나무가 한 그루 있다는데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물리치고 나서 이 나무 그늘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오래 된 나무라고 합니다. 필자의 버킷리스트에 들어가 있는 나무이지요.
묘하게도 필자는 아직 활엽 상록수에 익숙하지 않을 때 이 후박나무보다 훨씬 키가 작은 돈나무와 후박나무를 헷갈려 했던 적이 있습니다. 돈나무 역시 남쪽지방에서만 자생하는 상록활엽수의 하나입니다. 두 나무 모두 자주 볼 수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후박나무가 늘씬한 모습으로 15m까지 크게 자라는 데 비해 돈나무는 키가 작은 관목인데 두 나무를 헷갈렸으니 부끄러운 일이지요. 이렇게 키가 작은 돈나무는 그냥 자연에서 자라게 두어도 그 푸른 잎을 나무 전체에 덮고 옅은 초록색 앙증맞은 열매를 매달면서 수형 전체적으로 워낙 깨끗한 모습으로 자라서 남쪽에서는 해안가 공원을 멋지게 장식하거나 공원의 낮은 울타리로도 참으로 잘 어울리는 쓰임새가 많은 나무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 이름이 돈나무라고 해서 금전수라는 이름으로 둔갑시킨 후에 실내 화분식물로 키워서 개업 선물용으로 판매하고 있고 그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북쪽에서도 실내에서 쉽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필자는 이 나무의 잎들이 가지 아래로부터 차곡차곡 위로 쌓이듯이 달리고 게다가 잎가장자리가 살짝 뒤로 말리는 모습이 시장 상인들이 지폐를 세려고 살짝 뒤로 젖혀 들고 있을 때의 모습이 연상되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나 했습니다. (색깔까지 초록색이라 당시 고액권이었던 만원짜리 지폐의 이미지가 떠올라서 말입니다.)
이유미 선생에 의하면 이 나무의 이름은 제주도 토박이 말로 ‘똥낭’ (똥나무란 뜻)이라 불리던 것을 조금 순화시켜 공식 명칭으로 채택한 결과라고 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된 발음을 못해서 붙인 일본 발음을 그대로 채택한 것 같다고 이 선생은 개탄하고 있습니다만.) 똥나무라고 불린 것은 아마도 이 나무의 초록색 열매가 익어서 벌어지면 안에서 빨간 작은 종자들이 드러나는데 이 종자들을 잡아두려고 나무가 마련한 끈적거리는 액체가 강한 냄새를 풍겨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라고 유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무는 줄기든 뿌리든 마른 후에 아궁이 장작으로 쓰려고 해도 심한 악취가 난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무라면 어딘가라도 조금 쓸 데가 있어야 하는데 전혀 쓸모가 없다고 제주도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 아닐까 하는 짐작도 듭니다.
그런데 이렇게 쓸모없는 나무를 귀신이 매우 무서워한다고 해서 남쪽 섬 지역에서는 이 나무를 액을 쫓는 음나무 역할을 한다고 ‘섬음나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일본에서도 이 나무의 가지를 입춘 때 잘라 문짝에 붙여서 귀신을 쫓았다는 기록이 있고, 중국 설화 동방삭 이야기에도 이 나무가 귀신이 무서워하는 나무로 등장한다고 하니 참으로 묘한 나무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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